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뽀빠이 유랑극단 만들어 시골노인들 위로해주고 싶어”
“뽀빠이 유랑극단 만들어 시골노인들 위로해주고 싶어”
  • 오현주 기자
  • 승인 2014.09.19 13:48
  • 호수 4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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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프로 10년 넘게 진행한 칠순의‘뽀빠이’이상용

새벽 4시 기상, 운동·독서 후 하루 1,2건 행사 사회… 40년째 해와
노인들도 잘 씻고 향수라도 뿌리고 자기관리 잘 해야 공경 받아

40여년을 한결같이 새벽 4시에 일어나 조깅하고 역기 들고 책 읽고 하루 1,2건의 행사를 소화해낸다. 고희에 이 같은 초인간적인 스케줄을 이어가는 이가 방송인 이상용(70)씨이다. 이씨는 최근 10년째 진행해오던 노인 대상 프로 ‘늘 푸른 인생’(MBC TV)에서 하차했다. 이씨는 9월 초, 청양군 홍보대사로 위촉되기도 했다. 대한노인회 홍보대사를 비롯 여수세계박람회 홍보대사, 육군 홍보대사, 고혈압 홍보대사 등 지금껏 10여 단체의 홍보 일을 맡고 있다. 지난 9월14일 오전 7시, 서울 남산 국립중앙극장 문화마당에서 중구청 주관으로 열린 한가족걷기대회의 사회를 보고 있던 그를 만났다.

-오늘 아침도 역기를 들었는지.
“어제 밤늦게 지방 공연 마치고 올라와 바로 이곳으로 왔어요. 여기 끝나면 강연가야 해요.”

-건강이 뒷받침 되는가보다.
“태어나서 한번도 술·담배를 손에 안댔어요. 꾸준히 운동으로 몸을 다진 덕분이지요.”

-매일 무슨 책을 보나.
“역사책이나 경험담 같은 거지요. 키 크고 잘 생긴 사람들이 술 먹고 할 때 나는 공부했어요. 맘에 드는 글을 따로 메모해놓은 노트가 내 방송밑천이기도 해요.”

-‘뽀빠이’하면‘우정의 무대’가 떠오른다.
“그 프로 덕에 오늘의 내가 있는 셈이지요. 그 외에도 군 프로를 많이 해 35년간 3000여회의 군 방송을 했어요. 우리 집에 군복이 200 벌이 넘어요. 육·해·공군, 해병대, 탱크부대 옷 등등해서요. 언젠가 그걸 한자리에 모아놓고 전시할 겁니다.”

-윤일병 사망 사고 보면 어떤 생각이 드나.
“‘우정의 무대’(1986~1996)가 지금까지 방영됐다면 그런 일이 없었을 지도 모르지요. 병영이 너무 메마르니까 그런 일들이 생기는 겁니다. 그런데 대책이라고 내놓는 게 핸드폰 허용인데 그건 아니라고 봐요. 군인은 군인다워야 합니다. (군복무 기간) 2년을 못 참는다면 사회에 나와서 어떻게 살아가겠어요.”

-한동안 힘든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1996년 ‘우정의 무대’ 녹화를 마친 다음날 신문에 내가 심장병어린이를 도울 후원금을 횡령했다는 기사가 났어요. 그 일로 인해 방송에서 잘리고 하루아침에 인기와 명예 모든 걸 잃었지요. 나를 조사하던 검사가 3개월 만에 무혐의란 걸 밝혀주었지만 더 이상 과거의 뽀빠이가 아니었어요.”

-처음에 어떻게 돕게 됐나.
“1970년대 중반 어린이 프로 ‘모이자 노래하자’를 하던 중 심장병에 걸린 한 어린이와 부모가 나를 찾아왔어요, 수술비가 없다고 해 같이 서울대병원에 갔지요. 수술비가 1800만원이라는 소리를 듣고 기절하는 줄 알았어요. 당시 10평짜리 아파트가 1200만원이었고 나는 사당동 독채 전세를 650만원에 살고 있었어요. 나는 ‘기술이 없어 못한다면 할 수 없으나 돈이 없어 죽는다면 안된다’고 수술하라고 호기롭게 말했어요. 그리고 야간업소 세 곳을 뛰었지요. 수술 받은 어린이 아버지가 방송에서 ‘뽀빠이가 무료 수술해줬다’고 밝히면서 우리 집에 전국의 심장병어린이가 수술을 해달라고 모여들었어요.”

횡령 혐의는 풀렸지만 국내에서는 일을 하지 못했다. 단돈 20만원을 들고 미국으로 건너가 LA에서 라스베이거스까지 관광버스 가이드 일을 했다. 1년 쯤 지나자 아내가 ‘그만 고생하고 집으로 돌아오라’고 했다. 귀국해 음담패설 테이프를 만들어 고속도로 휴게소 화장실 옆에서 팔았다. 3년 동안 15집까지 나왔다. 그 덕에 먹고 살았다. 이씨는 “TV 화면에서는 건전하게 진행하지만 실제 행사 현장에서는 음담패설로 관객을 사로잡는다”며 웃었다.

-정치적 외압 때문이라고 했는데.
“당시 실세 측에서 나를 찾아와 선거에 출마하라고 권유했지만 끝까지 하지 않았어요. 난 정치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거든요. 그 직후에 후원금 횡령 사건이 터지고 ‘우정의 무대’도 폐지됐어요.”

-과거 선행을 많이 했다.
“30여년 동안 심장병어린이 567명을 치료해주면서 쓴 돈이 80억원이에요. 18년 동안 등록금 내주고, 어린이 600여명에게 7년 동안 도시락을 싸주었어요. 1만2000여명 어르신들께 돋보기 나눠드렸고, 섬 어린이들에게 옷을 보내주었어요.”

-그런데 대가는 참혹할 정도다.
“수술 받은 어린이 가운데 지금껏 연락이 되는 사람은 여자 변호사를 포함해 단 3명 뿐이에요. 며칠 전 기차에서 한 남자가 나에게 와서 아는 체를 해요. 자기 딸이 두 살 때 심장병 수술을 받았고 현재 명지대에 다닌다는 겁니다.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고 싶었다고 하더라고요.”

충남 서천 출신의 이상용씨는 대전고·고려대 농대를 나왔다. 1973년 ‘유쾌한 청백전’(MBC TV)으로 데뷔 후 맡는 프로마다 롱런했다. ‘우정의 무대’ 10년, ‘위문열차’ 24년, ‘모이자 노래하자’ 17년, ‘출발동서남북’ 9년, ‘늘 푸른 인생’ 10년 등이다. 그는 “열심히 일하고 같이 일하는 PD들의 속을 썩이지 않아 가능했다”고 기억했다. 국민훈장 동백장, 가톨릭봉사대상 등을 수상했다.

-방송인이 된 건 우연히 본 점 때문이라고.
“취직시험마다 떨어져 책·화장품 외판원을 8년 간 했어요. 하도 답답해 삼선교 어느 점집을 찾았더니 TV에 한번 나가보라는 거예요. MBC에 있던 학교 선배 PD에게 통사정해 ‘유쾌한 청백전’ 프로에 나갔는데 그게 히트를 했어요. 신문에서 ‘학사출신 코미디언’이라고 띄워주기도 했고요. 그 후 ‘키가 작아 어린이프로를 맡는 게 좋다’고 해 ‘모이자 노래하자’ 프로를 진행하게 됐지요.”

-요즘도 매일 사회를 본다고.
“하루에 세 곳을 뛸 때도 있어요. 친구 만날 시간도, 외로울 시간도 없어요. 이 나이에 불러주는 데가 많아 행복합니다.”

-어떤 행사들인가.
“지역농협행사, 마을축제, 노인행사, 경찰·119, 보험회사 등에서 강연해요. 초대가수나 악단의 지원 없이 마이크 잡으면 혼자서 3시간을 웃길 수가 있어요. 출연료 부담 없는데다가 재밌으니까 한 번 나를 써본 곳에서는 나만 찾아요.”

-어떻게 웃기나.
“정치인이 좋아하는 사자성어는 ‘파란만장’이다, 왜냐, 파란 거(1만원권 지폐) 만장이면 1억원이니까. 전직 대통령이 키우는 개가 짖지를 않아요. 주인이 도둑인데 왜 짖겠어요. 국회의사당을 여의도로 옮길 때 여당은 좋아했다고 해요. 여당 의도대로 다되니까. 여의도 모기는 다른 지역 모기보다 빨대가 5mm 더 길다. 왜, 정치인들 얼굴이 두꺼우니까. 전철 경로석에 앉은 젊은 여성에게 노인이 다가와 일어서라고 하자 여성이 ‘돈 내고 탔는데 무슨 소리냐’고 하자 노인이 ‘여긴 돈 안내고 타는 자리’라고 받아쳤어요. 며칠 전, 실제로 내가 식당에서 식사하다 들었어요. 주방 바닥에 앉아 배추 다듬는 두 아줌마가 이런 말을 주고받더라고요. ‘이번 아시안게임에 미국은 안 오나봐’ ‘삐졌나봐’. 아마 그 아줌마들은 실제로 모르고 그랬을지도 몰라요.”

-정치인 험담에 뒤탈은 없나.
“힘 있는 곳으로부터 70~80번 불려갔어요. 후배 코미디언 김형곤(1960 ~2006)이가 정치비판 많이 했어요. 그 친구하고 나하고 맨날 불려 다녔지요. 가보면 그 사람들도 그래요. 자기들도 재밌어 웃지만 더 이상 하지 말아달라고요.

-국회의원 선거 때 인기가 좋다고.
“내가 할아버지·할머니들에게 인기가 좋아요. 내가 가면 후보 얼굴 안보고 찍어줄 정도입니다. 1~2%포인트 차이가 나는 박빙 지역에서는 충분히 승부를 뒤집을 정도의 영향력이 있으니까 선거 때만 되면 나에게 부탁해오는 후보들이 많아요. 그런데 이 사람들이 당선된 뒤에는 전화 한통 없어요. 이제는 도와달라고 해도 안 도와줘요.”

-그동안의 수입도 상당하겠다.
“연예인들의 가장 큰 수입은 CF와 야간업소 출연이지요. ‘어린이의 영웅’ ‘병사의 영웅’ 이미지를 얻은 내가 그 일을 하기가 쉽지 않았어요. 평생 방송출연료로만 먹고 살았어요. 그동안 남을 위해서만 썼지 내 자신을 위해 돈을 모으지 못했어요. 노후대책도 해놓지 않았고요. 다행인 건 건강하니까 이제부터라도 나와 가족을 위해 돈을 모아야겠다는 생각을 해요.”

-부인이 재테크를 하지 않았나보다.
“집사람은 그런 거 몰라요. 나 만나고 나서 단돈 1만원도 자기 힘으로 번 적이 없으니까요. 대신 나를 위해 성당에 나가 기도는 많이 해줍니다.”

-인생의 힘든 고비를 어떻게 극복하는가.
“심장병 사건 충격으로 병실에 누워있는데 김수환 추기경이 찾아오셔서 ‘눈이 덮였으니 쓸지 말고 떠나라, 봄이 오면 눈이 녹고 너는 나타난다’고 말씀해주셨어요. 그 말이 늘 용기와 힘을 줍니다.”

-노인 대상의 프로를 10여년 했다.
“알람시계가 불티나게 많이 팔린다는 말까지 있었어요. 할아버지·할머니들이 일요일 새벽(6시10분)이면 내가 나오는 프로 ‘늘 푸른 인생’을 보려고 말이지요. 시골 노인들이 문화적 혜택을 거의 못 받고 있어요. 뽀빠이유랑극단 만들어 버스 한 대에 가수, 악단 싣고 마을마다 찾아다니며 그분들 즐겁게 해주고 싶어요.”

-100세를 바라보는 시대가 왔다.
“며칠 전 100세 생일잔치 사회를 봤어요. ‘어떻게 100세까지 사셨냐’고 묻자 그분 말이 ‘나도 모르게 백살이 됐다’는 거예요. 스스로 ‘나는 늙었다’며 씻지 않고 노인냄새 피우고 남 험담이나 하고 그러면 안돼요. 매일 비누로 깨끗이 씻고 향수라도 찍어 바르고 자기 관리를 잘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누가 어른이라고 공경하겠어요.”

이상용 씨는 “이 심 회장님의 노노 케어는 참 잘하시는 일이다”며 “노인이라고 앉아서 받아먹을 생각만 하지 말고 사회를 위해 봉사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씨는 또, “노인들이 어떻게 움직이고 노인들이 무슨 생각을 갖고 있는가를 알기 위해 ‘백세시대’를 꼭 읽는다”며 “기사를 통해 열심히 사는 노인들이 많은 걸 보고 나도 자극 받는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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