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 종친회를 찾아가다] 서림(서천)이씨(西林李氏)
[명문 종친회를 찾아가다] 서림(서천)이씨(西林李氏)
  • 관리자
  • 승인 2007.03.30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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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상공신, 대제학 충절선비 배출한 ‘稀姓’(희성)

본지는 숭조(崇祖), 경로효친의 아름다운 전통을 계승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기획 특집 면을 마련했습니다. 명문거족의 본향은 고유의 전통과 가풍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이 지면은 해당 성씨·본관 대종회의 요청 순서에 따라 기획되며 본지 60호 ‘한국 성씨·본관 총괄 기획특집 기사에 이어 성주이씨(61호), 합천이씨(62호)를 게재했고 이번 호에는 세 번째로 西林(舒川) 李씨 편을 꾸몄습니다. 다음에는 광산탁씨, 성주도씨 등의 순으로 이어집니다.                                               

 

박병로 편집국장


 

벽상공신, 대제학 충절선비 배출한 ‘稀姓’(희성)


서림과 서천은 동본, 대종손 중시 서림을 앞에 표기
서천에 종토 부여홍산 독락정 옛모습 그대로 남아

성씨의 유래에 대해 기록한 <성씨의 고향>(중앙일보사간)과 <한국성씨총감>(한국성씨연합회간)에 의하면 서림(서천)이씨는 고려 초기의 이익존(李益存)을 비조(鼻祖)로 삼고 있다.

 

이익존의 후손은 고려조에서 왕가의 외척 또는 호족과 연계 혼맥을 맺을 정도로 세도가 있었으나 후사가 귀한 탓인지 조선조에서는 고려조에서 만큼 세도와 인구가 번성해 나가지는 못한 것 같다.

 

전체 인구수에 비하면 무척 많은 사람들이 출사한 고려조에 비해 본관조 이언충 이후의 조선시대에 출사한 고위직 인물이 적다.


서림(서천)이씨 본관조가 되는 이언충은 비조 이익존의 20세손으로 자는 국서, 호를 운재라고 했다. 고려 충숙왕 때의 인물로 원나라에 4년 동안 억류돼 있던 충숙왕을 고려로 모셔와 복위시키는 데 큰 공을 세웠다.

 

그에 따라 충숙왕으로부터 충경공(忠敬公) 시호를 하사받고 벽상공신이 되었으며, 서림(서천)을 본관으로 정하게 됐다. <고려사> 56권 ‘지제십편’에 기록돼 있다.


<한국성씨총감>이나, <성씨의 고향>, 그리고 서림(서천)이씨 족보에 18세손이자 이언충의 조부인 이세공도 시호를 받고 진봉(혹은 추봉)됐다는 기록이 있으나, 이는 이언충의 훈공에 대한 포상으로 추정된다. 훈공이 큰 후손을 낳아준 조상에게 후사, 혹은 추증하는 것은 고려조에서 흔히 있었던 일이다.


그런데, 서림(서천)이씨 본관조(本貫祖)인 이언충에 대해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서 검색을 하면 여러 가지 웹문서에 타 본관으로부터 분적했다는 설이 게재돼 있는 경우도 있다.

 

  중시조 이언충 신도비.

 

하지만 서림(서천)이씨 대종회는 사실무근으로 보고 있다. 필자가 살펴본 1999년에 간행된 족보(무인보)에도 그런 근거가 될만한 사항은 없었다.

 

<한국성씨총감>, <성씨의 고향>등의 성씨 관련 자료도 그러한 설을 뒷받침할 만한 자료가 발견되지 않았다. 인터넷 웹 사이트나 블로그 등은 개인이 자유롭게 제작하여 게재하기 때문에 아무런 교정이나 확인절차 없이 게재될 수 있는데, 역시 서림(서천)이씨 대종회는 단호한 입장이다.


족보가 없던 시절의 일이라고 해도 인물이 실존했는지 확인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고려사나 동국여지승람 등 옛 기록은 고려왕실 사료와 여러 관청의 문서들을 인용하거나 근거로 하여 작성된다.

 

이 자료에 나타난 이런저런 인물지, 전(傳) 등을 통해 누가 어느 성씨본관을 썼는지 알 수 있는 것이다. 왕실에 사위로 들어가거나 명문세족의 사위가 되면 어딘가 기록되게 돼 있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서림(서천)이씨 조상에 대해 실증적 확인작업이 이루어졌다는 얘기다.

 

서림(서천)이씨 족보는 시조 이익존이나 이세공, 중시조 이언충 등 주요 인물에 대해 기록하며 사실이 기록된 문헌도 함께 적어놓고 있다.


서림(서천)은 이언충이 하사받은 식읍지. 따라서 이언충의 후손들은 중앙에 출사하거나, 다른 지역으로 벼슬살이를 갈 경우 서림(서천)을 본관으로 하며 다른 수많은 이씨들과 구별하게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고려시대 본관 제도의 전형이다. 성씨·본관 제도가 고려태조 때 시작되었으니 서림(서천)이씨의 경우 본관의 연원은 아주 오랜 편에 속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서림(서천)이씨의 인구가 적은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손위 귀해서 매 대수마다 1명이나 2명만 생산을 한다고 보면 조선조 500년이 흘러도 생존한 인구수가 그리 크게 불어나지는 않는다. 사막이나 혹한의 특정 지역에서 동물들이 본능적으로 개체수를 조절해가는 것처럼 서림(서천)이씨들이 인구수를 적당히 조절해온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전주이씨의 경우는 비슷한 같은 기간 동안 우리나라 성씨·본관 중에서 세 번째로 많은 인구로 불어나기도 했으나 멸문을 당하는 등으로 대가 끊기거나 인구수가 거의 증가하지 않는 경우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이언충은 세거지인 서천에 묻혔다. 후손 7세까지는 서림(서천)을 세거지로 삼고 후손이 일어났다. 그러다 8세인 이흥의(李興儀) 대에 서림(서천)이씨 세도의 중심이 대부분 부여로 이거했다.

 

이언충의 묘소가 괘등혈이라는 풍수지리설과 이흥의가 마침 홍산 현감으로 부임하게 됐기 때문이었다. 괘등혈의 경우 풍수지리학에 따르면 등잔 밑이 어둡다고 하여 자손이 묘소 부근에서 사는 것은 좋지 않게 봤던 것이다.


그런 연유로 이거했으나 지금으로부터 500~600여년 전의 일이다. 유적과 유물을 기준으로 보면 그것은 짧은 세월이다. 서림(서천)이씨 문중에서 지켜온 사당이나 서원이 없을까.

 

서림(서천)이씨 전체로 보면 이흥의 대에서 지금의 서천지역은 인구의 공동화가 일어났기 때문에 서원이나 사당은 지켜지지 못하고 선산 종토만이 옛 영화를 전하고 있다. 서천군에 있는 종토는 현재 3만여 평으로 줄어들었으나, 대종회 임원들은 그 땅이 48만여 평이었던 때를 기억하고 있다.


부여군 홍산에는 이흥의가 건립한 독락정(獨樂亭:부여군 구룡면 금사리 소재 지방문화재)이 현재까지 옛 모습으로 남았다. 이흥의는 세종조에 홍산 현감으로 부임하였으나 단종을 폐하고 왕위에 오른 세조의 불의에 항거하여 현감직을 버리고 벼슬에 나가지 않은 충절이다.

 

  동락정.

 

인근 지역에 은둔해 있던 생육신 김시습과 교감하며 정자 독락정을 지어 학문에만 전념하고 자손에게 물사(勿仕) 고궁(固窮)하도록 가르쳤다. 독락정 유허비문이 전해지고 있기도 하다.


광양현감으로 정유재란 때 순직한 13세 이함림도 충절로 이름을 올리고 있다. 일본과 화의를 주장하는 서애 유성룡에게 설서직함으로 감히 항의한 것이 눈밖에 나서 광양현감으로 내몰렸다가 아버지, 형과 더불어 3부자가 전사했다.

 

그 외도 13세 이현재, 17세 이봉명 등이 목숨을 걸고 충절을 지키고, 대의멸친하며 학문이 높아 널리 우러름을 받았다. 근·현대에 와서는 24세인 이호철이 독립투사로서 충절의 명맥을 잇고 있다.


그런데 현대에 와서 내부적으로 본관을 ‘서림’으로 하느냐 ‘서천’으로 하느냐로 의견이 갈리고 있으나 어느쪽이 옳은지는 무의미하다.


서천은 백제 때 설림(舌林), 통일신라 서림(西林)이었다고 한다. 발음이 비슷한 것으로 보아 순수한 우리말 지명을 문서에 한자로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시조 이언충이 고려 충숙왕 때 서주군(西州君)으로 봉군되면서 서주가 되었고, 조선 태종 13년에 지금의 서천군으로 이름이 바뀌게 되었다.

 

서림과 서천은 같은 이름이고 동본인 것이다. 서림(서천)이씨 종친회 이종춘 회장과 이강제 사무국장에 의하며 1905년 일제에 의해 조선민적법이 만들어질 때, 호패 제도를 없애고 호적제도를 도입하는 데, 이때 서림과 서천을 혼동하여 본관지로 올린 것이 발단이었다고 한다.


여기서는 일반적인 보학의 경향에 따라 대종손을 중시, ‘서림’을 앞에 쓰고 괄호( ) 속에 ‘서천’을 표기했다.

 

 

서림(서천)이씨의 인구분포


3천여명 중 충청권·전북 익산에 집성촌

서림(서천)이씨는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희성이다. 전체 인구가 2000주택인구 총조사 결과에 의하면 2959명(현재 3300명)에 불과하고 충청도 일대와 전북 익산의 일부에서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그러니 아무리 봐도 거가대족 같지는 않아 보인다. 거가대족이 반드시 유서 깊은 명문이라는 보장도 없지만, 그렇다고 우리나라 성씨·본관 중 한다하는 명문가 치고 거가대족이 아닌 경우도 거의 없으니 인구수가 적은 서림(서천)이씨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인구수가 많지 않은 이유는 1999년에 펴낸 서림(서천)이씨 족보 서문을 보면 알 수 있다.


“…그 수는 지극히 고단하여 마치 ‘기화이초’같이 생존하였으나, 다만 벼슬한 이와 효자 충신이 대마다 있어서 가히 명문세가에 나열할 수 있어서 사람들이 풍부하지 않다고 여기지 않으니 어찌 크지 않은가.”

 


서림(서천)이씨의 사위가 되는 조종업 박사(충남대 명예교수)가 쓴 족보의 서문으로, 말하자면 숫자는 적어도 대대로 명문가로 내려오고 있다는 얘기다.

 

조 박사는 또 서문 후반부에 “고려 상엽으로부터 조선후기에 이르기까지 그 수가 백도 못 되어 영성하고 고단하더니 근 수십년래로 번성함이 비할 데가 없어서 이미 수가 여러 배로 늘어서 경향에 산재하여 큰 성씨에 손색이 없게 됐다”고 썼다.


서림(서천)이씨 족보와 대종회에 따르면 예나 지금이나 손이 귀한 성씨임에 틀림이 없다.

 

8~9명의 자제 중에서 아들이 하나인 경우가 흔하고, 양자를 들인 경우도 허다하다. 그래서 인구도 시조 이언충의 세거지인 충남 서천으로부터 먼 곳으로까지 번성해가지 못했다.

 

8세 이흥의가 부여 홍산 현감으로 부임하면서 세거지를 옮기고, 다시 17세 이봉명이 은퇴 후에 충남 논산군 고산(현양촌면)으로 이거하여 크게 보면 이 세 곳을 중심으로 지성촌이 퍼져나갔다.

 

본관지 서천을 필두로 부여군 일대, 논산, 익산, 보령, 청양, 서산 등지에 현재 서림(서천)이씨가 확산되어 있다.


2000년 인구주택 총조사에 의하면 ‘서림’으로 본관을 쓰는 인구는 1390명이고., 서천으로 쓰는 인구는 1569명으로 집계되고 있다. 그리고 양쪽 모두 여전히 충청권에 거주하는 인구가 많고, 이농 현상에 따라 서울과 수도권에 다수가 분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최종동 위원

서림(서천)이씨 역사인물

 

높은 관직 충신 효자 끊이지 않아
이정근 등 진사 23명 급제 관직나가


고려조에 높은 관직에 오른 인물이 많다. 고려사, 동국여지승람 등에 주요인물들의 면면이 소개 돼 있으며, 시조 이익존부터 본관조 이언충에 이르기까지 벽상공신에서 봉군, 사시를 한 인물을 찾을 수 있다.


호부상서 이익존, 상장군 이사맹, 예부시랑 이암, 보문각제학사 이부시랑 이종경, 서림군 이세공, 서림군 충경공 이언충 등이 그들이다. 오늘날 후손이 3000여 명에 불과한 것을 감안하면 대대로 충신, 효자가 끊이지 않았다는 언급이 빈 말이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조에는 상대적으로 고관 대작의 숫자가 줄었다. 그러나 역시 손이 귀한 집안으로서는 많은 사람이 진사에 급제하고 관직에 나갔다. <한국성씨총감> 자료에 따르면 이정근 등 23명이 진사에 급제했고 조선후기까지 관직에 나간 사람이 100여 명에 이른다.


특히 8세 이흥의는 왕위를 찬탈한 세조 조에서 불사이군이라는 충절을 지키며 벼슬을 버리고 학문에만 정진했으며, 이함림은 낮은 직급의 관직에 있었음에도 왜구와 화의하자는 주장애 맞서며 광양현감으로 내려가 장렬하게 전사하기도 했다.


▲고려시대
이익존(시조:호부상서), 이사맹(상장군), 이성림(삭방도 만호겸 병마사), 이광조(성근보조공신), 이정균(안동부윤), 이작원(좌위대장군풍해도 무검사), 이정윤(예부상서 상장군), 이섭(중서문하급사동지사), 이효공(랑장첨정), 이암(예부시랑), 이제현(사공좌복시상장군), 이영진(지밀직 문한학사 승지), 이종경(보문각제학사 이부시랑), 이인우(중랑장), 이세공(서림군, 벽상공신), 이언충(서림군, 충경공 벽상공신 도첨의좌우정승)

▲조선시대
진사급제자:이정근, 이세당, 이 훈, 이 운, 이희치, 이대인, 이몽호, 이덕재, 이현재, 이흥재, 이동휘, 이두형, 이두훤, 이두흡, 이춘, 이정자, 이영무, 이 연, 이적희, 이정구, 이정준, 이후여, 이동철
무과:이부, 이계남, 이병원
진사 이상:이후정(정당문학집현전 대제학), 이자춘(홍문관 예문관 대제학), 이흥의(부여현감, 병마절도의), 이세현 이조좌랑, 이대의(평양부윤), 이함림(광양현감), 이돈림(순천부사), 이복형(증대사헌 겸 경연관), 이일삼(홍문관 예문관 대제학), 이일중(지중추부사), 이정매(가선대부지중추부사), 이봉명(병조예조정랑), 이석홍(호조참판, 왕세자관예교), 이지택(북부도사) 이하 다수 관직 인물 생략 (자료:한국성씨총감)

 

 

서림(서천)이씨 현대인물

 

학·관·군 교육계 언론계 등 다양


현 인구가 3000여명에 불과하지만 학계, 관계, 군, 교육계 언론계 등에 다양하게 분포하고 있다. 독립투사 이호철, 예비역 육군 소장 이종완, 변호사 이종웅, 극회의원 이광철, 미국 나사 연구원 이희재 박사 등이 있다.


현재 서림(서천)이씨 대종회가 파악하고 있는 의학계 박사가 18명이며 그 외에 공학, 이학, 문학 등 박사 16명이라고 한다. (주요인물 명단 생략)


■ 인터뷰 / 서림(서천)이씨 이종춘 대종회장

8파종회장 단합 대종회 발전 이룩

이종춘 대종회장은 서림(서천)이씨 주부공파 25세 손으로 충남 부여군 홍산에서 1940년에 태어났다. 19743년 출판업계에 몸을 담아 34년여 동안 기술·공학분야 전문 서적을 비롯한 출판인으로 외길을 걸으며 2300여종의 이공계열 책을 출판했다.

 

이공계 발전에 드러나지 않게 기여한 공로가 인정돼 2005년부터 서울산업대 명예공대학장을 역임하기도 했으며 오랜 출판인 경력으로 출판인협회 잡지협휘 임원을 역임하기도 했다.

 

서림(서천)이씨에서 배출한 독립투사 이호철 선생이 이회장의 작은 아버지. 대종회장을 맡은 후 사재를 들여 종친회의 발전과 정착을 위해 여러 사업을 벌이고 있으며 현재 대종회 사무실은 이 회장의 첨단그룹 사옥에 있다. 첨단빌딩 대종회 사무실에서 이종춘 회장을 만났다.

 


인구가 번성한 성씨보다 희성인 성씨가 대개 잘 살고 인물도 많다. 희소성 때문에 더욱 두드러져 보이는 일면도 있지만, 희성이기 때문에 외롭고 그래서 분투·노력하고 경쟁력을 갖췄지 않았을까 해본다. 서림(서천)이씨는 수많은 이씨 중에서도 인구가 수천 명에 불과한 희성. 이런 성씨일수록 단합이 잘 되고 계승 발전해온 문화도 유서가 깊을 것 같다.

▶종친회 운영이 잘 되는지요 

“솔직히 저는 어려서 문중, 씨족 이런 거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먹고 사는 일에 매달리다 보니 잘 모르고 지냈지요. 씨족에 대해 애정이랄지 그런 것이 없어 그저 그랬어요. 그러다 맡고 보니..... 아직 부족한 것이 많고 해야 할 일도 많습니다.”


서림(서천)이씨 대종회 사무실은 부여에 있다가 2005년에 서울로 옮겨왔다. 대종회에 대한 자료는 물론 씨족사에 대해 아는 한학자들도 아직 대전과 충남 쪽에 많다고 한다. 인터뷰 중 이종춘 회장은 종사에 해박한 분이 회장을 맡는 것이 좋지 않으냐고 겸손해 했다.

▶대종회를 운영하는 방침이나 철학이 있다면…

“제가 맡은지 6년쯤 됐습니다. 우리는 전쟁 치르고 어렵게 살았습니다. 고향 등지고 서울로도 가고 부산으로도 가고 씨족이 흩어져 있어요. 숫자는 적지만 그렇게 흩어진 종친회원들을 모으는 구심점이 되고 뭔가 긍지 같은 것을 심어주려고 합니다. 우리 서림(서천)이씨에 대해 어린아이부터 어른까지 관심 갖게 하고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종친회에서도 지원하려고 합니다.”


인터뷰에 배석한 대종회 이강제 사무국장이 장학사업에 대해 설명했다. 장학사업은 전대 회장인 이종호 고문이 시작하여 기틀을 잡았고, 현재의 회장이 사업 범위를 확대 정착시켰다는 것이다.

 

대학 진학하는 경우 장학금을 지원했으나 현재는 40세 이하에 과부가 된 집안의 자녀가 초·중·고등학교에 입학할 때도 장학금을 지원하고 있다는 것. 손이 귀한 집안의 전통이 장학사업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최근에는 85세 이상 노인을 지원하는 경로사업도 하고 있다.


민감한 문제도 있다. 찻잔 속의 분란 정도이지만 본관이 ‘서림’이냐, ‘서천’이냐의 문제로 종친회원들의 의견이 갈린 적이 있다.


“통합을 하려고 해봤으나 쉽지 않았습니다. 공문서나 각종 이력서 등 서류란 서류에 모두 올려져 있어 바꿀 수가 없었지요.”


그래서 현재는 대외적으로는 대종손의 입장을 좇아 서림(서천)이씨로 표기하고 내부적으로 족보 같은 문서에는 각각 ‘서림(서천), 혹은 ’서천(서림)으로 표기하고 있다고 한다. 최근에 간행한 족보도 그렇게 두 벌을 찍어 나눴다.

 

그러나 인구 수가 적기 때문에 어떤 표기를 하든 아주 가까이 지낸다. 중시조 이언충을 모시는 시제(음력 10월 1일) 때에는 전국에서 종원들이 모인다.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이나 유물이 있는지요 

“우리는 서천에서 홍산으로, 부여 남면에서 논산으로 거기서 다시 조금씩 집성촌을 넓혀갔습니다. 원 세거지에서 벗어났으나 사당을 짓고 조상을 모셔왔는데 육이오때 폭격으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현재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흥자의자 할아버지가 건립한 ‘독락정’만 남아 있습니다. 선조들이 물려주신 문집도 다수 있고요.”


대종회의 조직과 살림살이는 어떨까. 재력이 있는 이종춘 회장이 맡아 부족함이 없다고 배석한 대종회 이강재 사무국장이 거든다.


“앞에서 이끄는 회장이 부족하지 우리 종원들은 정말 훌륭하고 잘 따라줍니다.”


이것은 이종춘 회장의 겸양이다. 이강제 사무국장이 16년째 살림을 맡아보는데, 사실상 전회장 이종호 고문과 현 이종춘 회장의 배려로 오늘 같은 모습이 될 수 있었다고 한다. 작년 11월에 마친 묘사에도 전현직 두 회장의 희사금으로 중시조 충경공 이언충 묘소를 정비하는 사업을 했다.


서림(서천)이씨 대종회의 앞으로 계획과 포부는 무엇인지 물어보았다.


“우리는 8파가 있습니다. 각 파종회장님들과 1년에 5~6회 이상 만납니다. 연간 회의비용을 책정해 놓으면 예산이 늘 남습니다. 서로 부담하겠다고 해서 다 쓰지를 못하지요. 이런 단합을 앞으로도 유지하고 서림(서천)이씨 한 사람한사람 올바른 인성을 갖추도록 하고, 사는 동안 경제력이 모자라면 뒷받침도 되어주고 할 것입니다.”


이종춘 회장과 이강제 사무국장이 꼽는 현대 인물은 독립투사 이호철 선생을 비롯하여 예비역 육군소장 이종완, 국회의원 이광철 변호사, 대학교수 등 이다. 독립투사 이호철선생은 이종춘 회장의 작은아버지. 몽양 여운형계로 분류되는 자생적 사회주의 경향이 있어 인정받지 못하다가 나중에 되야 독립유공자로 국립현충원 묘역에 안장됐다.


이종춘 회장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데도 종사일은 물론 조상의 묘에 제사지내는 일에도 적극적이다. 2006년 중시조 묘역 준공식 때도 전래의 제관으로서의 의관을 갖추고 제를 올렸다. 공학서적 2300여종을 출판한 서구적이고 현대적인 정신의 소유자이지만 전통사상, 전통문화에도 소홀히 하지 않는 열린 정신의 소유자다.

 


▶마지막으로 종친회원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씀을 하신다면… 


“서림(서천)이씨가 내부적으로 잘 되기도 해야 하지만 사회에 봉사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됐으면 합니다. 우리는 전통적으로 자기만 아는 사람 아니었습니다. 동네에서도 봉사하고 섬기는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도록 하자고 말하고 싶습니다.”


박병로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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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휴 2010-10-11 23:14:10
저는 향토사를 연구합니다.
서천이씨 鶴峯 李日三
자는 晉如, 부 李復亨, 조부 李敦臨
학봉선생에 대하여 알고싶어서
대종중이나 후손을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