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한성엔 빈민 몰리고 문서위조 판쳤다
조선 후기 한성엔 빈민 몰리고 문서위조 판쳤다
  • 김지나 기자
  • 승인 2014.08.14 11:15
  • 호수 4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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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이 법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범죄 수사극‘별순검’(2010)의 한 장면. 무덤을 파헤치는 일이 사형에 처해졌던 시대, 정조는 살인자가 면죄되는 일이 없어야 한다며 무덤을 헤치고 시신을 보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조선후기 범죄보고서… 사형죄 통해 한성부 민심 읽어
배금주의 따라 경제범죄 늘고 음주‧폭력 사회문제로

 

남의 무덤을 파서 시신을 꺼내는 일은 사형에 처해질 정도로 큰 죄였던 시대, 한 사내가 밤도 아니고 대낮에 누군가의 무덤을 파헤치고 있다. 이 사내는 형사 사건 피살자의 사망원인과 범죄발생 원인을 조사하는 검험관(檢驗官)이다. 그는 지금 굴검(掘檢)을 하고 있다.
조선 후기 살인 사건에서는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에 사적인 합의를 보고 관에 고발하지 않고 시신을 묻는 경우가 많았다. 정조는 사람을 죽인 자가 면죄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며 무덤을 파고 시신을 조사하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18~19세기 조선 후기에 발생한 범죄를 분석해 놓은 책 ‘민이 법을 두려워하지 않는다’(유승희, 이학사)는 특히 한성을 중심으로 발생한 사죄(死罪, 사형에 처해지는 범죄)를 통해 당시의 사회·문화적 특성과 민심을 읽어낸다.
조선후기 정조, 순조, 헌종, 철종 대의 사죄 건수를 왕의 재위연도로 나누어 왕대별 연간 범죄 건수를 살펴보면 정조대가 39.7건, 철종 34.1건, 순조 30.8건, 헌종 25.1 건으로 정조 대에 범죄가 가장 빈번했다.
특히 한성은 다른 지역보다 인구가 적은데 반해 범죄율은 높았는데, 정조 대에 한성 범죄율(0.33건)은 가장 낮은 함경도(0.02건)의 17배였고 조선 8도 가운데 가장 높았던 황해도(0.08건)의 4배였다. 저자는 이런 연도별‧지역별 통계를 토대로 한성에서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조선 후기 사회 변화의 양상을 정리했다.
16세기 이후 특권층이 토지 점유를 확장하면서 토지가 없는 지방 농민들은 한성으로 몰려들었다. 농촌 인구의 유입이 늘면서 한성에는 빈민과 유랑민이 생겨났고 이들이 값싼 노동력을 제공하면서 빈부의 격차는 더 심해졌다.
그러면서도 실제 거주자가 늘어 한성의 소비량은 증가하고 민간에서의 상품 판매가 활성화 되면서 상업이 발달한다. 상업이 발달할수록 돈과 물질을 중시하는 배금주의가 퍼졌고 절도와 문서위조, 고리대와 사채 같은 경제범죄가 증가했다. 이러한 경제범죄는 다시 폭력과 살인 등의 범죄를 유발했다.
특히 문서위조는 중범죄로 여겨져 위조범을 사형에 처했지만, 홍패(문과에 급제한 사람에게 주는 증서)와 가자체(관원의 품계를 올려줄 때 주는 교지) 등 신분 상승을 위한 위조가 꾸준히 늘어났다. 그러다가 19세기 중엽 이후로는 위조 범죄가 다시 감소하는 경향을 보였는데, 저자는 “이는 이 시기에 신분 상승이 더 이상 백성의 희망사항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상업이 흥하고 후기로 갈수록 빈부의 격차는 점점 심해졌다. 이런 분위기는 백성들 사이에 “서울은 지방과 달리 돈이 있으면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없다”는 인식을 불러왔고, 나라에서는 ‘민이 법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말이 퍼졌다.
음주와 도박 등 유흥문화가 발달했고 부민층에서는 과소비가 느는 반면 빈민층에서는 음주 범죄와 폭력이 난무했다.
1776년, 괴산의 여종 귀섬이 술을 훔쳐 마시고 취해 5개월 된 신욱경의 아이를 발로 밟아 죽게 했고, 서울 남부에서 장(醬)을 파는 이광점은 박세홍이 가격을 너무 낮게 책정한 데 유감을 품고 술김에 박세홍의 뺨과 겨드랑이를 차 죽게 했다.
‘심리록’(정조 대에 국왕의 심리를 거친 사형수의 판결 기록)에는 “경외(京外, 지방)의 상놈이 쉽게 살인을 범하는 것은 오로지 술, 여색, 재물 세 가지 때문인데, 그중에서도 술의 폐해가 가장 심하다”고 적혀 있을 정도로 당시 음주와 폭력은 심각한 사회문제였다.
저자는 정조 대 사죄가 많았던 이유로 국가의 사회통제 강화를 들었다. 숙종 이후 백성이 할 수 없는 일을 규정하는 금제(禁制)가 늘었고 각종 형벌과 양형을 정한 법전은 계속 개정됐다. 하지만 이는 관리의 형벌 남용과 위조 등의 문제를 야기했고 백성의 불만을 사 다시 사회질서를 어지럽히는 결과를 초래했다.
또 다른 특징적인 범죄는 바로 관속(官屬, 지방 관아의 아전과 하인)의 범죄다. 관속은 그리 높은 신분이 아니었지만, 늘어나는 한성의 생활범죄를 단속하기 위해 꽤 많은 수가 존재했다. 주로 금주나 금우, 금송 등 금제를 단속하는 관속은 업무의 특성상 백성의 우위에 있으려고 해서 백성과의 갈등이 심했다.
관속들은 백성 간의 소송 문제에 끼어들어 터무니없는 정채(지방 관원이 중앙 관아에 아쉬운 청을 하고 주던 돈)를 요구하기도 하고 요구를 거절당하면 이들을 구타하거나 심지어 물에 빠뜨려 죽이기도 했다.
책은 사죄의 원인과 판결을 내리기까지의 과정을 피해자와 가해자, 목격자의 진술을 바탕으로 상세히 기술하고 있어 당시 백성들의 실생활을 더 생생히 알 수 있게 한다.
그동안 왕조의 정책이나 민란 등 사회 변화의 중심이 된 큰 사건들을 중심으로 풀어낸 역사서와는 달리 가장 혼란했던 조선 후기, 사회의 가장 어두운 면이면서도 백성의 삶과 밀접한 범죄를 들여다봄으로써 역사를 읽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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