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 폭력 근절하려면 인성교육 시키는 이스라엘 군에서 배워야 해요
군 폭력 근절하려면 인성교육 시키는 이스라엘 군에서 배워야 해요
  • 오현주 기자
  • 승인 2014.08.22 11:22
  • 호수 4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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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전문가’류태영 농촌·청소년미래재단 이사장

노숙자에서 이스라엘대학 교수로… 박정희 대통령 도와 새마을운동 브레인 역할
이스라엘군은 이등병이 장군에게 담뱃불 빌리기도… 한국식 구타는 상상도 못해


윤 일병 사망사건 등 병영 폭력에 국민이 절망하고 분노한다. 스마트폰 사용서부터 국방부의 경영혁신안 등 여러 가지 대책이 거론되지만 미봉책에 불과하다는 비판이 따른다. 그런데 일찍이 합리적 해법을 내놓은 이가 있다. 바로 1970년대 초 새마을운동의 기획부터 정책수립. 시행 등을 담당했던 류태영 농촌·청소년미래재단 이사장(78·건국대 명예교수)이다. 류 이사장은 예루살렘 히브리대학원에서 사회학 석·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이스라엘 벤구리온대학 초빙교수를 지낸 ‘이스라엘 통’이다. 25년 전 정부로부터 이스라엘 군 제도를 연구 보고하라는 지시에 따라 이스라엘 현지에 파견돼 군 관계자로부터 브리핑을 받고 부대를 시찰한 후 보고서를 작성하기도 했다.
지난 8월 중순, 서울 남부터미널 국제전자센터 14층에 있는 재단에서 류 이사장을 만나 병영 폭력 대책을 비롯 열정적으로 살아온 지난 삶의 역정을 들었다.

-병영 내 가혹행위가 심각하다.
“윤 일병 얘기를 하고 싶지는 않고, 이스라엘 군에서 해답을 얻으면 돼요. 내가 여러 번 국방부와 군정훈실에 건의했지만 안통해요.”

-그들은 어떻게 하고 있나.
“어느 나라 군대나 두 가지를 합니다. 하나는 탱크를 몰고 총을 쏘는 법을 가르치는 전략·전술이고 다른 하나는 정신교육입니다. 두 번째를 소홀히 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따라 군이 달라집니다. 이스라엘 군은 작전 중엔 상하 간 명령계통이 엄격하지만 작전이나 훈련시간이 끝나면 계급장 없는 군대 같아요. 이등병이 담배를 꺼내 물고 불 좀 달라고 하면 장군이 주머니를 뒤져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여줍니다. 장병끼리 형제처럼 지내는 이스라엘 군에선 한국군의 구타 같은 건 상상도 못해요.”

류 이사장은 “이스라엘 젊은이들에게 장래 희망을 물으면 10명 중 8명은 ‘군대 가서 정한다’고 대답한다”고 말했다. 제대 후 사회에서 어떤 일을 할 것인가에 대해 군에서 상담하고 교육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청년들은 군 정훈 프로그램에 의해 역사·철학·사회 등 인문학을 배운다. 분야마다 여러 명의 상관으로부터 정신교육을 받으며, 군에서 제작한 문고판 철학서, 고전문학 등을 배낭에 넣고 다니며 숙독한다.

-책을 통해 애국심이 생기나.
“우리가 왜 나라를 위해 싸워야 하는가, 민족수난의 역사를 가르쳐 남녀가 사랑하듯 자연스럽게 나라사랑하는 마음이 끓어오르도록 합니다. 저만 잘 살면 됐지 왜 나라를 위해 희생해야 하는가를 교육을 통해 깨닫게 합니다. 우리 군은 감성이 풍부한 젊은이들을 데려다 밥과 옷까지 주면서 뭘 하는지요. 지금은 전쟁 시기도 아닌데 말입니다. 정신교육을 시키면 군 폭력 문제는 일어나지 않아요.”

-나라는 미군에게 맡기고 부하나 갈군다는 말도 나온다.
“그것도 교육이 제대로 안 돼 그래요. 미군이 거저 지켜주나요. 대가를 받아갑니다. 우리에게 미사일도 못 만들게 하고 무기도 못 팔게 하고 그러잖아요. 쌀이 남아돌지만 미국 쌀을 수입해줘야 해요. 수입 안한다고 해봐요. 자기들 손 뗀다고 겁줍니다.”

-단원고 3학년생 특례입학 말도 나오는데.
“그러려면 다들 비례대표제로 국회의원 만들지 그래요. 정치적으로 이용해서는 안돼요.”

류태영 박사의 삶은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하다. 전북 임실에서 머슴의 아들로 태어나 어릴 적부터 고된 노동과 가난을 머리에 이고 살았다. 중학교도 18세에 간신히 들어갈 수 있었다. 신문배달, 미군부대 구두닦이 등을 하며 야간고등학교를 다녔다. 류 이사장은 “다리 밑, 길바닥에서 자며 쓰레기통에 버린 밥을 주워 먹기도 했다. 내가 노숙인 1호다”라며 웃었다. 야간대학을 나와 덴마크유학(1968~69)을 다녀온 후 대통령비서실 초대새마을담당(1971~73)으로 새마을운동을 리드했다. 이스라엘 유학(1973~78), 1년여 초빙교수를 마치고 귀국 후 건국대 교수, 부총장(1978~1994)을 역임했다.

-‘노숙자’가 어떻게 대학교수가 됐나.
“내 인생의 한 대목 한 대목은 불가능이에요. 말 배운 것도 불가능이고 대학을 다닌 것도 불가능이고 전부 불가능한 거예요. 초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새벽기도를 나가요. 어려울 때마다 하나님에게 기도합니다. 긍정적인 삶, 자신감을 가지고 사는 삶, 그것을 신념으로 가지는 삶, 용기를 가지고 꾸준히 노력하는 자세 속에서 불가능이라는 담이 허물어집니다.”
류 박사는 이스라엘에서 맨손으로 영화를 만든 이야기를 소개했다. 이스라엘에서 공부하는 동안 그들의 국민성, 안보의식, 농업기술, 키부츠·모샤브 등 농업공동체 등을 다큐멘터리 영화로 만들어 한국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영화를 만들어본 경험도 없었고 자본도 없었다. 그는 이스라엘 정부를 찾아가 담당자를 설득해 3000달러의 지원금과 함께 촬영기사, 촬영기기를 제공 받았다. 영화를 찍은 후 편집과 녹음, 내레이션 등을 배워 결국 혼자의 힘으로 두 편의 영화를 완성해 1975년에 한국에 보냈다. 국방부 정훈교육용과 일반교육용으로 전국에 배포됐고 반응도 뜨거웠다고 한다.

-덴마크 유학은 신데렐라 같은 이야기다.
“가난 속에서도 농촌을 어떻게 하면 잘 살게 할 수 있을까 그 생각만 했어요. 도서관에서 여러 책을 보다가 덴마크란 나라가 세계적인 복지농업국가란 사실을 알았어요. 덴마크는 우리나라보다 더 가난했던 나라에요. 160여년 전 프러시아와의 전쟁에서 패해 막대한 배상금을 물어주고 곡창지대도 넘겨준 상태였지요. 그때 그룬트비 목사란 이가 ‘하나님을 사랑하자, 이웃을 사랑하자, 흙을 사랑하자’는 구호를 갖고 나타나 국민의식을 바꾸어놓았어요. 흙을 사랑하자는 말은 농업을 일으키자는 뜻이지요. 이걸 배워 써먹어야겠다는 생각에 무조건 편지를 썼어요.”

-어떻게 갈 수 있었나.
“우리나라에 덴마크대사관도 없었고 덴마크를 다녀온 이도 없었던 때였어요. 덴마크에서 농업을 배워 우리나라 농촌을 위해 일하겠다는 내용의 편지를 서툰 영어로 쓴 다음 도서관에서 덴마크의 국왕 이름을 확인했어요. 당연히 수도에서 살 것이라고 여기고 편지봉투에 ‘프레드리히 9세, 코펜하겐 덴마크’라고 쓴 다음 우체국에 갔어요. 꼬부랑글씨로 써졌으니까 아가씨가 도장을 팡팡 박고 받아주더라고요. 한참 후 덴마크 왕실에서 답장이 왔어요. 딱 영어로 세줄 반이었어요. 당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행정부에 이첩을 했다는 겁니다. 행정권한이 없는 왕이 요즘으로 말하면 부전지 하나 써서 외무성 장학금 관리국에게 주었던 게지요. 그래서 간 겁니다.”

-단시간에 덴마크 말을 배운 비결은.
“덴마크 공항에 내렸을 때 그 나라 말을 듣고 ‘세상에 뭐 저런 말도 다 있나’ 웃음이 났어요. 방법은 간단해요. 한국말을 처음 배울 때 ‘엄마’ ‘아빠’ ‘까까’ 소리를 흉내 냈잖아요. 거기에 착안해 생활회화 200문장을 영어로 써 덴마크 말로 바꿔 하루에 10문장씩 새벽부터 밤까지 외웠어요. 3개월 만에 다 외울 수 있었어요.”

-공부는 좀 다르지 않은가.
“전문용어도 같은 방법으로 3개월 만에 익혔지요.”

-새마을운동하면서 잊을 수 없었던 일은.
“박정희 대통령과 인간적인 대화를 많이 했어요. 내가 살아온 얘기를 들려주었더니 박 대통령이 그래요. ‘나도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학교를 못 다녔다, 군대에 가면 먹여주고 옷 주고 그런다고 해서 군에 갔다’고요. 또, 장가가려고 초등학교 교사(육영수)하고 연애했지만 그 집은 부자였고 가난한 집안의 사위는 얻지 않겠다고 괄시가 심해 혼자 막걸리 마시고 괴로워했다고 해요.”

-이스라엘의 노인복지는 어떤가.
“이스라엘 10계명이 있어요. 1~4계명은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이고, 5~10계명은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예요. 다섯 번째 계명이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겁니다. 이스라엘엔 양로원이 많지 않아요. 집에서 부모를 모시고 삽니다. 키부츠라는 공동체에 젊은이가 회원이 되면 부모를 자동으로 모셔다가 다 지원해줍니다.”

-우리나라 노인 자살률·빈곤률이 높다.
“가난하고 못살망정 행복하게 사는 방법이 있어요. 미국에서 교포노인들을 대상으로 강연을 한 적이 있어요. 모두 한국에서 한가닥했던 분들이에요. 돈도 있고요. 그분들 하는 일이라곤 매일 골프·낚시·화투 치는 게 전부에요. 내가 ‘당신들은 식물인간이다, 일을 해야 한다’고 했더니 깜짝 놀라더라고요. 귀국하고 한참 후에 49명이 나에게 편지를 보냈어요. 그때 충격 받고 일을 시작했다고요. 70세에 재산을 다 정리했다가 그 날 이후로 다시 회사를 차린 이도 있다고 해요. 땅만 보고 벽만 보면 치매에 걸려요. 바쁜 사람은 그런 병 걸리지도 않고 죽겠다는 생각도 안 해요.”

류태영 이사장은 일주일에 2,3회씩 30여년 강연을 해오고 있다. 류 이사장은 “교보생명 직원상대로 강연하고 교보생명 창업주로부터 상상도 못할 큰 액수의 강연료를 받았다”며 “그것으로 집을 살 수 있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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