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지는 노인상에 공감… 경로당에 나가 ‘노노케어’에 동참할 생각”
“책임지는 노인상에 공감… 경로당에 나가 ‘노노케어’에 동참할 생각”
  • 오현주 기자
  • 승인 2014.10.31 11:51
  • 호수 4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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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노인회 홍보대사 탤런트 태현실

영화· 드라마 총 200여편 출연… 대표작 ‘여로’ 있어 난 ‘행복한 배우’
돈·인기는 부질없고 가장 중요한 건 사람의 품성… 좌우명처럼 여겨

올해 ‘노인의 날’ 기념식장에서 탤런트 태현실(73)씨와 한 테이블에 앉았던 회원은 “노인회 나가니까 왕년의 톱스타도 볼 수 있고 좋구만”이라고 말했다. 태씨는 이날 대한노인회 홍보대사 자격으로 행사에 참석했다. 대한노인회 이 심 회장과의 인연으로 3년여 전 홍보대사 직을 맡아 활동해온 태씨는 “이 심 회장님이 역점을 두는 ‘노노케어’ 사업에 적극 동참하겠다. 경로당에 나가 의지할 곳 없는 노인 분들을 위해 봉사할 생각이다”고 밝혔다. 서울 동부이촌동 아파트에 사는 태씨를 부근의 한 커피숍에서 만나 홍보대사로서의 포부와 전성기 시절을 들었다.

-대한노인회 홍보대사로서 각오라면?
“옛날 노인들은 부양 받는 걸 당연히 여겼지만 이제는 시대가 달라져 생각도 바뀌어야 한다고 봐요. 100세시대라면 앞으로도 살날이 많잖아요. 노인도 사회를 책임져야 한다는 의식을 새롭게 가져야 한다고 봅니다.”

-여배우에게 나이 듦은 어떤 의미인가.
“제가 41년생이에요. 저도 이제는 노인입니다. 좀 더 젊었으면, 좀 더 인기를 누렸으면 하는 생각은 하지 않아요. 배우로서 전 행복한 편이에요. 대부분 활동을 많이 했더라도 기억해줄만한 작품이 없으면 묻혀버리는 경우가 많은데 제 경우는 다행히도 대표작(‘여로’)이 있으니까요.”
1972년 4~12월 방영된 ‘여로’(연출 이남섭)는 당시 최고의 시청률을 보인 KBS 일일연속극이다. 불우한 운명 속에 태어난 분이(태현실 분)는 가난에 못 이겨 험한 일을 하다 정신미약자 부잣집아들(장욱제 분)과 결혼해 자식을 낳지만 쫓겨나는 수난을 겪는다. 우여곡절 끝에 남편과 재결합하고 부와 행복을 찾는다는 내용이다. 이 연속극으로 태현실·장욱제씨는 최고의 스타로 부상했다.

-대단한 드라마였다.
“전 국민의 심금을 울린 기가 막힌 역할이었어요. 제구실 못하는 남편의 아내로서, 어머니로서 격동의 세월을 헤쳐온 여인 역이지요. ‘저런 며느리 얻어 봤으면…’ 하는 말을 많이 들었어요.”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라면.
“하루는 녹화 중인 스튜디오에 아주머니가 찾아와 내 손을 꼭 잡고 고맙다며 눈물을 흘리는 겁니다. 집 나갔던 며느리가 드라마를 보고 뉘우치고 집으로 돌아왔다는 거예요. 당시 지방의 영화관에 가보면 로비에 TV가 있었어요. 영화 보다가 ‘여로’ 방영 시간이 되면 로비에 나와 TV를 시청하는 사람도 있었을 정도였으니까요.”

-장욱제씨는 요즘 무얼 하나.
“그 분은 ‘여로’의 역할이 너무 강하게 남아 다른 드라마를 할 수가 없었어요. 뭘 해도 그 이미지(바보)를 지울 수가 없었던 거지요. 방송을 잠시 쉬겠다며 일반 회사에 들어갔다가 그대로 눌러앉았어요. 재밌는 점은 그분과 제 생년월일(11월11일)이 똑같다는 사실이에요. 주변에서 우리 두 사람이 결혼했다면 천재를 낳았을 거라는 농담을 하기도 했어요.”

-어떻게 배우가 됐나.
“인천여고 다닐 때 몰래 영화 보다 훈육주임에게 걸려 청소하고 그랬던 기억이 나요. 그렇지만 배우가 된다는 건 상상도 못했지요. 촬영감독이었던 가까운 오빠(태길성)가 저에게 배우가 돼보라고 권했어요. 최불암·김혜자·정혜선씨와 함께 KBS 1기생으로 연기자 길을 걷게 됐지요. 1963년 일이에요.”

-첫 작품은?
“드라마보다 영화를 먼저 했어요. ‘신필름’에서 제작한 ‘아름다운 수의’라는 작품이지만 히트는 하지 못했어요. 영화와 관련해 신성일 씨가 생각나네요. 당시 신필름에서 조명을 담당하며 빛을 보지 못하던 신성일 씨가 이 영화 남자 주인공역에 자신이 캐스팅 될 것으로 믿고 있다가 정작 다른 배우(이상사)가 선택되자 극동필름으로 자리를 옮겨 그곳에서 청춘물로 스타가 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어요.”

-가장 기억에 남는 영화라면.
“‘용서받기 싫다’란 영화로 신성일·엄앵란 씨와 같이 했어요. 첫사랑(태현실 분)을 잊지 못하고 헤매던 신성일씨가 첫사랑 여인과 닮은 여자(엄앵란 분)를 만난다는 내용이에요. 감독이 제 이미지를 연상시키려고 가짜 점을 만들어 엄앵란씨 눈썹 옆에 붙였어요. 엄앵란씨가 나중에 ‘덕분에 생뚱맞은 점까지 달았다’는 말을 하기도 했어요.”

-촬영장 에피소드도 많았겠다.
“한창 일할 때는 대여섯 작품을 동시에 찍었어요. 커다란 트렁크에 작품마다 입을 의상을 한꺼번에 담아 차타고 다니며 촬영했어요. 잘 먹지도 못하고 잠도 편안하게 못자고 샤워도 못한 상태로요. 그때 체중이 44~45kg였어요. 이틀 밤샘 촬영하고 나면 기절해버려요. 링거 맞는 동안 옆에서 제작부장이 기다렸다가 다시 저를 촬영장으로 데리고 가는 식이었어요.”

-인기가 어느 정도였나?
“가수 태진아(본명 조방헌)씨가 예명을 지을 때 잘 나가던 남진과 나훈아, 태현실 세 이름에서 한자씩 따 지었다고 해요. 태진아씨는 같은 동네에서 살아요. 제가 나가는 미용실에도 오는데 만나면 내 파마 값을 내주기도 해요.”

-돈도 많이 벌었겠다.
“당시는 출연 계약서 없이 모든 게 구두로 진행됐어요. 제작부장이 한손으로 가리고 다른 손으로 땅바닥을 향해 손가락을 펴 보이며, ‘미스 태, 이번엔 이거야 이거, 알지?’하면 그것으로 다에요. 손가락 하나가 10만원이란 뜻이지요. 나중에 돈을 받아보면 생각보다 적어요. 저는 손가락 5개로 알고 있었고 제작부장은 3개를 폈다고 우기고….”

-매니저 역할은 누가 했나?
“어머니가 스케줄 관리를 다 해주셨어요. 어머니는 팬들이 보낸 수많은 편지들을 다 보관해두었다가 크리스마스 때 제 사진과 사인을 넣은 답장을 일일이 보내주기도 했어요. 돈 관리도 어머니가 하셨지요. 저는 용돈만 타서 썼고. 촬영하느라 돈 쓸 시간도 없었어요.”
태현실씨는 이북 출신이다. 함경북도 성진이 고향이다. 1948년 부모 따라 월남해 인천에서 컸다. 집에서 목욕탕을 운영했다. 본명은 태복실. 남학생들이 ‘복실 강아지’라 부르며 따라다니기도 했다. 인천여중·고, 한양대 연극영화과를 나왔다. 1962년 KBS 공채 1기로 연기 생활 시작. 대학 출신 연기자가 드문 당시 ‘학사 여배우’로 스포트라이트를 받기도 했다.
‘길 잃은 철새’ ‘황포돛대’ ‘가짜여대생’ ‘홍콩의 왼손잡이’ ‘작은아씨들’(SBS) 등 200여편의 영화, TV 드라마에 출연했다. 청룡영화상 인기상(1964), 제13회 백상예술대상 비극영화상(1977) 등 수상.
인기 절정이던 28세에 조선소에 다니던 동갑나기 김철환씨와 결혼해 연기생활을 접었다가 3년 후 다시 안방극장으로 복귀했다. 부부는 남매를 두었다. 딸은 외국에 살며, 아들 내외는 최근 딸을 낳았다. 태씨는 “정신없이 손녀 돌보다 필드에 나가면 스윙 하는 방법을 순간 잊기도 한다”며 웃었다.

-전성기 때 연기 생활 중단이 쉽지 않았을 텐데.
“겹치기 출연으로 몸과 마음이 완전히 지쳤을 때였어요. 그 생활이 너무 힘들고 싫더라고요. 시집가서 그냥 편하게 살고 싶은 마음만 가득했지요. 신혼생활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어요.”

-스캔들이 한 번도 없었나.
“신성일·엄앵란씨하고 한 영화에 출연하던 중 ‘신성일이 태현실 때문에 바람이 났다’는 기사가 났어요. 어머니가 그 일로 머리 싸매고 눕고 난리가 났지요. 전 지금 남편과 교제 중이었고요. 남편이 어머니를 찾아와 걱정하지 말라고 안심시켜 드리기도 했어요. 물론 전혀 근거 없는 기사였지요.”

-어떻게 자기 관리를 했나.
“처음 배우가 된다고 했을 때 부모님의 반대가 심했어요. 나중에 어머니가 조건을 달아 허락을 해주셨어요. 어머니는 ‘여배우들 대부분이 해로하지 못하고 순탄치 못한 삶을 사는데 너만은 깨끗하게 살다간 여배우라는 말을 듣도록 모든 행동을 거기에 초점을 맞춰하라’고 하셨어요.”

-배우의 세계에서 지키기도 힘들었을 텐데.
“나라고 헤어지고 싶은 때가 없었겠어요. 그러나 참고 살아온 거지요. 주변에 이혼하고 혼자 사는 걸 보면 행복하지도 않더라고요. 그렇지만 헤어지고 또 재혼하는 삶도 괜찮다고 생각해요.”

-북에 납치될 뻔 했다는 얘기는 무언가.
“중국계 사람이 최은희·김희갑 선생님하고 나를 홍콩 축제에 초청을 했어요. 최 선생님이 먼저 갔고, 김 선생님과 나는 일이 있어서 나중에 가기로 한 덕에 북에 끌려가지 않았어요. 나중에 정보기관에서 알게 돼 신경 좀 써야 했어요.”

-배우란 어떤 직업인가.
“배우는 누구나 동경하지만 누구나 배우가 되기는 쉽지 않아요. 거지부터 여왕까지 다양한 삶을 살고 역할에 몰입하는 순간 보람을 느껴요. 어떤 배역이든 의미가 없지 않고 캐릭터마다 훌륭하다고 봅니다. 배우라는 직업은 정년이 없는데다 성취감도 느끼고 대우도 받아 참 좋은 직업인 거 같아요. 다시 태어나도 배우를 하고 싶어요.”

-요즘 어떤 이들과 만나나.
“영화배우 김혜정·전계연·정혜선 등과 어울려요. 연세대 언론홍보대학원에 나가 뒤늦게 공부도 하고요.”

태현실 씨는 마음 속 깊이 되새기는 좌우명을 소개했다. 미국 작가 헤밍웨이의 글 중 “명성은 아지랑이와 같고, 부에는 날개가 있고, 인기는 우연이며, 영원한 것은 당신의 겸허한 품성에 있다”는 말에 나이가 들수록 공감한다는 것이다.
태씨는 “나이 들면 인기고 돈이고 다 부질없는 것이고 오직 사람의 품성만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닫는다”며 “100세까지 건강하게 살려면 ‘일십백천만’대로 살라”고 말했다. ‘일’은 하루 한 가지 좋은 일을 하고, ‘십’은 열사람과 수다를 떨고, ‘백’은 100자의 글자를 쓰고, ‘천’은 1000자의 글을 읽고, ‘만’은 하루 1만보를 걸으라는 뜻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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