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전‘충무공…’책 읽고 이순신 先公後私(선공후사) 리더십에 푹 빠졌죠”
“40년전‘충무공…’책 읽고 이순신 先公後私(선공후사) 리더십에 푹 빠졌죠”
  • 오현주 기자
  • 승인 2014.08.14 11:03
  • 호수 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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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전도사’김종대 전 헌법재판관

이순신 강연 600여회… ‘명량’김한민 감독 눈빛 보고‘큰 일’낼 줄 알아
‘이순신 신드롬’은 살기 힘든 세상, 그 같은 영웅 기다리는 마음서 비롯


영화 ‘명량’의 기록경신(8월 12일 현재 관객 수 1130만명)은 김종대(66·삼일회계법인 고문) 전 헌법재판관에게 남다른 기쁨이다. ‘명량’(김한민 감독) 제작에 김 전 재판관의 기여가 큰 이유에서다. 김 전 재판관은 영화 찍기 전에 올리는 고사에서 축사를 했고, 촬영 현장도 수차례 가보았다. 김한민 감독은 영화를 찍는 내내 김 전 재판관이 지은 ‘이순신 헌시’를 책상에 붙여놓았다고 한다.
김 전 재판관은 1975년 공군 법무관 시절 우연히 책방에서 노산 이은상의 ‘충무공의 생애와 사상’이란 책을 접한 후 40년 가까이 이순신을 마음에 품고 깊이 탐구했다. 재판 도중 틈틈이 짬을 내 이순신 전기의 완결판이라고 할 수 있는 ‘이순신, 신은 이미 준비를 마치었나이다’(시루)를 펴내기도 했다. 지난 8월 12일,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김 전 재판관을 만났다.

-‘명량’을 본 감상은.
“만족해요. 김 감독이 이순신의 내면세계를 잘 그려냈어요. 12척의 배로 133척의 왜선을 어떻게 물리쳤는지 자세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요. 영화에서 ‘천행’이라고 했듯이 이순신의 지극한 정성이 하늘을 움직여 기적을 일으킨 겁니다. 김 감독의 생각이 나와 같았어요. 내가 ‘명량 대박’에 기여한 점도 있긴 있어요. 지금까지 이순신 강연을 600여회 했어요. 강연 끝에 늘 영화 ‘활’을 만든 감독이 정성들여 ‘명량’을 찍고 있으니 꼭 가보시라는 말을 잊지 않았거든요.”

-어떻게 김 감독을 알게 됐나.
“김 감독의 형이 내 강연을 듣고 다리를 놔준 겁니다. 마침 김 감독도 ‘명량해전’을 소재로 한 영화 ‘명량, 회오리 바다’를 기획 중이라 했어요. 김 감독은 열과 성을 다했어요. 10초 짜리를 찍기 위해 1시간을 공들이더라고요. 눈빛이 틀렸어요. 그때 ‘일을 치르겠구나’ 싶었지요.”

-영화 장면 중 실제와 다른 부분을 어떻게 받아들이나.
“영화에서 백성들이 대장 배를 갈고리를 걸어 끌어당겨 소용돌이에서 구해내는 장면은 픽션이에요. 괜찮아요. 그러나 왜곡은 안 됩니다. 유명한 소설가가 쓴 이순신 소설에 이순신이 여자포로와 관계를 맺는 장면이 나와요. 그런 거 없어요. 이순신은 임진왜란 7년 동안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았어요.”

-가히‘이순신 신드롬’이다.
“세월호 사건, 충격적인 군부대 사고 등으로 지금 국민의 마음이 많이 아파요. 앞으로 또 그런 재앙이 재발하지 않는다는 보장마저 없는 불안한 상태에서 영웅을 기다리는 마음이 있는 거지요. 이 시점에 이순신 같은 인물이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할까요.”

-이순신에 매달려왔다.
“이은상 선생의 책을 보는 순간 그 분의 강직하고 정직한 삶의 자세에 빠져들었어요. 이순신을 존경하고 좋아한다는 사람을 만나는 날은 행복했을 정도였으니까요. 초임 판사 때 출장비 2만여원 중 몇 천원이 남아 총무팀에 돌려준 적이 있어요. 이순신을 닮으려고 했지만 총무과장에게 되레 혼만 났어요.”

-이순신의 어디에 빠졌나.
“율곡이 이조판서로 있을 때 이순신이 훌륭한 인재라는 말을 듣고 유성룡을 통해 한번 만나자고 청한 일이 있었어요. 파직되어 불우한 처지에 놓였던 이순신에게 유성룡도 ‘한 번 만나보라’고 했지만 이순신은 이렇게 대답했어요. ‘나와 율곡이 같은 집안이라 서로 만나보는 것도 좋지만 그가 인사 책임자인 전상의 자리에 있는 동안은 옮지 못한 일이오’. 또, 이순신이 인사 행정을 담당할 때 직속상관이 자신의 친지를 승진시켜 달라고 하자 이순신은 ‘서열을 건너뛰어 진급을 시키면 당연히 진급해야 할 사람이 진급하지 못한다. 이런 불공평한 인사 조치는 법을 위반하는 것이므로 서류를 작성할 수 없다’고 거절했어요. 이 일로 상관의 미움을 받아 관직을 잃기도 했지만 서도요.”

김 전 재판관은 이순신의 리더십에 대해 강연해오고 있다. 그가 말하는 리더십의 핵심은 선공후사(先公後私) 즉, 공적인 가치를 사적인 감정보다 앞세우는 것이다. 원균의 무능으로 이순신이 4년여 준비해놓은 200척의 배와 군사를 한꺼번에 잃게 된 ‘칠천량해전’ 직후 권율장군이 이순신을 찾아가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묻는다. 권율은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되고 고문당해 숨지기 직전까지 가는데 관여한 인물이다. 그런데도 이순신은 권율에게 섭섭한 마음을 품지 않고 “현장을 불러보고 방책을 구하겠다”고 답한 뒤 고문으로 망신창이가 된 몸으로 순천·하동·보성 등 전남 일대 300여km 길을 말을 타고 돌며 전세를 파악하고 흩어진 군사를 모아 수군을 재건한다. 김 전 재판관은 이것이 공직자가 먼저 배워야할 자세라고 말했다.
이순신은 자신이 세운 공을 부하에게 돌려 그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선조에게 장계(왕에게 올리는 보고서)를 올릴 때 심지어 종의 활동까지 적어 상을 내리게 했다. 원균은 배 200척을 가지고도 참패해 전사한 반면 이순신은 불과 12척만으로 133척의 왜선 군단을 무찌른다. 그건 두 장수가 가진 내면의 차이 때문이다. 원균은 부하들에게 적의 목을 베어오게 한 뒤 그 숫자를 자신의 전과로 보고 했다. 당시엔 적의 목 숫자로 장군의 능력을 평가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적의 목을 챙기다 총탄에 맞아죽는 부하도 생겨날 정도였다. 이순신은 부하들에게 ‘내가 다 보고 있으니 적의 목을 베어오는 대신 죽이는 데만 전념하라’고 했다. 이런 자세가 구국의 기적을 만든 것이다.
이순신 리더십의 또 한 가지는 자력, 즉 스스로 준비하는 힘이다. 이순신은 전쟁을 대비해 군사를 훈련시키고, 나라에서 아무런 지원도 해주지 않자 둔전을 개발해 군사의 주린 배를 채워주었다. 배를 수리하고 거북선을 만들었다. 척후를 적진 가까이 보내 적의 동정을 살피고 전략을 짰으며, 활을 쏘고 신체를 단련했다. 이런 유비무환의 자세가 23전 23승을 이끈 요인이다.
이순신의 리더십 가운데 가장 빛나는 건 백성을 사랑하는 진정한 마음이었다. 그는 피난 가는 백성을 보면 말에서 내려 손을 잡고 다치지 말고 잘 가라고 위로해주었다. 왜적이 배를 버리고 내륙으로 도망가다 백성을 해칠까봐 마지막 왜선 한척은 파괴하지 않고 남겨두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런 점 때문에 백성들은 이순신이 어디를 가든 따라다녔고 의병들도 모여들었다. 이순신 리더십의 꼭지점은 백성에게 가 있었다.

-10년간 책을 보강했다는데 아쉬운 점은.

“이순신은 32세에 함경도 소대장급으로 나가 여진족을 상대합니다. 그 후 54세에 사망할 때까지 정돈된 가치관을 한 번도 바꾸지 않아요. 32세 이전에 인생관을, 사생활을 정립했다는 뜻입니다. 21세에 결혼, 22세에 무관의 길을 걸어 32세에 무과에 합격해요. 그동안의 생활은 처가에 의존하는 등 궁핍했어요. 이 10년간이 이순신에게 중요한 시절인데 자료가 없어요.”

김종대 전 재판관은 부산고·서울법대를 졸업하고 17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공군 법무관을 거쳐 1979년 부산지법 판사로 임관한 후 25년 가까이 부산·경남지역에서 근무한 ‘향판’이다. 헌법재판관(2006~2012)을 마지막으로 퇴임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사시 동기로 노 대통령에게 이순신 리더십에 대한 영감을 실어주기도 했다.

-재판 과정에서도 이순신을 떠올렸나.
“어려운 판단의 순간에 직면할 때마다 마음속으로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하고 묻곤 했어요. 동료, 후배 법관들에게도 틈나는 대로 이순신 이야기를 했어요. 후배들이 그러더군요. 내가 점점 이순신을 닮아간다고요(웃음).”

-굳이 향판으로 나선 이유는.
“향판이라는 말은 15년 전쯤에 생겼고 내 때는 없었어요. 군법무관을 끝내고 희망 임지를 대구, 부산, 서울 순으로 적어냈어요. 빨리 빨리 돌아가는 서울은 생리적으로 나하고 안 맞았어요. 걸음도 빨리 걷는 속에서 사는 건 행복지수가 떨어지는 거 같았어요. 대구는 신출내기 법조인을 제대로 훈련시키는 곳이라고 들었지만 그것도 옛말이라고 해 고향으로 가게 된 거지요.”

-가장 기억에 남는 재판이라면.
“나는 재판보다는 조정을 선호했어요. 부산의 삼성자동차 사건 아시지요? 법대로 해결했다면 간단했지만 나는 삼성물산, 은행 등 채권단과 인수업체(르노자동차)간 조정에 전력을 다했어요. 삼성자동차를 그대로 파산시키면 채권단은 큰 손해가 나지 않지만 부산 경제에 엄청난 피해를 입힙니다. 결국 조정을 이끌어내 삼성자동차의 파산도 막으면서 르노삼성을 탄생시키게 됐지요.”

-노무현 전 대통령과 가까운 사이였다고.
“주위에선 그렇다고 해도…. 노무현 대통령이 헌법소원을 냈을 때 주위에서는 다들 노무현 편을 들겠다고 했지만 그렇지 않고 각하시켰어요. 당시 헌법재판소로서는 가장 큰 정치적 사건이었어요.”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7년 6월, 한나라당과 대통령 후보를 비난하는 발언을 했다가 선관위로부터 선거중립 의무 준수 요청을 받자 “국민으로서 정치적 표현의 자유를 침해당했다”며 개인 자격으로 헌법소원을 냈다.

-왜 각하했나.
“대통령이 기본권을 침해했다고 했지만 기본권 보장이란 건 힘없는 국민을 위한 제도이지 최고 권력자인 대통령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공과 사를 구분했어요. 그거 못하면 재판 그만두어야지요. 이순신이라도 당연히 그러했겠지요.”

-통합진보당 정당해산청구심판은.
“지금 거기에 대해 국론이 분열되는 거 같아요. 이번(이석기 통합진보당 의원 내란음모사건 항소심 판결)에 내란음모 부분은 무죄라고 나왔지요. 헌재로서는 더 깊이 고민해야 할 것 같아요.”

-우리나라 노인 복지에 대한 생각은.
“나도 노인이 돼 가는 중이에요. 노인 복지가 더 잘 돼야 한다는 점에선 이의가 없어요. 우리는 자원이 없어 머리를 써서 먹고 사는 나라입니다. 현재 우리나라 출생률이 저조한데다 젊은 여자들이 아기를 낳지 않으려고 해요, 아이를 낳아 교육을 잘 시켜 우수한 인재를 만들어 그것으로 먹고 살아야 하는 형편에 노인은 늘어나고 반면 신생아는 줄어요. 문제가 심각합니다. 영·유아 시설을 더 만들어주어야 할지, 노인에게 더해주어야 하는지를 고민해봐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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