[명문 종친회를 찾아가다] 합천이씨(陜川李氏)
[명문 종친회를 찾아가다] 합천이씨(陜川李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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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7.03.23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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八封君(팔봉군) 七諡號(칠시호) 배출한 충절과 선비 가문

백세시대은 숭조(崇祖), 경로효친의 아름다운 전통을 계승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명문가 종친회를 찾아가다'는 제하의 기획을 마련했습니다. 명문거족의 본향은 고유의 전통과 가풍을 이어가며 충효예를 계승하고 있습니다. 본관 시조와 유래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고, 그 성립과 발전, 인물배출 등에 대해 살펴보는 본 기획을 활용해 독자 여러분의 성과 본, 대종회 및 종친회 등을 새롭게 알아보는 계기를 마련하시기 바랍니다. (연재는 성씨·본관 대종회의 요청 순서에 따라 게재됩니다. 이번 호에는 두 번째로 합천이씨 편을 특집으로 꾸몄습니다.)  글 박병로 편집국장

 

八封君(팔봉군) 七諡號(칠시호) 배출한

충절과 선비 가문

 


합천이씨의 뿌리는 신라가 개국하기 전까지 올라간다. 신라 개국 전, 신라6촌의 우두머리 촌장으로 기원전 57년 박혁거세를 왕으로 추대했던 표암공 알평이다.

 

신라 3번째 왕인 유리왕으로부터 이(李)씨 성을 하사받았으며, 경주이씨, 전주이씨 등 우리나라 이씨 여러 본관의 비조가 되고 있다.

 

  강양군 신도비 제막식(1995. 11)

 

합천이씨는 표암공 알평의 원대손(遠代孫)으로 표암공을 모신 사당에서 경주이씨와 경주이씨에서 분파한 이문들과 함께 제사를 지내고 있다.


합천이씨의 시조는 강양군 이개(李開). 표암공의 39세손으로 신라 말에 태어나 문창후 최치원을 사숙하여 학문적으로 크게 이름을 얻었으며 벼슬에 나아가 한림(翰林)에 올랐다. 신라 마지막 왕 경순왕이 그의 처조부가 되며, 국가의 훈신으로 인정받아 강양군에 봉해졌다.


경순왕이 고려 태조 왕건에게 항복함으로써 신라가 망하게 되었을 때 강양군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절의를 지켜 끝내 고려에 복속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고려 조정으로부터 강직(降職)을 당하고 자칫 화를 당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때, 18세인 딸이 조정에 탄원을 하여 화를 면하고 강양 호장으로 임명되었다. 강양호장으로 강양 일대를 통치하는 동안 그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현인으로 우러름을 받았으며, 만루정사(晩樓精舍)를 짓고 후학을 기르다가 경순왕이 죽자 애통해 하던 끝에 세상을 떴다.


강양, 즉 지금의 합천이 본관이 된 것은 강양호장이었기 때문이다. 고려태조의 호장제도는 호장으로 하여금 해당 지역을 통치하게 하는 대신 가족 중 한사람을 볼모로 고려 조정에 출사하게 하여 지방을 효율적으로 다스리는 제도였다.

 

이때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성씨가 같은 경우가 많아 구별하기 위해 관향을 정했다고 한다.


이로 보아 합천이씨 본관시조의 유래에 대한 족보와 구전이 객관적이고 실증적임을 알 수 있다. 신라 말 강양군에 피봉됐던 인물이 고려태조 때 강양호장 직위를 갖게 된 경위가 과장되지 않고 사실적으로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또 시조 강양군 이후 분파하는 각 파조(派祖)에 대해서도 과장 없이 기록하고 있다.


합천이씨의 이와 같은 조상에 대한 합리적인 태도는 우리나라 토박이 성씨인 이씨, 즉 경주이씨의 잃어버린 선조의 계대를 복원하는 데 큰 기여를 하기도 했다.

 

  경원사.

 

이상희 종친회장은 “우리 족보를 만들면서 족보에 표암공 알자평자 할아버지로부터 대수를 하나도 빠지지 않고 만들었어요. 경주이씨는 대충 짐작만 했지 애매했는데 우리 족보를 인용하여 그 부분을 맞췄습니다. 경주이씨도 인정을 합니다”라고 했다.


신라 이전의 역사에 대한 기록이 불분명한 마당에 이것이 과연 타당한가. 이상희 종친회장은 고유명사이므로 중국의 문헌이나 삼국사기 등에서 찾을 수 있고, 고대 사회가 씨족사회였으니 족보 기록이 정확할 것이라고 했다.


어쨌든 이로써 경주이씨는 물론, 그 아래로 분관(分貫)해 나간 합천이씨, 아산이씨, 재령이씨, 진주이씨, 우계이씨, 장수이씨, 원주이씨 등 이문들도 시조의 유래를 여기서부터 인용하고 있다. 1세 알평, 2세 유, 3세 타, 4세 중가, 5세 석… 32세 사언까지는 한 세대에 1인씩 휘가 전해지고, 33세 이후부터 다계열로 분파한다.

 

합천이씨는 33세 때 기와 위(渭)로 양분 될 때, 위 계열로 분파하여 34세 진두, 35세 전지, 36세 원, 37세 영장, 38세 사(思)에 39세 강양군 개(開)로 잇는다.


합천이씨 시조 강양군은 1남 1녀를 두었고, 여기서 2남 위(偉)와 돈(惇)으로 갈라지면서 크게 번성하게 된다. 따라서 합천이씨는 위 계열과 돈 계열로 크게 구분되며 위계열 8파(전객령, 전서, 별사, 교리, 첨사, 목사, 부사, 직제학공파)와 돈 계열은 3파(상서공파와 두 참지공파) 등 모두 11파로 이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중앙종친회장인 이상희 전 장관은 이에 대해 “내가 합천이씨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자랑하고 싶어요. 우리 선조들께서 참 착하고 선량한 분들이었어요”라며 “우리 선조들은 영상이니 재상이니 왕비로 들어간 분이 있느니 야단스럽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나라에 폐를 끼치거나 역신 노릇을 한 선조가 한 분도 안 계십니다. 선비로 살려고 노력하시고 각 고을에서 학문이 높으신 점잖으신 분들이었습니다”고 했다.


본관 시조로부터 물려받은 절의와 참다운 선비로서의 정신의 일면을 엿볼 수 있는데, 이는 물론 선비 집안인 합천이씨 종친회장으로서의 겸양이자 동시에 명문가로서의 자부심에서 우러나온 말이다.

 

합천이씨는 8봉군 7시호(八封君七諡號)를 배출한 명문 중의 명문. 8봉군은 7강양군 1합천군으로 본관조 이개, 6세 이중비, 7세 이익, 9세 이약, 10세 이수전, 14세 이요, 16세 이효까지 강양군에 봉해졌고, 17세 이존명이 정헌대부합천군(正憲大夫陜川君)이다.

 

시호를 받은 7인은 본관조 이개, 6세 이덕손, 11세 이경복, 12세 이예, 16세 이효, 17세 이존명, 22세 이윤서 등이다.


임진왜란 때 일본에 포로로 끌려갔던 합천이씨 진영(眞榮)은 기주(紀州) 번주 도꾸가와 요리노부(德川賴宣: 이에야스의 10번째 아들)의 시강이 되었고, 특히 주자학이 높은 경지에 있어 기주 도꾸가와 번정의 정경문화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기주 도꾸가와번은 요리노부로터 14대 250년 동안 영화를 누렸으며, 현재까지도 이진영과 그 아들 매계의 학문이 전해지고 있다. 이진영은 도꾸가와 요리노부로부터 신하가 되어달라는 간청을 받았으나 합천이씨 집안 대대로 이어져 온 절의를 지켜 ‘불사이군’이라며 거절했다.

 

그럼에도 그 학문이 높아 방문자로서 번주를 가르쳤다. 그의 후손이 일본에서 10세까지 이어졌으나 절손되어 현재는 그가 남긴 역사 기록과 유물들이 남아 있다.


이진영의 일대기는 합천이씨 종친회장인 이상희 장관이 ‘파신의 눈물’이라는 책으로 엮어 펴냈으며, 2002년 한일월드컵 때는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고 관련하여 진혼 음악공연 등의 행사가 개최되기도 했다.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참전하여 포로가 됐던 이진영의 예에서 보듯이 합천이씨는 지사적인 전통과 나라에 폐를 끼치지 않고 충성을 다하는 신하가 많았다.

 

그러다 보니 조선후기에 이르러 높은 관직에 나아가기 보다는 지조를 지키는 은사가 많았다. 훌륭한 문집을 남기고 초야에 은둔한 선비로 존경을 받았다는 많은 일화를 남기고 있다.

 

 

역사속의 합천이씨 인물


고려-조선조 동안 주요 관직 역임
시조 李開 등 강양군 모두 7명 피봉


  일본에 있는 이진영의 묘비.

 

합천이씨의 인물은 8봉군 7시호로 상징적으로 알아볼 수 있다. 시조 강양군 등 모두 7명이 강양군으로 피봉됐고 1명이 합천군(陜川君)에 봉해졌다.

 

강양군은 시조 이개, 6세 이중비, 7세 이익, 9세 이약, 10세 이수전, 14세 이요, 16세 이효 등과 17세 이존명이 합천군으로 봉해졌다.

 

이와 동시에 합천이씨 인물을 상징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시호를 받은 7인이다. 문충공 시호를 받은 시조 이개, 6세 장숙공 이덕손, 11세인 문익공 이경복, 12세 문질공 이예, 16세 문간공 이효, 17세 평경공 이존명, 22세 장의공 이윤서 등으로 고려와 조선조에 이르는 기간 동안 주요 관직을 역임했던 인물이다.

 

또 임진왜란 때 포로로 일본에 잡혀가서 일본 막부 도꾸가와 가문의 신하가 되라는 것을 불사이군이라며 거부하고 충절을 지키고 높은 학식으로 주자학을 가르친 이진영도 있다.


합천이씨 역대 주요인물을 보면 다음과 같다.

▶고려조
인영, 위, 문통, 중비, 익, 유간, 금, 존순, 수전, 유연, 근, 광진, 원경

▶조선조
충량, 용서, 시탁, 후신, 정상, 시경, 근지, 충서, 어춘, 석강, 숙장, 우범, 진창, 세재, 사삼, 명원, 원유, 익희, 극능, 취방, 사진, 한철, 석봉, 석두, 정일, 위창, 태경, 시목, 인년, 능복, 방대, 정림, 원걸, 완길, 원준, 재철, 원우

▶조선조 급제자 정록
숭로(연산2년), 희승(연산12년), 복로(중종8년), 희민(중종11년), 인(중종 12년), 도남(중종28년), 세구(중종28년), 세림(중종38년), 광전(명종1년), 윤희(선조1년) 언림(영조26년)
<성씨의 고향>(중앙일보사) 인용

 

현대의 합천이씨 인물

 

구한말 식민지 때 절의 지킨 선비 많아
성철스님 등 정계 관계 등에도 인물


구한말부터 식민지시대를 지나는 동안 합천 이씨는 지조를 지킨 은사가 많았다.

 

현대에 와서 이름을 알만한 사람으로 먼저 현대한국의 대승으로 꼽히는 성철 스님(이창훈)을 꼽을 수 있고, 이희성(참모총장, 교통부장관), 이만섭 국회의장, 대종회장인 이상희 전 장관, 영화배우 이대엽(전국회의원), 문학가 이병주씨, 한국 씨름계를 빛낸 이만기 등 정계, 관계, 재계, 학계, 문화 예술방면에 인물이 나타나고 있다(현대의 주요인사 명단은 생략).

 

합천이씨 족보편찬 역사
기축보 1책 간행 첫 족보


합천이씨 족보는 중종24년(1529년) 1책 족보를 시발로 현대까지 편찬되고 있다. 특히 1책으로 간행된 첫 족보는 우리나라 족보연구가들의 관심을 끌만큼 대단히 앞선 시기에 나온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합천이씨의 인구분포

전북지역 2842명 수도권도 많아


합천이씨의 원래 뿌리는 경주이씨. 신라 말 인물인 휘 개(開)가 지금의 합천인 강양에 이거하면서 오늘의 후손으로 번연(蕃衍)해 나갔다. 그런데 합천이씨는 원시 부족이 세력을 확장해 나가는 것과 흡사하게 깊은 골 합천으로부터 인근 지역으로 이거해간다. 이상희 종친회장은 “황강을 줄기로 하여 퍼졌다”고 추정하고 있다.


황강변으로 해서 하나는 낙동강, 또 하나는 경호강과 섬진강으로 조심스럽게 탐색하듯이 퍼져나갔다. 낙동강쪽은 김천, 성주 등으로 뻗어나가고 경호강 섬진강쪽은 경상남도로 뻗어나가 아무래도 경남에 인구가 많고 그 뒤로 경북에 합천이씨가 많다.

 

그런데 그중 경남의 함양과 산청으로 간 조상들 일부가 등성이 너머로 모험을 감행하여 전라북도 임실과 남원, 충청도 쪽에도 정착했다. 또 섬진강쪽으로 간 일부 사람들은 강 건너 광양으로 들어가 정착하였으나 순천 지역을 넘어가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인터뷰-합천이씨중앙종친회 이 상 희 회장

“종친회관 건립, 전 종친 수록한 전자 족보 완간 목표”


이상희 중앙종친회장은 1932년 경북 성주에서 목사공파 33세로 태어났다.

 

행정고시(12회)에 합격하여 정통 관료의 길을 걸었으며 차관, 도지사, 내무부장관·건교부장관을 역임했다.

 

합천이씨 출신으로 일본 주자학에 큰 영향을 준 이진영의 일대기 ‘파신의 눈물’, 우리꽃과 관련된 여러 저서를 집필하고 있으며, 종친회장을 비롯하여 사회봉사단체인 한가람회에서 고건 전시장과 공동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상희 회장을 만나 합천이씨 중앙종친회에 대해 들어보았다.

합천이씨 중앙종친회에 대해 간략히 말씀해 주신다면?
합천이씨는 위(偉) 계열 8파와 돈(惇)계열 3파 등 11파가 있습니다. 중앙종친회 연혁이 그리 오래지 않고 11개 파 종친회의 독자성이 강한 편입니다.

 

중앙종친회가 역할을 하기 전에는 본관지인 합천의 화수회에서 그 역할을 했으나 지금의 합천 화수회에서는 시조 묘우 관리를 비롯한 종중의 고유문화와 재산유지관리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중앙종친회는 합천이씨 국내외 33개 지역 종친회의 유대와 통합관리를 하고 있으며 각 지파의 결속과 친목, 전체 종중업무를 주관합니다.

종친회란 이런저런 분란이 많게 마련입니다. 운영은 잘 되십니까.
역시 재정적인 면에서 어려움이 있습니다. 종중 자산이 넉넉하지 못해 종친회관이 없고, 중앙종친회 사무실이 이리저리 이사를 다니고 있으니 말이지요.

우리종친회의 회훈이 숭조상문(崇祖尙門)입니다. 그러니 할 일이 많지요. 작년에 합천 화수회에서 족보를 만들어 배부하고 있는데, 이게 옛날 방식의 고정관념에 따라 만들어졌습니다. 색인부나 주소 등 현대적인 면이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여러 가지 사업을 수행할 것입니다.

중앙종친회를 운영하는 종친회장으로서의 철학이 있다면?
종친회원들이 전부 어디 어떤 분이 뭘 하고 있는지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우선 목표입니다. 전자족보를 만들어 항상 실시간 상황을 알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합니다.

 

각 파종친회 하나하나가 친목을 도모하고 가까이 지내는 것도 중앙종친회 운영에서 빼놓을 수 없는 목표지요. 11개 파종친회가 독자성을 가지고 활성화 돼 있지만 파벌적 의식이나 중앙종친회와 대립한다거나 그런 것은 없습니다.

 

  이상희 회장(왼쪽 두번째)과 중앙종친회 임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가문의 전통이 있습니까?
역사 교과서에 나올 정도의 큰 인물은 없으나 ‘8봉군 7시호(八封君七諡號 )가 나온 종친회입니다. 조정에서 큰 벼슬을 하여 많은 종토를 남겨주시지 않은 것이 섭섭할 때도 있지만 높은 학문을 증거할 만한 문집을 남기신 분들이 많아 자랑스럽습니다.

 

역시 전통이라면 나라에 폐 안 끼치고 역신노릇 한 사람이 없고, 일본에 주자학을 가르친 이진영 같이 국위선양하는 면이 아닐까 합니다.

젊은 세대와의 교감이나 숭조의식을 계승하기 위한 활동은 하시는지요?
인구가 많으면 재벌도 있고, 종친회에 기부하는 회원도 많습니다만 우리는 그렇지 못합니다. 그래도 결속의식이 어느 성·본에 뒤지지 않습니다. 청년회, 동호회 부녀회, 외국의 종친회 등 물 밑에서 많은 활동이 있습니다.


합천이씨는 경주이씨에서 나온 이씨로, 재령이씨 등과 함께 유서가 깊습니다. 우리의 그런 조상의 가계도를 많이 알려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보고 청년회 학생 중에서 모집을 하여 여름방학 때 관향인 합천과 시조공이 있는 경주 등을 순례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이씨 시조공인 알평할아버지께서는 신라6촌의 촌장 수장으로서 그야말로 민주주의적인 방법으로 신라시조 박혁거세를 왕위로 옹립한 분입니다. 그분의 민주주의 정신을 기리고 숭모하도록 가르치고 있습니다.

경주이씨 시제에도 열심히 참례하고 있지요?
물론입니다. 매년 표암재에서 거행되는 시제에 대대적으로 참석합니다. 표암재를 상당한 돈을 들여 보수하여 지금같이 규모를 갖춘 것은 우리 합천이씨 공이 큽니다.

 

우리 합천이씨 종친회 실무자인 사무국장도 가서 많은 일을 했고, 특히 2대 종친회장 이만섭 의장이 정말 애를 많이 썼지요. 대의정치와 민주주의의 발상지라는 점에서 국가 문화재로 성역화하는 데 이만섭의장이 국회의 수장 자격으로 애를 쓰셨다는 얘깁니다.

끝으로 종친회원들께 하고 싶은 말도 있을 것 같습니다.
회장으로 있으면서 회관을 만들고 우리 종친회원이 빠짐없이 수록될 수 있는 전자족보를 만들 수 있도록 많은 협조를 당부합니다. 종친회원이 11만여명이니 1인당 1만원씩만 십시일반 해도 회관을 조만간 마련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협조가 필요한 시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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