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작된 신화의 허울에 갇힌 개인의 탈출기
조작된 신화의 허울에 갇힌 개인의 탈출기
  • 김지나 기자
  • 승인 2014.08.29 14:17
  • 호수 4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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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즐거운 복희’9월 21일까지
▲ 극작가 이강백의 신작인 이번 연극은 타인이 만들어낸 이야기에 갇힌 개인의 불행을 드러낸다.

만들어진 이야기와 진실의 간극 그려… ‘알레고리 작가’ 이강백 신작
‘본극’과 ‘막간극’의 새로운 형식… 원형 무대‘진실’비추는 호수로 사용

극작가 이강백이 서울예술대학교를 퇴직하고 쓴 신작 ‘즐거운 복희’가 무대에 올랐다. 연극계에서는 “올 하반기에 가장 기대되는 작품”이라며 입을 모으고 있다.
‘정치적 우화극 작가’ ‘알레고리(이중적 의미를 가진 이야기 유형)의 작가’로 잘 알려진 이강백이 “대본 수정만 일곱 번을 고치고 집필 초기부터 남산예술센터의 무대를 염두에 두고 썼다”고 말해 극의 스토리와 연출 모두에 관심이 쏠린다.
197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희곡 ‘다섯’으로 등단한 이래 작가는 ‘파수꾼’(1974) ‘내마’(1975) ‘봄날’(1984) 등을 발표하며 억압적인 정치‧사회적인 상황을 비유적으로 풀어냈고 90년대 이후에는 개인의 내면과 인간의 본성에 초점을 맞춰 그려냈다.
커다란 호수 옆에 위치한 7개의 펜션. 연극은 1호 펜션을 분양받은 장군이 죽으면서 시작된다. 장군이 죽으면서 1호 펜션은 장군의 딸인 복희에게 상속되고 “이곳을 세상에서 가장 안락한 낙원으로 만들어 하나뿐인 딸 복희를 가족처럼 보살펴 달라”는 장군의 유언에 따라 나머지 여섯 명의 펜션 주인은 복희를 위해 기꺼이 ‘친절’을 베풀 계획을 짠다.
고종 황제 시절 증조부가 받은 작위를 물려받았다고 주장하는 시대착오적 인물인 백작, 장군의 초상화를 그리며 장군과 친분이 두터웠던 화가, 꽤 잘나가던 레스토랑을 전처에게 넘기고 펜션으로 들어온 김봉민, 전직 수학교사 남진구, 80편이 넘는 권력자와 부자들의 자서전을 쓴 대필작가 박이도, 유복하지만 재혼을 앞둔 아버지에게 펜션을 받고 쫓겨난 건달은 우선 장군이 남기고간 수많은 퇴역군인의 명단을 이용해 펜션으로 조문객을 끌어들인다.
그 후 조문객을 펜션 고객으로 유치하기 위한 묘안을 내놓는다. 장군의 묘를 현충원이 아니라 펜션 앞 언덕 위에 만드는 것이다. 매일 아침 장군의 묘를 찾아가 슬퍼하는 복희를 ‘상품화’ 시키기 위해서다. 얼마간의 사람들이 다녀가 돈을 벌었지만 점점 방문객이 줄자 주인들은 복희의 ‘슬픔’과 함께 ‘즐거움’을 더하기 위해 밤마다 나팔을 불며 노는 호숫가 음악회를 열기에 이른다.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점점 펜션 주인들에 이끌려 가는 삶을 살고 있는 복희는 “이 슬픔에서 벗어나고 싶다”면서도 “사람들에게 웃는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는 말을 들으며 늘 슬픔에 잠겨 있다. 복희는 갈등의 주체이면서도 나머지 펜션 주인들과는 무대 위에서 한 번도 마주치지 않는데, 여기에서 이번 연극의 형식적 특징이 나타난다. 

▲ 호수처럼 비치는 무대가 인상적이다.(사진=서울문화재단)

극은 서사를 이끌어가는 6명의 주인들이 등장하는 ‘본극’과 복희 혼자만 등장해 독백으로 무대를 채우는 ‘막간극’으로 구성했다. 본극에서는 복희의 감정이 매장당한 채 나머지 주인들이 ‘매일 아버지의 묘를 찾아가는 슬픈 딸 복희’라는 하나의 스토리를 만들어내고, 막간극에서는 만들어진 이야기에 대한 진실, 억압받는 개인의 진심을 따로 그려내는 것이다. 이 형식은 진실과 허구를 대비시켜 “인간은 이야기를 만들고 이야기는 인간을 만든다”는 작품 속 대사를 더 극명하게 보여준다.
일흔을 바라보는 노 작가는 “나라는 존재는 나 혼자 만든 것이 아니다. 부모의 기대가 만든 존재이기도 하고 회사의 요구에 의해 만든 존재이기도 하며, 국가의 정책이 만든 존재이기도 하다”며 “그렇게 만들어진 내가 나 자신과 갈등이 없다면 행복하겠지만 갈등이 너무 크다면 괴롭고 슬프고 불행하다”고 했다.
주인들이 만들어낸 이야기와 진실의 간극은 복희가 나팔수와 사랑에 빠져 펜션을 탈출하는 과정에서 나팔수만 호수에 빠져 죽음으로써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주인들이 복희와 나팔수와의 사랑, 나팔수가 빠져 죽은 호수에서 나팔 소리가 들린다는 소문을 또 다시 상품화하기 때문이다. 화가는 나팔을 품에 안은 복희의 초상화를 그려 팔고 대필작가는 자신의 자서전 표지에 복희를 등장시킨다. 그리고 그 마지막에는 ‘진실’을 알고자 하지 않는, 포장된 이야기를 소비하는 사람들이 있다.
‘알레고리의 작가’라는 별명이 붙은 작가의 작품인 만큼 이번 연극에서도 적잖은 은유와 상징이 포진돼 있다.
이 작품이 2013년 9월에 공모했던 ‘남산예술센터 공동제작 선정작’임에도 불구하고 호수 속에 침몰해 찾지 못하는 나팔수의 시신, 퇴역한 장군의 죽음으로 홀로 남겨진 딸 등은 관객에 따라 정치적 은유로 해석할 여지가 있다.
놀이시설과 유흥시설까지 만들려고 하는 김봉민이 “묘지에 대해서는 따님에게 먼저 물어봐야 하는 것 아니냐”는 건달을 달랠 때나 나팔수의 죽음으로 흥분한 다른 주인들을 진정시킬 때 주는 ‘박하사탕’이나 백작이 가지고 싶어 하는 장군의 훈장, 복희가 “커다란 거울 같다”고 표현한 호수 등은 관객의 상상력과 해석에 따라 다양하게 읽히는 장치다.
작가가 처음부터 고려했다는 원형 무대는 어떤 때는 호수가 되고 어떤 때는 펜션 내부가 되도록 바닥을 비치게 만들어 놓았다. 연극은 복희가 펜션을 태우고 탈출하는 것으로 막을 내린다. 서울 남산예술센터에서 9월 21일까지.
김지나 기자 jina@100ss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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