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여년 분단의 아픔, 전쟁의 상처… 소설 통해 알리렵니다”
“60여년 분단의 아픔, 전쟁의 상처… 소설 통해 알리렵니다”
  • 오현주 기자
  • 승인 2014.10.17 11:24
  • 호수 4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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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순회낭독여행 떠난 최고령 분단문학작가 이호철

인민군으로 6·25참전, 국군에 붙잡혔다 풀려난 후 월남해 문단 데뷔
한국어과 개설한 독일대학 초청 받아…“독일에 내 고정 독자 있어”

최고령 분단문학작가 이호철(82)씨는 요즘 해외에서 분단의 아픔을 알리는데 앞장서고 있다. 10월10~11월1일, 프랑크푸르트·본·베를린 등 독일 6개 도시를 돌며 자신의 대표작 ‘탈향’(1955) 낭독회를 진행 중이다. 함경남도 원산 출신의 이씨는 인민군으로 6·25 전쟁에 참전했다가 북진하는 국군에 붙잡혀 우여곡절 끝에 월남한 후 작가가 된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출국 직전 서울 불광동에 있는 작가의 아파트에서 만났다.

-어떻게 독일에 가게 됐나.
“첫 단편소설 ‘탈향’을 포함해 ‘큰 산’ ‘닳아지는 살들’ 등 내 대표작 15편의 소설을 독일어로 번역한 책이 지난 9월에 나왔어요. 그 계기로 한국어과를 개설한 독일대학들에서 초청을 한 겁니다. 그 전에 독일에 서너 차례 갔다 오기도 했고요. 내 고정 독자도 있습니다.”

-독일에서의 소설낭독은 어떤 의미인가.
“삶의 실제 국면을 실감나게 전할 수 있는 소설을 통해 우리 분단 현실을 알릴 겁니다. 독일 통일 과정에서 문학이 기여한 바가 큽니다. 그걸 배워갖고 올 겁니다. 현지 언론들과 인터뷰도 하고요. 떠나기 전 통일과 관련해 동독 작가들이 쓴 ‘동쪽지역 아이들’(야나 헨젤 작), ‘우리 같은 영웅들’(토마스 브루시히 작) 같은 작품을 읽기도 했어요.”

-문학이 어떻게 통일에 기여하나.
“정권에 있는 사람들은 상대 권력자를 직접 대면하면 독재하지 말라고 말을 못해요. 문학은 그게 가능합니다. 문학을 통해 더 이상 독재는 안 된다는 말을 하자는 겁니다.”

-독일 사람들의 반응은 어떤가.
“그 나라는 문학작품낭독회가 우리나라의 영화 시사회처럼 소규모로 자주 열립니다. 지난번 낭독회 때 현지의 주부들이 우리나라의 분단 과정이 자기네 나라가 동서로 갈라진 것과 비슷하다며 큰 관심을 보이더라고요.”

-분단의 아픔이 너무 크다.
“20년 전 쯤 러시아·멕시코의 방송사와 인터뷰를 한 적이 있어요. 그 사람들에게 ‘당신 앞에 앉아 있는 나란 사람은 원산과 서울이란 도시가 겨우 220km 떨어진 거리에 있지만 지난 40여년간 한 번도 가볼 엄두를 못 내고, 소식 하나 주고받을 수 없고, 어머니 아버지가 살아 있는지, 저 세상으로 떠났는지조차 모르고 지내오고 있다’고 했어요. 남북 간 휴전선이라는 것이 가로막혀 있기 때문이라고 했더니 엄청 놀라더라고요. ‘그 양쪽 권력이라는 것들은 대체 하루하루 무슨 일을 하고 있느냐, 요즘 같은 개명된 세상에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라면서요. 멕시코에선 원래 15분짜리 방송을 즉석에서 늘려 40여분이나 내보더라고요.”

-인천아시안게임 폐막식에 북한 고위급대표단이 방문했는데.
“저도 놀랐어요. 그 사람들은 늘 그렇듯이 충동적이지요. 워낙 이랬다저랬다 하니까 두고 봐야 해요. 5·24 조치를 푸는 문제도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합니다.”

-박근혜 정부의 대북정책을 어떻게 보나.
“북한과 관련한 어떤 정책이든 일회성으로 끝나지 말고 진정성 있게 관례화하자는 대통령의 말에 공감합니다.”

-남북 통일에 대해선.
“통일은 멀어요. 당장 되더라도 문제가 있고요. 북한 사람들이 이쪽으로 일시에 몰려오면 어떻게 감당할 겁니까. 중국이나 일본으로도 갈 텐데 그들 나라도 원하지 않을 겁니다. 물이 차오르듯 서서히 이루어져야 합니다.”

-물이 차오른다는 뜻은.
“통일을 이데올로기나 정치적으로 보면 너무 무거워요. 남북이 오고가고 권력은 비켜나는 식으로 자연스럽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말이지요. 면회소 설치가 하나의 방법일 겁니다. 5곳 정도 설치해 그곳에서 만나고 싶은 사람들 만나고, 그쪽에 돈·편지도 보내면 어떻게든 굴러갈 겁니다. 남북이산가족상봉 때부터 다른 거 복잡하게 하지 말고 면회소 이거 하나만이라도 설치했어야 했어요.”

-북한 내부에선 왜 정변이 일어나지 않는가.
“제가 해방 후부터 전쟁 나기 전까지(1945~1950) 5년간 공산주의를 체험했잖아요. 엄두도 못낼 일이지요. 박정희 권력이 무섭다고 하지만 거기는 그보다 5만배는 더한 곳입니다. 감옥 안이 세상 밖보다 살기 편하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으니까요.”

이호철 씨는 1950년 7월, 고등학교 3학년 재학 중 인민군에 동원돼 휴전선 넘어 경북 울진까지 남하했다. 전세가 뒤바뀌어 북진하는 국군에게 강원도 양양에서 붙잡혔다. 포로행렬에서 만난 작은 자형이 헌병에게 부탁해 풀려나 고향집으로 돌아갔지만 그 해 말, 중공군이 참전하면서 원자폭탄이 떨어진다는 소문이 파다해 그걸 피하기 위해 월남했다. 원산 선착장에서 미군의 LST(상륙수송선)에 몸을 실어 부산에 도착한 이후 부두노동자, 제면소(국수 공장), 미군부대 경비원 등 힘겨운 피난생활을 했다.
고교 시절 문학서클 활동을 했으며, 피난 와중에도 일본판 에세이집을 품에 넣고 다니며 읽을 정도로 문학에 심취했다. 부두에서 노동일을 하며 고향에 돌아가고 싶어 하는 실향민 청년들의 고단한 삶과 죽음을 묘사한 ‘탈향’으로 작가 황순원의 추천을 받아 문단에 데뷔했다.
1970~80년대엔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다. 1974년 명동성당에서 시국성명을 한 뒤 문인간첩단 사건에 엮여 국가보안법 혐의로 옥고를 치렀다. 1987년 6월 항쟁 당시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대표로 대통령 직선제 쟁취 성명을 주도하기도 했다. ‘판문점’(1961)·‘서울은 만원이다’(1966)·‘남녘사람 북녘사람’(1997)) 등 250여편의 작품을 발표했다.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이다.

-6·25 남침 당시 남한의 공격 때문이라고 북이 침략 명분을 내세우지 않던가.
“북에서는 두 달 전부터 전쟁을 준비했어요. 명분 따위를 말할 필요가 없었지요. 내 임무는 의용군을 관리하는 거였어요. 박격포 중대장 따라 따발총 메고 추석(9월6일)에 울진까지 내려갔어요. 강을 사이에 두고 국군과 대치하는 전선 멀리 떨어져있었던 관계로 나는 총 한 방 쏘지 않았어요. 미군기의 폭격에 수십 명이 처참하게 떼죽음 당하는 걸 바로 눈앞에서 보기도 했어요.”

-만약 월남하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제일 잘 한 일이 월남한 겁니다. 작품도 쓰고 10여개국에 내 소설이 번역돼 나온 것도 여기 있으니까 가능한 일들이지요. 북에 남았더라면 독재 타도 외치다가 정치범수용소나 악명 높은 ‘교화소’에나 갔겠지요.”

-집안은 어땠나.
“배 과수원을 하는 지주 집안이었어요. 아버지는 서울의 보성중학을 다녔을 정도로 인텔리였고, 북에선 마을의 동장이기도 했어요. 지주라는 이유로 빨갱이들에게 재산을 몰수당하기도 했지요.”

-북에는 누가 남아 있는가.
“고향을 떠날 당시 할아버지 부모님 형제들 모두 있었어요. 물론 지금처럼 영영 못 만날 줄은 상상도 못했지요. 14년 전, 남북이산가족상봉 때 운 좋게 북의 가족을 만났어요. 부모님은 다 돌아가시고 10세 아래 누이동생 하나만 남았더라고요. 첫눈에 그 동안 잘 컸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이후에 연락은 되나.
“제 딸이 상하이에 살고 있어요. 딸이 일본을 통해 누이동생하고 연락이 닿는가 봐요. 딸 편으로 돈도 좀 보내주고 그랬어요.”

-문인들의 정치참여운동을 주도했다고.
“1970년 초 생겨난 재야지식인연합체 민주수호국민협의회를 주도한 천관우 선생을 존경합니다. 민주주의 수호가 지상 목표였지요. 당시에도 좌파노선은 안 된다는 생각은 분명했어요. 대통령 직선제 쟁취하면서 저는 문학의 길로 돌아왔어요. 한국은 민주화의 길로 들어섰지만 북한은 여전히 독재 체제입니다. 북한의 민주화가 내 문학의 목표이기도 합니다.”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은.
“‘남녘사람 북녘사람’이에요. 국군 포로로 잡혔을 당시 얘기를 쓴 겁니다. 미국·중국·폴란드 등 10여개국에 번역돼 소개되기도 했어요.”

-건강은 어떤가.
“나이가 드니까 귀가 먼저 잘 안 들리더라고요. 다른 데는 별 이상 없어요. 동네 산을 규칙적으로 오르고 경로당에 나가 요가를 합니다.”

-경로당 회원인가.
“회원은 아니고, 경로당 위층에 요가교실이 있어요. 나간 지 20년이 넘었어요. 요가가 건강을 지키는데 도움을 많이 주는 것 같아요.”

-외로움이나 죽음에 대한 공포를 어떻게 극복하는가.
“잊어야지요. 거기에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만 어떤 식으로 죽느냐, 민관식 전 장관이나 황순원 선생처럼 잠자다 죽었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은 해봤어요.”

-요즘도 소설을 쓰는가.
“그럼요. 책, 신문 다 봅니다. 여든 넘어 쓴 소설이 ‘판문점2’ ‘가는 세월과 흐르는 사람들’입니다.”

82세 현역작가 이호철 씨는 “내 문학의 시작과 끝은 남북 문제이다. ‘탈향’에서 출발해 ‘귀향’으로 돌아가는 것이다”며 “북의 권력자 마음을 움직이는 소설 한 편 쓰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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