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어울림이다”
“삶은 어울림이다”
  • 관리자
  • 승인 2007.04.06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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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의미를 되새겨 보면서 살아있다는 사실의 기쁨과 보람을 살펴보자. 생명체 개체 하나 하나가 어디 소중하지 않은 것이 있는가? 생명이라는 것은 어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그리고 모방할 수 없는 값진 존재인데, 우리는 이런 생명에 대해 올바르게 인식하고 걸맞은 노력을 하고 있는 가 반성해 보아야 한다.

 

생명이 값어치가 없는 덧없는 것이라고 주장할 사람이 과연 있을까? 아마도 올바른 사고와 판단을 갖춘 사람 중에는 그런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왜 이 세상에는 생명을 경시하고 남을 비방하고 사회를 훼손하는 일들이 벌어지는 것일까? 바로 그런 측면에서 생명의 의미를 다시 한번 살펴본다.


바이러스나 원생동물, 곤충, 식물, 포유동물 등 모든 생명체 중에서 혼자만 살 수 있는 것은 없다. 반드시 함께 살아야 하는 생태계의 일환으로서 단위 구성체를 이룰 뿐이다. 이 과정에서 먹고 먹히는 먹이사슬이나 공존공생의 협력관계를 이루기도 하지만, 생명체는 이런 관계 속에서 삶을 유지하며 발전시키고 있다.

 

이런 생명계의 관계망 속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적 개념은 평등이다. 먹고 먹히는 험한 상황이나 공생적 호혜의 관계에 있어서도 상호간 일정한 균형적 관계가 유지돼야 공멸을 피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궁극적인 상호 평등관계 개념은 대단위 생명계에서는 이미 생존을 위한 생태적 완전조건이 되어 있다. 이와 같이 모든 생명체들간의 대등한 관계에서 나오는 어울림은 바로 생명계를 이루는 바탕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런 마이크로적 관점뿐만 아니라 생명체 개체를 마이크로적 관점에서 단위체의 생명체 전체에 대한 의의를 살펴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생체를 구성하는 기본단위인 세포들은 발생, 분화, 발달의 과정을 통해 기능과 형태가 전혀 다른 조직들로 분화하고 있다.

 

전연 상이한 조직들이 생체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각각 고유의 기능을 담당하면서 서로 대등하게 맡은바 소명을 다한다. 간은 간대로, 심장은 심장대로, 뇌는 뇌대로 서로 잘났다 하지 않고 나름의 기능을 성실하게 수행하는 모습이 바로 생명이다.

 

만일 어떤 특정 조직의 기능만이 강조되고 다른 조직이 배제된다면 생명 현상은 기형적으로 변형되고 말 것이다. 따라서 생체를 구성하는 조직들간의 조화로운 어울림은 부분으로서 만족하고 전체를 위해 양보하는 미덕을 바탕으로 이뤄지고 있다.


더 나아가서 세포라는 생명의 단위체를 보면 이런 특성을 더욱 실감할 수 있다. 세포를 구성하는 모든 단위 분자들은 그 자체가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고 보지 않는다. 단백질, 지질, 당으로 구성된 생체분자들은 핵, 소포체, 막, 미토콘드리아 등의 소기관을 형성하며 이들의 유기적 관계를 통해 생명 현상이라는 거룩한 결과를 배태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도 마찬가지다. 만일 단위 분자들이 서로 힘을 겨루고 특별하게 표출된다면 이는 바로 암이나 또는 여러가지 질환을 초래하게 될 뿐이다. 생명을 구성하는 모든 단위를 미분해서 보았을 때, 생명이란 모든 구성단위체의 어울림을 통한 공동선(公同善)을 추구한 결과임을 새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생명의 어울림 현상에서 가장 중요한 충분조건은 무엇일까? 어울림을 어울림답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각 단위체들간에 대등성(對等性)이 있어야 한다. 서로간에 상하 또는 우열의 관계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부분들이 온전하게 집적하여 소임을 다하는 것이다.

 

따라서 어울림의 과정이 무작위적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삶이라는 큰 뜻으로 질서 정연하게 움직여서 있어야 할 때 필요한 만큼 서로 연계되어야 한다. 바로 그러하기 때문에 어울림은 시공간적 순응이다. 그래서 생명은 하늘을 거역하지 않고 순응해야 한다(順天者存 逆天者亡).


이와 같은 생명의 어울림을 분명하게 하기 위한 필요조건은 어떤 것일까? 바로 대등한 관계의 단위 구성체들이 조화롭게 협조를 이루기 위한 시스템의 확립이다. 즉 생명을 이루는 모든 단위체들이 동시성(同時性)과 공동성(共同性)을 가질 수 있도록 각 부분의 자료를 적분하여 처리하는 장치가 필요하다. 이런 장치가 가동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사심이 없어야 하고, 잘 나고 못났다는 우열이 없어야 하며, 누가 누구를 다스린다는 상하가 없어야 한다.


생명계도 이러하거니와 사람 사는 세상도 마찬가지다. 복잡한 정치적 이야기는 차치하고 오래오래 사신 장수인들의 특성을 이에 비추어 보자. 일반인들의 평균 연령은 칠십대에 불과한데, 백세가 넘도록 사신 분들은 어떤 분들일까? 양구군 산골에서 만나 뵌 백세가 다 되가시는 유곡선(가명) 할머니는 어렵게 혼자 사시면서도 밝은 표정이었다.

 

찾아 뵌 너덜 집 단칸방에 수북하게 쌓인 과자 라면들을 보고 “이런 음식을 좋아하시느냐”고 묻자, “아니다”라고 하면서 “그것들은 동네 사람들이 오면 주려고 두었다”는 것이다. 바로 이와 같이 사람들과 어울리기 위해 진지하게 스스로 노력하는 모습은 우리에게 감동을 주었다.

 

또 구례군 산간 마을에서 만난 아흔이 훨씬 넘어 백세에 다다른 장수동(가명) 할아버지의 집에 찾아갔을 때는 마을 노인회관에 나가고 계시지 않았다. 같이 아흔을 넘기신 할머니가 고령인 할아버지의 동네 외출을 걱정하면서 “나가도 아무도 끼어 주지 않는데 왜 매일 나가는지 모르겠어!” 하고 불평을 하셨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남이 상관하든 말든 동네에 나가서 일흔, 여든 객의 자식세대 동네 사람들과 어울리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었다. 담양군 평지마을에서 만난 백세가 넘으신 강억순(가명) 할머니는 연세가 그렇게 많으신 데도 혼자 살고 계셨다. 찾아 뵌 여름날에는 고운 모시옷을 스스로 깨끗하게 다려 입을 만큼 건강하셨다.

 

할머니는 지금도 군경 유가족에게 나오는 보상금으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남은 돈은 동네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있었다. 그래서 할머니 집에는 동네 사람들이 수시로 들락거렸고, 여전히 동네 어른으로서 이 일, 저 일에 참견하고 사셨다. 떠나는 우리에게 “편안하게 가시오”하며 또렷하게 인사까지 하시는 모습에서 사람들과의 어울림에 달관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자유로움과 따스함을 느낄 수 있었다.

 

이와 같이 장수하신 분들을 만날 때, 사람살이의 가장 큰 본질은 서로의 어울림이고 그런 어울림에 도통한 분들이 역시 장수의 길을 걷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특히 연로해지면서 외로워 질 수밖에 없는 노인들에게 이 같은 어울림의 이치는 장수의 필요조건인 삶의 질을 유지하는데 무엇보다도 소중할 것이다.


생명체가 삶을 살아간다는 의미는 모든 개체 및 구성단위의 대등한 관계에서 함께 어우러지는데 있으며, 이런 생명의 어울림은 사람이 사는 사회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따라서 오래 장수하면서 보람 있고 바람직한 삶을 영위하려면 사람과 사람의 어울림을 원활하게 할 수 있도록 서로 최선을 다하여 노력해야 한다는 사실을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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