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가 종친회를 찾아가다] 의성김씨(義城金氏)
[명문가 종친회를 찾아가다] 의성김씨(義城金氏)
  • 관리자
  • 승인 2007.04.21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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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순수학문계승자 많이 배출한 명문

본지는 숭조(崇祖), 경로효친의 아름다운 전통을 계승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기획 특집 면을 마련했습니다. 이 지면은 해당 성씨·본관 대종회의 요청 순서에 따라 기획되며 본지 60호 ‘한국 성씨·본관 총괄 기획특집 기사에 이어 성주이씨(61호), 합천이씨(62호), 서림·서천이씨(63호), 광산탁씨(64호), 진주류씨(65호)를 게재했고 이번 호는 의성김씨(義城金氏) 편을 특집으로 꾸몄습니다.  최종동 편집위원


시조 의성군(義城君) 김 석(金 錫)이 경순왕의 몇째 아들이냐에 대하여 문헌마다 각기 다른 주장이 있다. 1974년 5월에 간행된 의성김씨 ‘청계공파세적’ 경사류방과 ‘문학공파보’ ‘사직공파보’등에 기록된 넷째 아들이 정설로 되어 있다.


의성김씨의 종택은 경북 안동에 있고, 성씨의 고향(중앙일보사간)에 의하면 의성김씨의 분파는 9세조를 분파조로 하여 5개 파로 나누어진다.


김용비의 후손이 첨사공파, 김용필의 후손이 수사공공파(守司空公派), 김용주의 후손이 충의공파, 김성단의 후손이 찬성공파, 김 흥의 후손이 선략장군공파로 나누어진다. 그 후 20세 이 후 280여 파종으로 늘어났다.


종손만 해도 수백 명에 달하여 종가와 대종회가 유기적인 모임은 갖지 않고 있으며 지역별, 문중별, 파별로 각기 자율로 재향을 모시고 있다. 다만 전체 의성김문이 함께하는 행사로는 1년에 두번 의성의 첨사공을 모신 오토재 춘향재향에 참석하고 있다.


전체 모임 주선이 어려운 점은 종택의 위상이 커지고 종인이 많아져 벌족인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대종회는 전체 종원의 화합과 조상을 알리는 한편 정신문화적 충효정신 주입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


의성김씨는 높은 관직에 있었던 사람은 많지 않고 이퇴계의 학문 계승자, 영남 유림의 학맥을 잇는 학봉(김성일) 선생 이후 학문에 전념한 인물들이 많아서 선비 집안임을 알게 한다.


학봉기념사업회가 주관하는 행사에는 의성김씨 뿐만 아니라 관심 있는 여타 문중도 많이 참석하고 있어 학봉선생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재력 있는 종인은 많지 않지만 조선조때 사림파를 연상할 만큼 순수 학문 계승자가 두드러진 점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법조계와 정치인도 상당수 있지만 특히 독립운동가를 가장 많이 배출한 문중이어서 ‘의성김씨를 빼고는 독립운동사를 말하지 말라’는 의성김문의 주장이고 보면 후손들의 자부심이 대단한 것을 알 수 있다.


수많은 독립운동가 중에서 두드러진 두 인물로 일송 김동삼과, 심산 김창숙을 들 수 있다. 김동삼은 1907년 고향에 협동중학교 설립, 1913년 만주에서 여 준·이 준 등과 부민단을 조직, 군인을 둔전제(屯田制)로 훈련하기 위해 백서농장을 개척했다.


그 후 임시정부에 관계하였고 노동국총판에 피선, 정의부 행정위원으로 활동하다 1931년 만주사변때 일경에 체포되어 1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마포형무소에서 옥사했다. 대한민국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이 수여되었다.


김창숙은 어려서 유학을 배웠고, 문장에 능했다. 1909년 성명학교 창립, 육영사업에 종사하고 을사오적매국성토상소사건으로 옥고를 치렀다. 3·1운동이 일어나자 해외 망명을 결심, 전국유림대표들이 서명한 한국독립을 호소한 유림단진정서를 휴대하고 상해로 건너가 파리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우송했다.


또 임시정부 의정원의원이 되었고,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다 경찰에 체포되었다. 출옥 후 중국으로 건너가서 신채호 등과 독립운동지 천고(天鼓)의 발행에 이어 박은식 등과 사민일보(四民日報)를 발간,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한편 서로군정서를 조직하여 군사선전위원장으로 활약, 손문과 교섭, 독립운동기금을 원조 받았다.


해방 후 민주의원을 역임하고 유도회 초대회장과 성균관대학을 창립, 초대학장에 취임하고 1952년 부산정치파동으로 테러를 당했다. 대한민국건국공로훈장 대한민국장이 수여되었다.
의성김문에서만 60여명이 독립운동으로 국가에서 수여하는 훈·포장을 수상했다.

 



역사속의 의성김씨 인물


조선조 96명 문과 급제 7명 봉군 배출


의성김씨의 시조 김 석(金 錫)은 김알지(金閼智)의 28세손 경순왕의 넷째아들이다. 고려태조의 외손으로 의성군(義城君)에 봉해졌기 때문에 그의 자손이 본관을 의성으로 삼게된 것이다.


고려와 조선시대에 군(君)에 책봉된 사람은 의성군 김  석(義城君 金 錫)을 비롯하여 김홍술, 김용비, 김용필, 김 굉, 김영열, 김광부 등 7명이나 되고 , 13명이 시호를 받았으며 공신, 청백리, 절의 등이 많이 배출되었다. 현세에 와서 김동삼·김창숙 등 걸출한 독립운동가를 어느 문중보다 많이 배출한 명문세족임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주요 인물은 다음과 같다.



▶고려조
시조 김 석, 용비, 용필, 용주, 굉, 영, 성단, 영열, 춘, 광부, 태권, 거두, 거익, 옥, 연 등


▶조선시대
제민, 안국, 정국, 우옹, 성일, 지수, 용, 구, 을방, 효손, 통, 한계, 세우, 희삼, 진 등

▶독립운동가
도화, 흥락, 하락, 대락, 동삼, 창숙, 붕준, 동만, 원식, 황 등

▷공신:김영열(태종조·2차 왕자란 3등공신)
▷문형:김영열(세종조), 김안국(중종조), 김성일(선조조), 김복일(선조조), 김정국(인조조)
▷호당:김영열(세종조), 김안국(중종조), 김정국(중종조), 김우옹(선조조), 김성일(선조조)
▷청백리:김안국(인조조), 김정국(인조조), 김우굉(인조조)
▷절의:김창숙(독립운동 및 순절제인)
▷명륜:(효행)김면항(증교관), 김필진(증호조참판), (열녀)김씨(가선 임언국의 처 정려)
▷문집:학봉집, 상례고증(김성일), 개암문집(김우굉), 이륜행실록, 여씨향약, 정속언해, 동몽선습(김안국), 동강집(김우옹) 등 다수



현대의 의성김씨 인물

정·재계 교육 언론계 등 활동 두드러져

김중위 대종회장(4선 국회의원, 초대 환경부장관)을 비롯하여 김재춘 전 대종회장(중앙정보부장, 무임소장관, 국회의원), 김용래(경기도지사, 총무처장관, 서울시장), 김창근(국회의원, 교통부장관)씨 등 각계에서 두각을 보이는 종원들이 많아 몇사람 소개하고자 한다.


현직 국회의원:김원웅, 김낙순, 김희선


전직 국회의원:김광준, 김명윤, 김삼조, 김종학, 김창근 김창환, 김충수, 김화남(경찰청장), 김진영(영주시장)


현직 대학총장:김영길 관동대총장, 김중순 한국디지탈대총장


현직 자치단체장:김도현 강서구청장, 김복규 의성군수


전직 대학총장:김호길 포항공대총장, 김한주 경기대총장, 김원섭 전북대, 경원대총장


그 외에도 교육계, 언론계, 군장성, 기업인 등 지면이 부족해 다 싣지 못할 정도로 다수가 있다.


 

의성김씨 세거지와 변천

안동 의성 성주 등 대규모 집성촌 이루어

‘을축보(乙丑譜)’에 의하면, 9세 김용비 이래로 관향인 경북 의성을 세장지지(世葬之地)로 삼아왔으므로 일찍이 의성에 터를 잡아 세거했다고 믿어진다.


김용비의 맏아들 김 의의 자손들인 복사공파는 13세 김거두, 김거익의 대에 안동·부여·영일의 청하·청원의 문의 등지로 가서 자리 잡았고, 다시 15세 김 진·김 원의 대부터 3대에 걸쳐 군위·수원·고창의 흥덕·청양의 정산·김해·보령의 감포·영천의 두협 등지로 산거해 갔다.


그 가운데 13세 김득수가 북청의 사동으로 유배되었다가 풀려난 뒤에 그대로 머물러 살았으므로 그의 후계가 북청에 세거했고, 16세 김부현의 부인 경주 최씨가 세 아들과 함께 고부의 도계리로 옮겨간 뒤 고부를 비롯한 정읍에도 일부 자손들이 뿌리를 내렸던 것 같다. 또한 16세 김의동이 장사로 유배되어 그 자손들이 고창 일대에 터를 굳혔던 것으로 보인다.


김 의의 아우 김 굉의 자손들인 부원군파는 김 굉의 증손 김 하·김 한·김 호의 대에 장성·강진·해남·광주 등지에 자리 잡았고, 일부는 김계환 이래로 황해도 신천의 문화 등지에, 17세 김국진 이래로 충주·해주 등지로 가서 살게 되었다고 믿어진다.


김용비의 셋째 아들이며 김 굉의 아우 김 영의 자손들인 찬성공파는 일부가 13세 김용초의 대부터 성주에 정착 세거했고, 일부는 고령으로 가서 살았다. 16세 김한경의 대부터 3대에 걸쳐 청송·괴산·합천·경주·전주 등지에도 자손들이 살게 되었다. 전서공파는 전북 정읍을 거쳐 안성 등 경기도 일원에 세거의 터를 굳혔던 것 같다.


한편 9세 김용필의 아들 김윤관의 자손들인 어사공파는 평남 평양을 거쳐 16세 김 경의 대 이래로 용강에서 살았고, 9세 김용주의 자손들은 개성에서 살다가 15세 김남보 이래로 충북 옥천에 자리 잡았다.


그리고 9세 김성단의 자손들은 선대부터 세거해온 의성에 많이 살았으며, 김 흥의 자손들인 선략장군공파는 능주를 거쳐 합천에 가서 살았다.


1930년 당시 의성김씨는 경기도 안성군·장단군 일원, 충북 옥천군 이원면, 괴산군, 음성군 음성읍, 충남 서산군 일원, 전북 정읍군 덕천면·이평면 일원, 경북 군위군, 의성군 단촌면·사곡동 등지, 안동군 임동면·일직면·서후면, 청송군 현서면·진보면, 영천군 북안면 일원, 영풍군 장수면, 봉화군 봉화면, 예천군 예천읍, 성주군 일원, 경남 진양군, 합천군, 평남 용강군 오신면·용강면, 평북 태천군 서면, 함남 이원군 등지에 집성촌을 이루었다.


특히 경북 성주군 수륜면 수륜리는 1980년 당시 의성김씨 130여 가구가 모여 살고 있는 곳이다. 입향조는 고려 말 호남 병사였던 김용초로, 조선 개국 후 조정이 어지럽자 금릉군 금항면 유촌에 낙향했고, 그 후 그의 후손들이 경북 일대에 흩어져 살았다.

 

수륜리에 터를 잡은 인물은 김용초의 5대 손인 서우당 김관석이다. 마을 중앙에 김용초를 추모하는 재실 원모재(遠慕齋)가 있다. 인근 대가면 칠봉동 출신인 독립투사 심산 김창숙은 그의 후손으로 아들 김환기·김찬기 등 3부자가 구국의 제단에 몸을 바쳤다.

 


 

■인터뷰 - 의성김씨 김 중 위 대종회장

30년 숙원 대종회관 건립에 온 힘

김중위 의성김씨 대종회장은 1939년 경북 봉화에서 태어나 초대 환경부장관과 한나라당 4선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지금은 몇몇 대학에 출강하며 수필가로 왕성한 문필활동을 하며 한편으로는 언론 매체에 칼럼을 기고하고 있다. “대종회장은 간판이고, 일은 사무총장이 다 한다”며 겸양하는 김중위 대종회장을 용산역 인근 의성김씨 대종회사무실에서 만났다. 김노현 사무총장과 대종회 임원들도 배석했다.

우리나라 성씨는 280여개에 이르고 본관도 4000개를 훌쩍 넘는다. 이 가운데 인구가 10만명을 넘는 성씨·본관은 그리 많지 않다. 그 연원이 오래인 성씨·본관의 인구가 많고, 본관별 지파도 복잡다단하게 갈린다. 의성김씨도 그 대표적인 성씨로 꼽힌다.


의성김씨 대종회 김노현 사무총장은 시조로부터 9세손에서 크게 5개 파로 구분하고, 시조로부터 다시 20세 손에 이르러 지파를 나누는 경우 280개 지파로 구분할 수 있다고 한다. 즉 전국 곳곳의 의성김씨 집성촌별 지파로 발전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는 얘기다.

 

그래서 의성김씨의 대표적인 종갓집으로 꼽히는 안동의 내압 종택이나 다른 지파별 종택들은 독자적으로 시제 등 파종회 행사를 주관하고 있다. 대종회가 종가와 유기적인 관계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지역 종친회별로 혹은 세거지 문중별로 중시조를 모시는 종가도 있다.


이에 대해 김중위 대종회장은 “전 종원들의 화합 단결, 이것이 주된 목적”이라며 “시조 할아버지의 산소가 있고 사패지가 있으면 뭘 좀 하겠는데 그런 부분이 없어요”라고 했다.


의성김씨 시조 묘는 북한에 있다. 워낙 파가 복잡하게 갈리다 보니 의성김씨 주요 종손간 모임도 쉽지 않다고 한다.


“종손이 전국에 퍼져 있고, 대부분 옛날 분들이에요. 모여서 할 일도 마땅히 없습니다. 그래서 모임은 지역 종친회를 중심으로 이뤄지지요. 일례로 수도권 의성김씨 종친회의 경우 인터넷 포털사이트 ‘다음 카페’에서 활발하게 커뮤니케이션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굉장히 많은 자료가 올라와요. 파종회도 내부적으로 들어가 보면 종갓집만 덩그러니 있지, 다 외지에 나가 있어요. 전국 곳곳에 이름난 집성촌이 이젠 다 도시로 떠났습니다.”

▶의성김씨 대종회가 가장 관심을 두는 숙원사업은 무엇입니까.

“특별한 것은 없어요. 셋방살이를 면했으면 좋겠어요. 30년 동안 셋방살이를 하고 있는데, 이 문제가 가장 시급합니다. 또 각 지역 장학생을 선발해서 대종회가 공부시켜 주었으면 좋겠어요. 최근 사람들의 인식 속에서 뿌리의식, 조상의식이 점점 사라지는데 우리 의성김씨만은 유서 깊은 집안답게 그러한 가치를 잃지 않고 회복시키는 일에 앞장섰으면 합니다.”

▶종친회관 마련 사업은 어느 정도 진전이 됐습니까.

“우리 집안이 벼슬 모르고 이재가 취약해서 사정이 여의치는 않습니다. 그런데도 지금 십시일반 후원하는 돈과 약정된 금액이 십 수억원에 이릅니다. 하지만 종친회관 건립을 위한 노력은 일석삼조의 효과가 있습니다.”

▶뿌리의식이 희박해지는 세태를 지적하셨는데, 의성김씨 대종회가 젊은 세대와 청소년의 숭조의식 함양을 위해 강조하는 내용은 무엇입니까.

“학문적으로 우리 집안은 중종 때 모제(김안국) 할아버지와 선조 때 김성일로 이어지는 대표적인 영남학파입니다. 모제 선생의 경우 중종 4현이냐 5현이냐 할 때 이름이 오르내린 분인데, 후손이 한미한 탓인지 오르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일제시대 김창숙?김동삼 선생으로 이어집니다. 이런 조상에 대해 어떻게 알리고 가르쳐야 할지 생각이 많습니다. 종친회관을 마련하게 되면 우리 종친회의 청소년 교육을 위해 이틀 정도 숙박하면서 이야기도 듣고 단합도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계획입니다. 부모들이 ‘대종회에 다녀오거라’고 말할 정도로 인성교육에 충실하고 숭조의식도 기르는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싶습니다.”

▶조선 사림의 대표적인 집안으로 훌륭한 문집도 많은데, 대종회가 족보나 문집을 발간하십니까?

“의성김씨의 인물 및 파별로 자체 발간하고 있기 때문에 문집은 따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의병활동과 독립운동을 하신 분들의 역사를 기록한 ‘의성김씨 독립운동사’만은 글 잘 쓰는 작가를 통해서라도 책으로 펴내고 싶습니다.”

조선조 중후기에 벼슬에 오르지 않은 사림파로, 학문적 전통은 있으나 현실 생활은 어려웠던 문중이 의성김씨라고 한다.


김중위 대종회장은 “영남 유림의 학맥은 퇴계에서 내압(학봉 김성일은 퇴계의 수제자)으로 이어지고, 의성김씨는 정치적으로 세력을 얻지 못해 벼슬로 별 재미를 못 봤습니다”고 했다.


대제학을 지낸 인물은 모제 김안국이었고, 임금이 불천위로 모시도록 해 영구히 제사를 지내는 등 의성김씨 인물 가운데 단연 두드러진 학봉 김성일도 벼슬로는 부제학이었다. 영남학파의 중심에 있었지만 학문과 가문의 전통만 우수했을 뿐 후손들이 세도가가 되지는 못해 현실 권력이나 부는 누리지 못했다는 것이 김중위 대종회장의 말이다.


“왜정 때는 더 심각했습니다. 몰락한 양반이라고나 할까. 독립운동을 한 사람들이 다 풍비박산 나지 않았습니까. 나도 학교에 가다가 할아버지한테 붙잡혀 ‘왜놈 될래!’하시는 호통소리를 듣고 자랐습니다. 그러니 우리 윗대는 현대 학문을 못해서 어디 명함을 내밀지 못할 정도로 사회적 지위에서 취약합니다. 독립운동하다 유랑생활을 한 것이지요.”


김씨 연합회에서 의성김씨 시조공을 두고 경순왕의 넷째냐, 다섯째냐를 놓고 의견이 분분하다. 이에 대해서는 어떤 견해를 갖고 있을까. 김중위 대종회장은 “우리는 넷째라고 입장을 정했습니다”고 답했다.


김 회장은 종친회원들에게도 한 마디 남겼다. 그는 “독립운동을 한 집안으로 의성김가 만한 집안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연고로 거의 몰락할 지경까지 침체를 겪는지도 모르겠습니다”며 “그래도 우리 조상들이 독립운동을 했다는 큰 자부심을 갖기 바랍니다. 한국독립운동사에서 의성김씨를 빼면 이야기가 안 됩니다. 우리 후세도 화합하고 연대해서 조상들이 이어온 자부심을 후대에 전수할 수 있도록 열심히 살았으면 합니다”고 당부했다.


박병로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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