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과 젊은이가 더불어 잘 사는 사회 만들기 위해 연구해요”
“노인과 젊은이가 더불어 잘 사는 사회 만들기 위해 연구해요”
  • 오현주 기자
  • 승인 2014.09.26 11:31
  • 호수 43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경로당 회원 된 정운찬 전 국무총리

인생과 비슷한 점이 야구의 매력… 책 펴내고, 야구 중계 해설하기도
총리 시절, 287개 규제 없애… 박사학위 없는 국책연구원도 가능케 해

서울대 총장, 국무총리를 지낸 정운찬(67) 동반성장연구소 이사장이 노인회 회원이 됐다는 보도(백세시대 428호)는 신선하고 고무적이었다. 사회지도층 인사의 영입으로 대한노인회의 위상과 함께 경로당의 사회적 영향력이 높아졌다는 반증이기도 해서다. 정 이사장은 7월 10일, 거주 지역에 있는 대한노인회 서울연합회 서초구지회(지회장 박춘성) 래미안방배아트힐아파트경로당 회원으로 가입했다. 정 이사장은 경로당에 잘 나가고 있을까. 9월 어느 날, 서울 봉천동에 위치한 동반성장연구소에서 정 이사장을 만나 물었다.

-경로당에 자주 나가시나.
“사실 경로당 회원으로 가입한 이후 에는 가보지를 못했어요. 일이 바빠서요. 앞으로 책도 갖다드리고 시간 나는 대로 어르신들 찾아뵙고 안부도 여쭙고 할 생각입니다.”

-책이라면.
“총리 퇴임하고 나서 야구에 관한 책을 썼어요. 또, 동반성장을 주제로 한 책, 개인적인 삶을 되돌아본 책, 우리 연구소에서 주관하는 포럼을 게재한 책 등 여러 권 됩니다.”

-야구 책이라니….
“제가 야구를 아주 좋아합니다. 제 ‘버켓 리스트’ 중 하나가 메이저리그에서의 시구였는데 2년 전, 캐나다 토론토의 로저스센터에서 열린 토론토와 보스턴 게임에서 시구를 했어요. 꿈이 실현된 순간이었지요. TBS 교통방송 야구중계 해설을 맡은 적도 있고요. 올해만도 10여 차례 야구장을 찾았어요.”

-야구의 어떤 점이 매력인가.
“초등학교 4학년 때 동네 야구시합 중 플라이 볼 두 개를 받아내면서 처음 야구의 맛에 이끌렸어요. 경기중학 때 야구부원을 했고, 서울대 교수 시절엔 야구부 지도교수를 하기도 했어요. 야구는 1년에 100회 이상 게임이 많이 있고, 그 중에 질 때도 있고 이길 때도 있어요. 여느 경기 종목과 달리 시간제한도 없지요. 9회말 2아웃 3스트라이크에서 극적인 반전의 기회가 있다는 점들이 우리 인생과 비슷해요.”

-동반성장연구소는 어떤 곳인가.
“동반성장이란 말은 영어로 ‘쉐어드 그로스’(Shared Growth)이고, 더불어 성장하자는 의미입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빈부 간, 남녀 간, 국가 간 경제 성장을 저해하지 않는 선에서 분배를 공정하게 하는 일이지요. 연구소는 포럼을 개최해 동반성장 정책을 제시하고 동반성장 문화의 조성과 확산을 위해 일합니다.”

정 이사장은 총리 재임 시 한 중소기업인의 방문을 받았다. 그는 대기업의 납품가격 후려치기가 너무 심해 이민을 가고 싶다고 하소연했다. 총리실을 통해 조사한 결과 중소기업인의 말대로 구두주문, 기술탈취, 어음결제 등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불공정거래가 심각했다. 우리나라의 양극화가 극심하고 이대로 가다간 경제 더 나아가 사회 전체가 큰일 나겠다 싶어 이명박 전 대통령(2008 ~2013)에게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고 건의했다.
그 후 반관반민의 동반성장위원회가 만들어졌고, 정 이사장이 초대 위원장직을 맡았다. 동반성장연구소는 위원장을 그만두고 2년여 전 정 이사장이 만든 사단법인이다.

-동반성장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세 가지가 있어요. 먼저 초과이익 공유제입니다. 미국 할리우드에서 1920년대에 이미 나온 얘기에요. 최근 ‘명량’도 큰 히트를 쳤다고 하는데 감독과 배우, 조명 담당자 등 영화를 만드는데 기여한 이들이 예상보다 많이 올린 이익을 배분하는 겁니다. 대기업이 초과이익을 냈다면 납품가를 후려치기 한 중소기업에 이익을 나눠주어야 한다는 거지요. 시혜가 아니라 보상의 차원에서 말이지요.”

두 번째는 중소기업 적합업종 선정이다. 중소기업이 해도 잘 하는 건 재벌이 나서지 못하도록 막자는 의미다. 한 가지 좋은 예가 있다. LED 조명이다. 정 이사장은 “순천의 한 식당에서 LED업체를 운영하는 중소업체 사장을 우연히 만났다”며 “그 사장이 ‘동반성장 덕에 매출이 30억에서 40억으로 늘었다’며 고맙다고 밥값을 대신 내고 간 적도 있다”고 소개했다.
마지막으로 정부 발주를 대기업을 통하지 않고 중소기업에 직접 하청을 주는 것이다. 이 세 가지 정책으로 대기업에 흘러들어갈 돈이 스무드하게, 합리적으로 중소기업으로 흘러들도록 함으로써 중소기업이 투자하고, 생산·고용·소득이 늘어나 경제를 활성화하자는 얘기다.

-왜 동반성장을 하게 됐나.
“어릴 적부터 사회로부터 받은 도움을 돌려주고 싶었어요. 집안 사정이 넉넉지 않아 중학교 진학이 어려운 처지였지만 프랭크 스코필드 박사님(1889 ~1970)의 도움으로 경기중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어요. 스코필드 박사님은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에 헌신한 것을 비롯해 우리나라 근대화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국립묘지에 안장된 유일한 외국분이세요. 저에게 ‘한국의 빈부 격차를 줄이는 것을 일생의 과제로 삼으라’고 유언처럼 말씀하셨어요, 경제부총리를 지낸 대학은사 조순 선생님은 조화와 균형을 가르치셨고요. 경제학자 가운데 이걸 다루는 이가 별로 없어 하게 됐지요.”

-어린 시절 그렇게 가난했나.
“제 고향이 충남 공주군 탄천면으로 할아버지 대에는 뒷산에 올라 내려다보이는 곳이 전부 우리 집 땅이었다고 해요. 하지만 할아버지가 광산을 하다 망해 끼니를 잇기 힘들 정도가 됐어요. 가난을 면하려고 서울로 올라왔지만 초등학교 3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대학병원 병상시트 세탁 일을 하며 자식들을 키웠어요. 고등학교 때 입주가정교사로 들어가기 전까지 도시락을 싸본 적이 없어요.”

정운찬 이사장은 경기고·서울대 경제학과를 나와 미국 프린스턴 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컬럼비아 대 조교수를 거쳐 서울대에서 31년간 학생을 가르쳤다. 서울대 총장(2002~2006), 국무총리(2009~2010) 역임. 정 이사장은 세종시를 16차례 방문해 지역민들을 설득하는 등 힘겹게 세종시 수정안을 만들어냈지만 국회에서 부결돼 총리직을 물러났다. 동반성장위원회 위원장(2010~2012)을 지냈으며, 서울대 명예교수이다.

-서울대 총장으로서 기억에 남는 일은.
“제가 대학발전기금을 집 짓는 거 빼고는 현금으로만 1600억원을 모았어요. 지역균형선발제라고 해서 전국에서 고루 신입생을 뽑았어요. 지역간 동반성장을 위한 겁니다.

-국무총리로서 성취감이라면.
“김영삼 정부에서 도입한 대학입시 관련 ‘3불 정책’(본고사·고교등급제·기여입학제의 3가지 금지사항)을 없애고 대신 고교다양화·대학자율화·학력요건완화 등 ‘3화 정책’을 편 게 가장 기억에 남아요. 이걸 위해 8개월 동안 총리 회의실에서 학부형 대표, 상공회의소 회장, 교육 관련자들 20여명이 모여 하루 대여섯 시간씩 격론을 벌였지요. 조원동 당시 총리실 차관으로 하여금 287개 규제를 없애 고등학교 나오고도 취업되게 하고, 박사 학위 없이도 국책연구원 들어가도록 한 것도 성과 중 하나입니다. 누구처럼 겉으로 떠들썩하지 않게 조용히 많은 정책을 펼친 나를 두고 ‘실패한 세종시 총리’라고 하는 건 억울해요(웃음).”

-세종시 수도이전을 국민투표에 부쳤어야 했다.
“대통령 측근에서 국민투표하면 국론이 분열되고 레임덕 온다는 이유를 들어 반대했어요. 그거 안 해도 나중에 레임덕 왔지만서도요. 정치인들은 정당·정파만 따지고 국익은 안중에도 없었고 누구도 이 문제를 이슈화하지 않았어요. 수도 이전으로 인한 국정 효율성과 비용도 문제지만 그보다 심각한 건 중요 의사결정을 할 수 없다는 겁니다. 장·차관과 국·실장, 서기관 등이 한자리에 모이지를 못해요. 국방 문제가 터졌을 때 중요한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면 나라의 장래는 어둡다고밖에 말할 수 없어요.”

-학력차별에 민감하기도 하다.
“우리 형님이 인문고 나올 형편이 안 돼 공고를 나와 한전에 취직해 부장까지 올라갔어요. 학력 때문에 불이익을 많이 당하는 걸 옆에서 보면서 이건 안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총리와 총장 중 어떤 자리가 좋았나.
“서울대 총장이 훨씬 낫지요. 수준 높은 교수 1800명, 공부 잘하는 학생 2만5000명을 둔 기관의 장으로서 대학 발전을 위해 어떤 일이든 마음껏 펼칠 수 있거든요. 총리 자리는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지를 못해요.”

-김대중 정부에서도 입각 권유가 많았다고.
“경제수석, 부총리, 한은총재 등 여러 제의가 들어왔지만 가지를 않았어요. 우리 어머니 말씀이 ‘잔칫집에서 초대하더라도 세 번 이상 부르지 않으면 가지 말라’고 하셨어요. 두 번밖에 부르지 않더군요(웃음). 물론 나이도 50대 초반이었고 준비도 부족했었지요.”

-이명박 정부에서 총리가 된 배경은?
“대통령으로부터 여러 차례 권유가 있었고, 2009년 당시는 내 눈으로 봐도 한국은 위기였어요. 북한에선 핵실험을 했고 미국 발 금융위기로 우리 경제가 충격을 받은 데다 양극화가 극심했거든요. 내가 별로 잘나지도 않았으면서 끝까지 거절하는 것도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됐지요.”

-우리나라 노인 빈곤 문제가 심각하다.
“노인과 비노인 간의 문제도 동반성장으로 풀어야합니다. 노인에게 기초연금을 주는 건 정말 잘한 거지만 그만큼 비노인(젊은이들)이 세금을 더 내야하는 부담이 따릅니다. 그런 관계를 잘 풀어나가야 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