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돌 아랫목서 동네 어르신들이 해준 말들… 내 인생의 내비게이션”
“온돌 아랫목서 동네 어르신들이 해준 말들… 내 인생의 내비게이션”
  • 오현주 기자
  • 승인 2014.11.07 15:11
  • 호수 4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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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 눈의 전라도 촌놈’ 인요한 국제진료센터 소장

27차례 방북, 형님과 함께 결핵퇴치사업 지원… 요즘은 北의 새마을운동 도와줘
노인 자살률 1위는 한국의 본모습과 달라… 노인만 뽑는 회사 차리는게 소원

서울 세브란스병원 본관 3층 국제진료센터. 영어·러시아어·인도어가 뒤섞여 들려오는 가운데 인요한(55·미국명 존 린튼) 국제진료센터 소장이 불쑥 나타나 “이곳에서 하루 200여명의 외국인 환자를 진료한다”며 센터 한쪽에 있는 작은 진료실로 기자를 안내했다. 인 소장은 소파에 앉자마자 “노인의 나이를 올려야 해요. 요즘 일하는 분들도 얼마나 많고 액티브해졌는데요”라고 말했다. 연세대 가정의학과 주임교수이기도 한 인요한 소장은 우리나라에 4대째 살며 선교봉사와 진료, 후진 양성에 헌신하고 있다. 인 소장은 공개석상에서 “나는 전라도 촌놈으로 자랐고 동네 어르신들에게서 도덕을 배웠다”고 말한다. 그는 지금까지 북한을 27차례나 다녀왔다. 노인에게서 배운 도덕은 무엇이고, 왜 북한을 자주 드나드는지 물었다.

-어렸을 때 노인에게 무얼 배웠나.
“제가 전주에서 태어나 순천에서 컸어요. 당시는 전기가 오락가락하던 시절이었지요. 온돌방 아랫목에서 어른들께 벼는 언제 심고, 언제 베고, 장마는 어떤 영향을 주는 가에서부터 여순반란사건, 6·25 전쟁 얘기까지 다 들었어요. 한국인에게 가장 고맙게 받은 선물이 노인에게서 배운 도덕입니다. ‘사람이 그러면 못 써’라는 말이지요. 인생의 내비게이션입니다.”

-구체적으로 소개하자면?
“자주 놀러가던 동네 할머니가 계셨어요. 그분이 들려준 말 중 ‘남들이 너한테 실수를 했을 때 상대에게 함부로 면죄부를 주지 말고 너 자신을 지키라’는 말이 항상 머리에 남아 있어요.”

-어떡하라는 말인가.
“점잖게 있으라는 거지요. 다른 사람이 나에게 화를 내고 오해를 하더라도 함부로 반격하지 말고 참으라는 겁니다. 그 사람이 잘못을 뉘우칠 수 있는 기회를 주라는 거지요. 시간이 지나면 진실이 알려지는 법이니까요.”

인요한 소장은 사춘기 시절 동네 어른에게서 들은 얘기도 잊지 못한다고 했다. 그것은 손양원 목사(1902~1950) 얘기다. 일본의 신사참배강요를 거절해 5년간 옥살이를 했던 손 목사는 여순반란사건 당시 장남과 차남이 공산당원에 총살당하는 참혹한 일을 겪는다. 공산당원은 나중에 국군에게 붙잡혀 사형 당하기 직전이었다. 그러나 손 목사가 공산당원을 용서를 해주고 양아들로 자기 호적에 입적시키겠다고 해 살아났다는 감동적인 얘기다. 인 소장은 “손 목사는 기독교의 원칙과 사랑을 실천한 훌륭한 분이다”고 말했다.

-집안이 한국에 좋은 일을 많이 했다.
“우리 외증조부(유진 벨)가 1895년, 미국 남장로교 소속의 초대 선교사로 한국에 와 여성교육에 앞장서신 분입니다. 목포에 정명·영흥학교를 세우고, 광주에 숭일·수피아 학교를 세웠어요. 당시 여자들은 아예 교육을 받지 않던 시절이었지요. 그리고 할아버지(윌리엄 린튼)가 22세 때 한국에 들어와 3·1운동을 보고 미국 교계에 한국 사람들이 비폭력으로 일본에 맞서느라 너무 고생한다는 사실을 알렸어요. 신사참배 문제를 강력하게 반대하시다가 1940년에 추방되기도 하셨어요. 아버지는 전남 지역에 교회 600여개를 세우셨고, 어머니는 결핵퇴치사업을 위해 35년간 헌신하셨고요.”

인요한 소장은 순천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매곡동 짜니’ 하면 순천에서 모를 사람이 없을 정도로 개구쟁이였다고 한다. 미국 이름 존이 전라도 버전으로 짜니가 된 것이다. 어린 시절 개울에서 고기도 잡고 수박서리도 하고 겨울엔 쥐불 놓고 새해엔 세배하러 다니고 대보름엔 연 날리며 한국의 아이들과 똑같이 컸다.
대전외국인학교, 연세대 의대를 나와 미국 뉴욕의 한 병원에서 4년간 수련의를 했다. 대학 시절 문무대에 입소해 훈련을 받기도 했다. 1980년 5·18 민주화운동 당시 대학생 신분으로 광주에 갔다가 우연히 시민군 대표의 통역을 맡았다가 강제출국의 위기를 겪었다. 이 무렵 만난 연세대 치의예과생 이지나씨와 결혼해 1남2녀를 두었다.
현재 국제진료센터 소장이자 연세대 가정의학과 교수로 있다. 2012년 특별귀화로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 특별귀화는 대한민국에 특별한 공로가 인정된 자에게 허가하며 원래의 국적을 유지한다. 북한 결핵퇴치와 의료장비 지원사업 등 통일을 위해 기여한 공로로 국민훈장 목련장을 받기도 했다. 성 ‘인’은 린튼의 린에서 따왔다.

-정체성에 혼란은 없었나.
“늘 제 안에서 부딪치지요. 한국인과 있으면 미국 생각이 좀 이상하고, 미국인과 있으면 한국을 좀 멀리하게 되고… (수련의 과정 중) 정신과 돌 때 스스로 분석하는 시간이 있었어요. 결국 ‘이건 난센스다, 나는 나다’라고 결론 냈어요. 한국·미국의 문화가 각각 장점이 있는데 안에서 싸우는 거 그만 두고 ‘나는 나다’고 정리하자 편해졌어요.”

-스스로 한국 사람이라고 생각하는가.
“전라도 사람입니다. 왜냐면 우리 조상이 리 장군으로 대표하는 미국 남부 조지아주, 브레이브 하트의 스코틀랜드 사람입니다. 한국의 고향은 순천이고요. 세 곳 모두 공통적으로 한이 서린 곳입니다. 그렇다고 억울한 걸 풀기 위해 보복은 안됩니다. 김대중 선생이 대통령 취임식 때 감옥에 있던 전직 대통령들을 불러내 참석시키는 걸 보는 순간 눈물이 났어요.”

-한국의 어떤 점이 좋은가.
“한국의 정이지요. 영어로 딱히 표현할 수 없는 겁니다. 사회 환경면에서도 굉장히 살기 좋은 나라입니다. 정작 한국 사람은 모르고 있지만요. 치안도 잘돼 있고, 편리하고, 다만 정치적으로 시끄러운 게 좀 그런데 그것도 다 건강하다는 증거에요. 우리나라가 세계를 이끌어가는 강대국으로 발전하기를 바래요.”

-자녀들은 어떻게 교육하나.
“아무래도 미국식이 자유로우니까 그쪽을 따릅니다.”

-작년에 특별귀화를 받았다.
“일생에 가장 기쁜 일이었어요. 그 순간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아버지(휴 린튼) 생각이 났어요. 당시 구급차만 있었더라도 살아계셨을 텐데요. 아버지는 군산에서 태어나 맥아더장군과 함께 인천상륙작전에도 참가하셨어요.”

-한국에 구급차를 보급했다고?
“1984년 아버지가 순천에서 교회 짓는데 쓸 자재를 운반해오다 음주운전을 한 관광버스에 치였어요. 겨우 택시를 불러 광주에 있는 병원으로 가는 도중 돌아가셨어요. 정말 화가 났습니다. 1992년 뒤늦게 미국에 있는 아버지 친구 분들이 보내온 조의금으로 구급차를 한 대 만들어 순천소방서에 기증했어요. 그 뒤 독지가의 도움을 받아 미국·영국·일본 등지를 다니며 구급차와 응급구조 시스템을 살펴보고 한국형 구급차를 만들어 전국에 보급하게 됐지요.”

-북한은 왜 자주 들어가나.
“형님(인세반·미국명 스테판 린튼)과 함께 1995년 ‘유진 벨재단’을 만들어 대북인도지원을 많이 했어요. 처음엔 미국 내 한인동포의 후원을 받아 북한에 식량지원을 했다가 북에서 식량보다 결핵퇴치사업을 지원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그쪽으로 집중했지요. 요즘은 북한에서 새마을사업을 하고 있는 패트릭이라는 분을 도와주고 있어요. 그동안 대북인도사업을 했던 많은 NGO(비정부기구)가 대부분 실패했어요. 이유는 낚시대를 주지 않고 고기만 주었기 때문이에요.”

-북은 우리가 보내주는 쌀을 팔아 핵무기 만들고 전쟁 준비한다.
“무조건 돕자는 게 아니고 지혜롭게 도우면 됩니다. 개성공단은 성공적 사례입니다. 그런 식으로 도우면 서로가 윈-윈(win-win)입니다. 최근에 나진·선봉을 다녀왔지만 북한 사람들도 ‘중국·러시아와 경제협력을 많이 하지만 한국과 하고 싶다’고 해요.”

-노인 건강관리의 포인트는?
“오래 사는 게 문제가 아니라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게 핵심입니다. 노인 사망률이 높은 게 고관절질환 때문이에요. 뼈가 부러져 누우면 폐렴도 오고, 방광염·욕창도 생겨 합병증으로 사망해요. 뼈가 약해진다면 칼슘이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는 약을 먹으면 돼요. 암은 여전히 100% 완치가 어려워 예방과 조기진단으로 막아야 해요. 혈관 병으로 생기는 뇌졸중, 중풍 따위는 고지혈증 피검사 하나로 잡아냅니다. 적극적으로 검사를 통해 예방 관리하면 혈관 병은 피해갈 수 있어요.”

-노인 자살률이 심각하다.
“이게 한국의 진짜 모습이 아닙니다. 미국이 혁명적으로 바뀔 때가 1900년대 초였어요. 그게 왜 가능했냐면 ‘키친 스토브’(Kitchen stove) 덕이라고 합니다. 미국도 당시는 난방을 다 못해 부엌의 화목난로 앞에 온가족이 모입니다. 아이가 숙제를 하면서 형에게 물어보고 엄마 아빠가 거들어줍니다. 한국의 온돌방과 같은 겁니다. 그런데 요즘은 아이들이 자기 방에 들어가 문 닫고 게임하고 인터넷하면서 나오지를 않고 ‘방콕’을 해요. 아파트의 중앙난방과 ‘방콕’이 한국의 온돌방 문화를 날려버렸어요. 노인들이 자기가 필요 없는 존재라는 걸 느끼는 순간처럼 비참한 일은 없어요.”

-방법은 없는가.
“지난 대통령직인수위에 몸담았을 때 ‘세대 갈등’이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점이란 사실을 발견했어요. 북한의 정치가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가는 길이 험난하더라도 웃으며 가자’라는 구호가 마음에 듭니다. 앞으로 제가 하고 싶은 일이 65세 이상만 뽑아 회사를 세워 노인들에게 성취감과 존재감을 불어넣어주는 겁니다.”

인요한 소장은 “선대 선교사들은 한국에 대해 학교도 세우고 병원도 세우고 뭐 교회도 세우고 그랬지만 저는 의대 특별입학 덕에 의사도 됐고, 제일 젊은 부서장(국제진료센터)이 되고, 귀화 선물도 받는 등 늘 받기만 했다”며 “앞으로도 빚을 갚는 마음으로 한국을 위해 열심히 봉사할 생각이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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