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광고 모델로 돈 벌어주는 ‘로봇찌빠’ ‘도깨비감투’가 효자예요”
“영화·광고 모델로 돈 벌어주는 ‘로봇찌빠’ ‘도깨비감투’가 효자예요”
  • 오현주 기자
  • 승인 2014.11.14 14:33
  • 호수 4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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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관(寶冠) 문화훈장 수상한 만화가 신문수

올해 문화예술발전유공자 가운데 만화가 신문수(75) 화백이 보관(寶冠)문화훈장을 수상했다. 신씨는 1963년 만화계에 입문해 50여년 간 소년조선·어깨동무·보물섬 등 수많은 간행물에 어린이만화를 연재한 한국의 대표적인 만화가라는 이유로 훈장을 받았다. 1970~1980년 모두가 힘겹게 살던 시절 신 화백의 만화 캐릭터들은 웃음과 함께 꿈과 희망을 선사했다.
11월 초, ‘백세시대’에 ‘도덕골 만복이’를 연재하고 있는 신 화백을 경기도 분당 오피스텔에 있는 작업실에서 만났다. 표지가 낡은 만화책들이 벽면 가득히 꽂혀 있었고 사람 크기의 ‘로봇찌빠’도 한쪽에서 웃고 있었다.

-만화가로서 훈장을 받을 줄 알았나.
“옛날에는 감히 상상도 못한 일이지요. 당시엔 만화가를 사회의 악쯤으로 생각했어요. 아이들이 만화책만 보고 공부를 하지 않으니까요. 만화가란 직업도 잘 모를 때고요. 상을 받는 순간 ‘세상이 많이 변했구나, 만화가 예술로 대접 받는 세상이 됐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역대 훈장을 받은 만화가라면.
“‘고바우영감’ 김성환 선생, 박기정, 길창덕 등 몇분 돼요. 김성환 선생은 나를 만화가로 이끌어주신 분이세요.”

-그림에 소질이 있었는가 보다.
“천안중학교 다닐 때 서울에서 피난 와 미술을 가르치던 유천 김화경 선생(1922∼1979)이 계셨어요. 동경 미대를 나온 훌륭한 분이세요. 그분에게 동양화를 배우며 동양화가가 되려는 꿈을 키웠지만 잘 되지 않았어요. 서울로 올라와 중앙고등학교 다니며 혼자 만화습작을 했어요. 당시 ‘코주부’(김용환)·‘고바우영감’ 등을 따라 그렸어요.”

-대학 진학을 안 한 건?
“아버지가 공무원이었지만 다른 사업에 손을 대면서 크게 실패를 봤어요. 대학 진학할 형편이 안됐지요. 그때는 만화가 등용문이 독자투고 밖에 없었어요. 동아일보에서 시사만화를 그리던 김성환 선생이 독자투고를 받아 심사를 해 일주일에 두 번 신문에 발표를 했어요. 거기에 몇 번 당선이 됐지요.”

-당선작 중 기억에 남는 작품이라면.
“소방차가 불을 끄러 가는 장면을 그렸어요. 사이렌이 고장 나 마침 울고 있는 아이를 소방관이 사이렌 대신 머리 위로 들고 가는 내용입니다. 지금 같으면 ‘유아학대’라고 해서 말들이 많았겠지요.”

-당선작 상금도 있었나.
“그럼요. 300원으로 기억해요. 지금 돈 가치로 따지면 10만원 정도에요. 그 돈으로 먹물․도화지 사고 맛있는 것도 사먹고 요긴하게 썼어요.”

-대표작은 무언가.
“도깨비감투·로봇찌빠·포졸 딸꾹이·서울 손오공·원시소년 똘비·허풍이 등 열댓개 돼요. 도깨비감투는 1974년 ‘어깨동무’라는 어린이잡지에 2년 동안 실리면서 히트했어요. 나중에 소년한국일보에 ‘신도깨비감투’라고 해서 또 연재되기도 했어요.”

-도깨비감투, 로봇찌빠는 어떤 내용인가.
“기자만 모르지 대부분 압니다. 238종류의 귀신들과 맞붙어 싸워 수염도 뽑고 해서 그것으로 감투를 만들어 머리에 쓰면 투명인간이 됩니다. 로봇찌빠는 미국의 로봇회사에서 만든 로봇으로 코에 줌 기능이 있어 늘어났다 줄어들었다하고 머리 위에 프로펠러가 달려있어 날기도 해요. 두 귀는 레이더처럼 물체를 확인하고 소리를 수집하고요. 하루는 이 로봇의 두뇌회로가 약간 잘못돼 공장을 탈출해요. 태평양을 날아 한국에 있는 ‘팔팔이’라는 아이의 집에 숨어들어가 아이 몰래 숙제를 해줍니다. 그 후 둘이 아프리카에 가 식인종에게 잡아먹힐 뻔하고, 북한에 숨어들어가 할머니도 구출하는… 그런 내용이지요.”

-어디서 힌트를 얻었나.
“도깨비감투는 옛날부터 내려오는 설화가 있어요. 거기에 귀신 얘기는 제 창작이고요. 로봇찌빠는 순전히 제 창작이에요.”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던 때는?
“1975~1985년이에요. 당시 어린이잡지 7,8곳에 동시 연재하고 별책부록도 한꺼번에 서너 군데 했고요. 밤을 새며 그렸어요. 그때는 지금 만화가들처럼 글, 그림을 따로 하지 않았어요. 혼자 아이디어 내고 칸 긋고 연필로 데생하고 펜으로 그리고, 연필 선을 고무로 지우는 단순작업까지 다 혼자서 하던 시절이었어요.”

-수제자도 없었나.
“그런 것도 없어요. 정말 바쁠 때는 집사람이 배경 칠하는 건 도와줬어요. 우이동 버스 종점에 살던 땐데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어요. 석유로 등잔불을 밝혔지요. 하룻밤에 석유 1리터를 다 씁니다. 다음날 일어나보면 콧구멍이 시커멓게 그을려 있어요.”

-만화가는 결혼도 쉽지 않았을 텐데.
“맞아요. 다행히 집사람이 만화를 좋아했어요. 내 만화가 좋다고 팬레터 보내고 그러다가 가까워졌어요. 그때 제가 27,8살 때였는데 나보다 다섯 살 아래에요. 고등학교 때 육상선수였어요.”

-체격이 좋았겠다.
“체격이 좋은 게 아니라 쭉 뻗었어요, 키가 165cm거든요.”

-여자들은 대개 순정만화를 좋아하는데….
“당시 잡지를 사서 볼 정도면 수준 있는 겁니다. 대부분은 잡지 사볼 여유가 없어 만화방에서 만화를 보던 시절이었거든요. 제가 나중에 집사람에게 ‘당신, 선견지명이 있어’ 그랬어요. 내가 후에 유명하게 될 줄 잘도 알았다고요.”

-처가 설득을 잘 했나보다.
“장인 될 분이 ‘자네는 무얼 하는가’ 물어 ‘만화를 합니다’고 했더니 표정이 어두워져요. 사글세방 떠도는 신세가 자기 딸 데리고 가 밥이나 먹일까 걱정이 들었겠지요. 말을 주고받는 과정에 진실성이 보였고, 자기 일에 죽어라 파고드는 승부기질이 엿보였는지 승낙을 해 주었어요. 상당히 고마웠지요.”

-돈도 많이 모았겠다.
“요즘으로 치면 한달에 1천만원은 될 겁니다. 그렇지만 모으지는 못했어요. 제가 딸만 넷입니다. 동시에 두 아이가 대학에 다니고 나머지는 고등학교, 중학교 식이에요. 딸 하나는 피아노를 전공해 레슨비가 만만치 않았어요.”

-한동안 활동이 알려지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요. 2010년을 끝으로 모든 연재를 끝냈어요.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에서 발간하는 한국교육신문에 30여년 간 ‘만공선생’이란 제목으로 4컷 만화를 연재했는데 우리나라에서 최고 기록일 겁니다.”

-요즘은 ‘백세시대’에만 그리는가.
“제 그림을 좋아하는 분들이 많아요. B4 크기의 이 작품은 200만원을 받아요. 10년 전 체신부에서 제 도깨비감투 기념우표가 나왔어요. 기념우표를 집어넣고 다른 모습의 도깨비감투를 그려넣은 이 그림을 원하는 우표수집가들에게는 부르는 게 값이에요.”

-노후 걱정 없겠다.
“(로봇찌빠·도깨비감투 등을 가리키며) 쟤들이 효자노릇을 톡톡히 합니다. 이번에 로봇찌빠· 도깨비감투를 영화로 만드는 영화사에서 캐릭터 사용료를 저에게 주었어요. 얼마인지 아세요. 각각 5000만원씩이에요. 돈이 필요하면 생각지도 않은데서 전화가 와요. 기업에서 상품광고에 쟤들을 빌려달라는 거지요. 쟤들이 그냥 가나요. 전속 기간 끝나면 또 다른 데하고 계약하고… 운동선수처럼 말이지요.”

-친자식보다 효자다.
“그럼요. 사람은 배반하지만 쟤들은 배반도 안 해요. 마치 수타짜장면 뽑듯이 혼자서 남의 손 안 빌리고 자필로 그려온 것에 대한 보답을 이제야 받는구나, 그런 생각을 합니다.”

-만화가란 직업에 만족하는가.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으면 맘고생은 했지만 한 번도 만화를 그만두어야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어요. 다시 태어나더라도 만화를 그릴 겁니다.”

-언제 보람을 느끼나.
“내 캐릭터를 알아볼 때, 누군가가 ‘내가 어릴 적에 보던 거야, 선생님이 신문수씨예요?’라고 할 때.”

-건강은 어떤가.
“혈압·당뇨는 달고 살아요. 10여년 전 신장 하나에 생긴 암을 제거하고 난 후로는 괜찮아요. 이후 집사람 따라 교회에 나갑니다. 교회 주보에도 10년 동안 만화를 그렸어요.”

-노인을 위한 만화를 그릴 생각은?
“그리고는 싶지만 어디 팔리겠어요. 용돈 타서 생활하는 노인들이 만화책 살 여유 없어요.”

-노인 자살률이 높다. 만화로 노인을 위로한다면?
“전에 김문수 전 경기지사를 만났을 때 그 분이 ‘푸시킨’의 시를 좋아한다고 했어요.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노하거나 슬퍼하지 마라. 참고 견디면 기쁜 날이 오리니…’. 보세요, 그런 시에 제 캐릭터를 넣어 그림을 그렸어요. 이걸 액자로 만들어 수원역 같이 노인들이 많이 다니는 곳에 걸어두면 고달픈 그들에게 위안이 많이 될 듯해요.”

신문수 화백은 ‘백세시대’ 필자로서 매주 신문을 받아본다. 신 화백은 “대한노인회에서 하는 노노케어 그거 참 좋은 거다”며 “내 친한 동창이 최근에 마누라를 떠나보내고 90세 장모님을 모시고 산다”고 했다. 사위가 장모에게 ‘양로원으로 모실까요’ 했더니 장모가 ‘아, 자네하고 사는 게 좋네’ 라며 거절했다는 것이다.
“노인이 노인을 돌봐야 해요. 젊은이들은 처음엔 잘 하다가도 금방 화내거나 짜증냅니다. 스마트폰 카톡 사용에 대해 물어보면 귀찮다는 듯 건성으로 가르쳐줘요. 이해를 못해 다시 물으면 ‘노인이 그런 거 뭐 하러 배우냐’고 핀잔줘요. 노인이 나에게 물어오면 친절히 가르쳐 줍니다. 나도 힘들게 배웠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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