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용되는 탄원서
악용되는 탄원서
  • 오현주 기자
  • 승인 2014.08.01 14:21
  • 호수 4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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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현주 기자의 세상 읽기

1년 전 원로 가수와 연예인단체가 KBS에 탄원서를 보냈다. ‘가요무대' 방송 시간을 10분 단축하겠다고 하자 이에 반발해서다. 이들은 탄원서에서 “가요무대 축소 편성은 실버세대의 문화적 혜택을 박탈하고 실버세대의 노고와 수고를 경솔히 여기는 처사”라며 “공영방송으로서 국민의 행복 추구를 도모해야 할 의무를 저버린 것이고, 오히려 확대 편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탄원서가 효력을 발휘해서인지는 몰라도 결국 KBS는 방영시간을 5분 감축하는 것으로 타협을 보았다.
탄원서는 이처럼 공공의 이익을 위해 정당하게 사용될 때 가치와 진정성이 돋보인다. 이는 다수의 합리적 사고, 타당한 논리, 대의명분 등이 공감과 설득을 이끌어내기 때문이다. 비록 불의를 저지른 자라 할지라도 시초가 계획적이 아니고 결과적으로 본인이 잘못을 뼈저리게 뉘우친다면 그를 용서하자는 탄원서는 격려와 동정을 얻을 수 있다. 드물게 자식을 살해한 살인범의 선처를 바라는 피해자 가족이 법원에 탄원서를 제출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처럼 정의롭게 쓰여야 할 탄원서가 일부에서 오·남용되거나 악용되기까지 한다. 최근 종교단체들의 이석기 통합진보당 의원에 대한 탄원서가 그 예이다. 천주교·불교·개신교·원불교 등 4대 종교단체 지도자들이 내란음모혐의로 1심에서 유죄 선고를 받은 이석기 의원 등 RO 조직원 7명에 대한 2심 재판을 담당하는 서울고법에 이들의 선처를 호소하는 탄원서를 냈다. 천주교 염수정 추기경은 “재판부가 법의 원칙에 따라 바르고 공정한 재판을 해주시기를 기도하며 동시에 그들이 우리 사회의 한 일원으로 화해와 통합, 평화와 사랑을 실현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기를 청한다”고 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총무 김영주 목사, 조계종 자승 총무원장, 원불교 남궁성 교정원장, 대한성공회 김근상 주교 등 7명도 탄원서를 제출했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여론은 종교의 섣부른 정치 개입, 사건의 본질을 호도하는 무책임한 행동이라며 종교단체들을 질책했다. 전·현직 국회의원 모임인 ‘대한민국 헌정회’는 종교단체들이 낸 탄원서에 대해 놀라움과 함께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며 성명서를 발표했다. 헌정회는 성명서에서 “우리는 이석기 등이 주도한 이번 사건이 자유민주주의 기본질서를 부정하는 반국가행위로서 이들이 재범자일 뿐 아니라 반성과 개전의 정이 없다는 점에 특히 주목한다”며 “항소심 결심을 일주일 앞둔 시점에 이들에게 선처를 요하는 탄원서를 제출한 것은 종교와 정치의 분리를 규정한 헌법정신에도 위배된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고 했다.
이석기 의원은 죄를 뉘우치기는커녕 재판 과정에서 자기들의 혐의를 시종일관 ‘조작’이라고만 주장하고 있다. 반성하거나 회개하는 말은 들을 수 없고 고해성사로 국민 앞에 속죄하는 모습도 보여주지 않았다. 앞으로 헌법질서를 지키겠다고 약속하지도 않을뿐더러 사회통합에 기여할 기회를 달라고 호소한 적도 없다.
이 의원은 과거 민혁당 간첩단 사건에 연루돼 실형이 확정됐다가 노무현 정부 시절 사면을 받았다. 그는 국가와 국민으로부터 이미 한 차례 용서를 받고서도 당시 범죄에 대해 사과하지 않았다. 이번에 또 대한민국을 뒤엎으려는 음모를 꾸민 혐의를 받고 있다.
도저히 우리 곁에 둘 수 없는 이석기 의원을 위해 탄원서를 쓴 종교단체가 여론의 질타를 받는 건 당연하다. 염수정 추기경은 가족들이 써가지고 온 탄원서를 무시하고 나중에 자신이 직접 탄원서를 써서 제출하는 등 이들로부터 이용당하지 않으려는 조심성을 보이기는 했다. 그러나 종교지도자는 자신의 말과 행동이 국민의 마음과 정신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깨닫고 좀 더 신중을 기했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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