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님 사후 2년 만에 40대였던 내가 반백의 머리가 됐다”
“아버님 사후 2년 만에 40대였던 내가 반백의 머리가 됐다”
  • 오현주 기자
  • 승인 2014.08.29 13:49
  • 호수 4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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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박목월 아들 박동규 서울대 명예교수

 시인 아들의 유튜브 동영상 강연이 입소문을 타고 잔잔히 퍼지고 있다. ‘국민시인’ 박목월 (1916~1978)의 아들 박동규(75) 서울대 명예교수 얘기다. 박 교수는 서울 합정동 100주년기념교회에서 시인 아버지와 나눈 끈끈한 부자의 정을 소개해 보는 이들의 마음을 훈훈하게 해주었다.
시인은 초등학생이던 아들과 아내와 함께 불국사로 회사 야유회를 갔다. 신발을 살 여유조차 없던 때라 시인의 아내는 전날 시장에서 옥양목을 끊어다 아들의 모자와 신발을 만들어주었다. 먼 길을 걷느라 아들의 발에서 피가 났고 헝겊신발은 붉게 젖었다. 시인은 뒤늦게 그걸 보고는 눈물을 흘리며 “이놈아 내가 너의 아버지다. 아프면 아프다고 해도 괜찮아” 하면서 등을 내밀었다. 박 교수는 “그날 땀에 흥건한 아버지의 등에 업혀 토함산을 올랐고 집까지 업혀왔다”며 “내 뺨에 아직도 아버지의 땀이 묻어있다. 그 땀에 사랑의 본질이 감춰져 있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서울대 정년퇴임 후 박목월이 창간한 월간지 ‘心象’(심상)을 이어서 발간해오고 있다. 박 교수는 지난 5월, 아버지를 회고하는 에세이와 박목월의 산문을 합쳐 ‘아버지는 변하지 않는다’(이강)를 발간하기도 했다. 8월 말 어느 날, 서울 양재동 허름한 건물 2층에 위치한 심상 편집실에서 박 교수를 만나 ‘시인 박목월, 인간 박목월’에 대해 들었다.

-‘아버지 박목월’은 어떤 분이었나.
“목월 선생(아버지를 그렇게 불렀다)이 ‘문장’지를 통해 문단 데뷔를 하던 해(1939)에 내가 맏이로 태어났어요. 비단보다 섬세하고 부드럽고 인정 많았던 분이었어요.”
박목월은 늘 식탁에서 아들의 얼굴과 머리를 만졌다고 한다. 박 교수는 “우리 다섯 남매 중 하나라도 안보이면 수저를 들지 않았고 자식들 하나하나의 머리를 쓰다듬은 후에야 숟가락을 떴다”며 “형제끼리 밥 먹으며 사랑스런 관계를 만들어주었다”고 기억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라면.
“우리 집은 크리스마스 때 갖고 싶은 물건을 선물 받곤 했어요. 아버지는 노트와 연필을 들고 자식들에게 원하는 선물을 물었지요. 아무것도 모르는 여동생이 털외투를 사달라고 하자 아버지 얼굴이 허옇게 되더니 아무 말도 못하고 연필을 든 손이 벌벌 떠는 거예요. 난 아버지가 불쌍해 보여 몇 달 전부터 갖고 싶었던 구두를 말하지 못하고 털장갑이라고 대답했어요. 내 방에 돌아가 불 끄고 누웠는데 화가 나면서도 눈물이 나오더라고요. 한참 후에 아버지가 문을 열고 들어와 내 얼굴을 만져보더니 ‘철이 들었어, 철이 들었어’ 하며 따라 우시는 겁니다. 내 생애 가장 기쁜 순간이었어요. 그런 섬세함이 언어를 길어 올리고 언어 속에 감추어진 암시적인 정서를 끌어내는 힘이었다고 봅니다. 이런 감성의 더듬이가 가슴 깊이 인간다움에 뿌리내리고 있다가 건져 올려져 시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언제 아버지 생각이 가장 많이 나는가.
“내가 40이 되기 전에 아버님이 혈압으로 돌아가셨어요. 아침에 산책 갔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거실에 쓰러졌어요. 그때 내 귀 위에 흰머리카락이 생기더라고요. 그 후 2년 사이에 머리가 이렇게 (허옇게)된 거예요. 동생도 살펴야했고 시 잡지도 내느라 힘든 시간이었어요. 거울을 볼 때마다 찢어진 우산이라도 쓰고 있을 때가 얼마나 행복했는가에 대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박목월은 경주 고성에서 태어나 대구계명중을 졸업했다. 1939년 정지용 시인의 추천으로 문단에 나왔다. 데뷔작 3편 가운데 하나가 ‘나그네’이다. 조지훈·박두진과 함께 ‘청록파’ 시인으로 활동하며 우리 민족 언어의 아름다운 혼을 불러일으키는 촉매 역할을 했다. ‘윤사월’ ‘이별의 노래’ 등 1000여편의 시와 ‘구름의 서정’(1956) 등 15권의 수필집이 있다. 동시 ‘얼룩소’도 그의 작품이다. 계명고·이화여고 교사, 한양대 문리대학장, 한국시인협회 회장을 지냈다. 아시아자유문학상·예술원상 등 수상.
박동규 명예교수는 1939년 경북 월성군에서 5남매 중 장남으로 출생했다. 서울대 문리대 국문과 및 동대학원 석·박사. 1962년 현대문학에 평론으로 추천됐다. 문학평론가이자 문학박사이다. 저서는 ‘한국현대소설의 비평적 분석’ ‘사랑하는 나의 가족에게’ 등이 있다.

-박목월은 어떻게 시인이 됐나.
“(아버지가)혼자 자취하며 대구계명중학교에 다닐 때였어요. 방값을 못내 자취방에서 쫓겨나 담임선생의 배려로 학교 온실 안에 3개월간 기거했다고 해요. 바닥에 가마니때기를 깔고 누워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별을 보며 ‘내 신세가 가련하구나, 지붕이 있는 집에서 살아야겠다’란 생각은 들지 않았고 별들이 속삭이는 말을 글로 쓰고 싶었답니다.”

-누구에게 시를 배웠나.
“경주 촌구석에서 젊은 날 혼자 낑낑대며 배웠지요. 독서량이 내가 생각하기에 시인으로서 엄청나요. 집의 사방 벽이 온통 책이었어요. 헤르만 헤세 책과 릴케, 워즈워드 등 낭만주의 시를 많이 읽었고 간혹 엘리옷도 읽었고요. 무수히 많은 책을 읽어 그걸 녹인 겁니다.”

-시작(詩作)의 특징이라면.
“아버지가 연필을 깎으면 어머니는 ‘조용히 해라 시 쓰신다’고 했어요. 산문은 잉크를 찍어 펜으로 썼지만 시만은 꼭 연필로 쓰셨어요. 내가 생각해도 이상해서 물었더니 ‘야, 이놈아, 연필은 흑연이라 천년이 가도 글씨가 날아가는 법이 없다’고 하셨어요. 그게 목월 시의 정신이라고 봐요. 마음을 가다듬고 부러진 면도칼로 연필을 삭삭 뾰족하게 갈아서 종이 위에 만들어가는 언어들이 시가 가지는 본질입니다. 종이 위에 부딪치는 연필의 감각이 시인의 상상력과 연결이 돼 있을 겁니다. 밤에 주로 썼는데 간혹 노래를 부르기도 했어요. 운율을 맞추고 언어가 가지고 있는 소리의 반응도 스스로 체득해서 시를 만들어간 거지요.”

-쉽게 썼나.
“진짜 어렵게 쓰셨어요. 시가 안 되면 방안을 뒹굴뒹굴 굴러요. 보기에 안쓰러울 정도로 버둥거리기도 하고 일주일 내내 식음을 전폐할 때도 있었고….”

-박목월의 어떤 시를 좋아하는가.
“우리 가족과 연관이 있는 시가 50여편 돼요. (아버지)제사 예배를 마치고 어머니가 ‘시를 골라라’하면 여동생이 ‘가정’이란 시를 읽어 온가족을 눈물바다로 만들곤 했어요.”

‘가정’
지상에는/아홉 켤레의 신발./아니 현관에는 아니 들깐에는 아니/ 어느 시인의 가정에는/ 알전등이 켜질 무렵을/ 문수가 다른 아홉 켤레의 신발을./내 신발은/ 十九文半./ 눈과 얼음의 길을 걸어/ 그들 옆에 벗으면/ 六文三의 코가 납작한/ 귀염둥아 귀염둥아/ 우리 막내둥아./ (중략) 아랫목에 모인/ 아홉 마리의 강아지야/ 강아지 같은 것들아./ 굴욕과 굶주림과 추운 길을 걸어/ 내가 왔다./ 아버지가 왔다./ 아니 十九文半의 신발이 왔다(후략).

-박목월의 아들이란 사실이 부담스러운 적은 없었나.
“왜 안 그렇겠어요. 어디 가서 나쁜 짓 한 번 못하지요. 서울고등학교 다닐 때 황순원·마해송·심훈 같은 유명한 작가들의 아들이 전부 나와 같은 학년이었어요. 담임선생님이 조병화 시인이었고요. 거기서 성적이 떨어지면 죽는 날이에요. 아버지들끼리 자식 얘기하다가 공부 얘기도 나올 테니까요. 그렇지만 부담스럽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고 그런 것이 행복이고 고마웠어요.”
-교류하던 시인들은.
“우리 집에는 항상 시인들이 모여들었어요. 어머니는 누가 시 쓴다고 하면 질색을 할 정도였어요. 시인 조지훈과 가까웠어요. 두 분이 반월산을 배회하며 보름 동안 집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였으니까요. 조지훈은 커다란 대야에 청주를 쏟아 붓고 3일 동안 앉은 자리에서 다 마셨어요. 자다가 일어나 마시고 다시 자고 그랬어요. 추천해준 시인들, 허영자·유안진·신달자가 오고, 김광림·구상 선생이 자주 찾았어요. 젊은 시인들, 이근배·김종해·오세영은 뒷자리에 앉았고요. 사람들은 우리 집에 오면 늘 술을 달라고 했어요. 내가 소주에 커피를 타가지고 양주라고 하고 갖다주면 진짜로 알고 맛있다며 받아마셨어요.”

-육영수 여사와 가까웠다고.
“목월 선생이 시인협회 회장일 때 시화전을 했는데 그때 육 여사가 관람하러 왔어요. 육 여사가 ‘형편이 어려운 시인을 위해 무얼 해 드리면 좋을까요’ 하고 묻자 아버님이 ‘시인들 시집 좀 내달라’고 부탁해 시집 50권을 냈어요. 육 여사가 문학을 배우고 싶어 해 (아버지가) 시의 기본 형식을 가르쳐준 적도 있어요.”

-시인에게 여성 문제가 있었다는데.
“아버님이 잘 생기셨어요. 무슨 스캔들이 들리면 나는 화가 났지만 어머니는 나에게 ‘시인은 신화가 있어야 한다’며 초연했어요. 어머니는 ‘바이런 같은 시인을 봐라, 뒤에 그 사랑을 표현해내는 모든 뜬구름 같은 신화 속에 담겨 있을 때 시인에 대한 상상은 더 넓어지는 것이다’고 했어요.”

박동규 교수 집안은 기독교이다. 박 교수를 비롯해 아내와 어머니, 아버지가 모두 장로이다. 박 교수는 “어머니는 자식들이 밖에 나가거나 들어올 때 등에 십자가를 그리시며 하나님의 가호를 빌었다”고 말했다. 그는 할머니와 어머니가 붉은 연필로 그으며 읽었던 성경책 3권을 가보처럼 소중하게 여긴다.
박 교수는 “마치 토정비결을 보듯 아침에 성경책을 아무데나 펼치고 아무 줄이나 읽으면 하루가 딱 들어 맞는다”며 웃었다. 박목월은 이 성경책을 소재로 ‘어머니의 언더라인’이라는 시를 썼다.

‘어머니의 언더라인’
유품으로는/ 그것 뿐이다/붉은 언더라인이 그어진/ 우리어머니의 성경책/ 가난과/ 인내와/ 기도로 일생을 보내신 어머니는/ 파주의 잔디를 덮고/ 잠드셨다.(중략) 가죽으로 장정된/ 모서리마다 헐어버린/ 말씀의 책/ 어머니가 그으신/ 붉은 언더라인은/ 당신의 신앙을 위한 것이지만/ 오늘은 이순의 아들을 깨우치고/ 당신을 통하여 지고하신 분을 뵙게 한다(후략).

박동규 명예교수는 어려운 환경에서도 40여년째 ‘심상’을 발간해오고 있다. 시인 300여명을 배출했으며 해마다 해변시인학교를 개최한다. 박 교수는 “매달 400여만원의 적자를 본다”며 “문인협회에 등록한 시인들만 7000명이다. 그들은 어떻게 남의 시를 읽지 않고 자기 시만 쓰는지 이해가 안 간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또, 16년 전부터 서초구청이 주민 상대로 여는 문학강좌에 자원봉사를 나가고 있다. ‘심상 시 교실’ 강좌에 60~70대가 많다고 한다. 박 교수는 “시를 쓰는 과정에서 사물에 대한 인식을 다시 바로 잡아가고 자기를 드러내 보이고 위로하는 치유적 양식을 가진다”며 “창작은 반복적 계산이 아니라 창의적 상상력을 필요로 하는 것이며, 그 상상력이 치매와도 멀어지게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오현주 기자 fatboyoh@100ss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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