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을 고비 넘기고부터 내 몸 사랑이 가장 중요하다는 걸 깨달아”
“죽을 고비 넘기고부터 내 몸 사랑이 가장 중요하다는 걸 깨달아”
  • 오현주 기자
  • 승인 2014.12.05 11:47
  • 호수 4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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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경 딛고 일어나 논문 쓰는 조 순 전 부총리

‘한나라당’ 이름 내가 지어… 서울시장 때 여의도공원 등 공원 많이 조성
동네 경로당에도 자주 나가는 편… 고향 강릉의 경로당 현판 써주기도

한국 현대 경제학의 초석을 놓은 경제학자 조 순(87) 전 부총리는 학술원 회원이자 서울대 명예교수이다. 지난해 말 학술원 측으로부터 논문을 한편 써달라는 청탁을 받았다. 그 무렵 조 명예교수는 신우신염에 걸려 꼼짝을 못했다. 열나고 땀이 비오듯 쏟아져 하루에 내의를 7,8차례나 갈아입을 정도였다. 조 명예교수는 처음엔 도저히 글을 쓰지 못하겠다고 거절했다가 태도를 바꾸어 논문을 쓰겠다고 했다. 다행히 병마에서 벗어나 건강이 회복돼 현재 논문을 쓰고 있다. 지난 11월 초, 서울 봉천동에 있는 조 명예교수의 집을 방문해 당시 사경을 헤매던 순간까지 글을 쓰려고 했던 이유를 물었다.

-그 지경에서도 글을 쓰겠다고 했다니….
“글 쓰다 죽는 것도 학자다운 일이라는 생각에서 승낙을 했던 겁니다. 병원에서 주는 약 먹고 올해 2월 말 퇴원하고부터 조금씩 회복했어요.”

-지금은 좀 어떤가.
“상체는 아무렇지 않지만 다리가 힘이 없어졌어요. 한의원 다니고 그러면서 다리도 좀 나아지고 있어요. 그전까지는 당뇨병·고혈압 같은 거 없이 건강했지요.”

-논문 제목은 무언가.
“‘자본주의 경제의 지속적 발전을 위한 경제운영의 원리’에요.”

-경제학을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이게 경제학이다,라는 건 없어요. 경제학은 경제적인 사고방식일 뿐입니다. 경제학은 원래 정치경제학(Political economy)이었어요. 경제학은 결국 정치를 좋게 만들기 위한 겁니다.”

-우리나라 경제 사정이 안 좋다, 디플레이션 경고도 나온다.
“디플레이션 성향이 높게 나타나고 있어요. 물가는 오르지 않고 빚은 많고 돈 안 쓰고 투자도 안하고 고용도 안되는 게 꼭 일본의 1990년대와 같아요. 우리가 일본과 성향은 다르지만 경제 진행은 비슷해져요.”

-노인들에게는 어떤 영향을 주나.
“디플레이션이라고 노인들은 걱정할 필요 없지요. 노인에게는 소득이 문제인 데 정액소득을 얻는 이는 오히려 낫지요. 물가가 오르지 않으니까.”

-이자 수입에 의존하는 이들은 힘들다.
“방법이 없어요. 본인이 마음을 굳게 먹고 계획적으로 생활하는 수밖에요.”

-우리나라 노인복지가 제대로 안 돼 있다.
“자기가 일생에 번 것을 적든 많든 모두 자식에게 쏟아 부었어요. 선진국에선 그렇지 않지요. 자기 것을 먼저 확보하고, 나라에 따라 다르지만, 자식은 국가에서 대학도 보내주고 직장도 가지고 그러지요. 이제부터라도 노후 설계를 잘 해야 합니다. 건강도 중요해요. 자기 몸을 사랑해야 해요. 이번에 깨달은 겁니다. 최근에 가장 기쁜 일이라면 건강을 회복한 겁니다.”

-최근 ‘경제학원론’ 기념행사도 기쁜 일 아닌가.
“물론 그렇지요. 그 책으로 이 집도 샀고 아이들도 키웠으니까요. 교수 월급으로는 턱도 안됐어요. 지금까지도 조금이지만 인세가 나와요.”

조 순 명예교수는 1974년 당시, 제대로 된 경제학원론 책이 없었던 시절 처음으로 ‘경제학원론’을 펴냈다. 우리나라 경제학도들이 모두 이 책으로 공부해 국가경제발전의 이론적 토대를 세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책을 개정할 때마다 정운찬 전 국무총리 등 후학들이 공동저자로 참여했다. 지난 11월 7일, 전·현직 교수 100여명이 ‘경제학원론 발간 40년’ 기념행사를 치렀다. 지난해 10판을 냈다.
조 순 명예교수처럼 화려한 경력의 공직자도 드물다. 강릉 출생으로 서울대 상대를 졸업하고 캘리포니아대에서 경제학박사를 받았다.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1970~88)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1988~90) 한국은행 총재(1992~93) 서울시장(1995~96) 한나라당 총재(1997~98) 15대 국회의원(1998~2000)을 지냈다.

-다양한 경력 중 가장 애착이 가는 건?
“교수이지요. 20년 가까이 가르쳤으니까요. 서울시장도 재밌게 했어요. 성수대교 붕괴사고 나서 얼마 있다가 시장 돼 그거 수습하고 삼풍백화점 사고도 수습했고요. 여의도공원 등 공원을 많이 만들었어요. 당산철교도 세웠고요. 그때는 서울시 공무원들이 일을 열심히 했어요. 잘 따라주기도 했고요. 요즘도 그때 직원들을 가끔 만납니다.”

-서울시장 자리가 대통령 가는 길로 변질 돼가고 있다.
“그러면 안 됩니다. 제가 할 때는 정말 정당 생각 그런 거 하지 않았어요. 순전히 서울시민만 위해서 일했다고 말할 수 있어요.”

-정치에 몸담기도 했다.
“그때 외환위기 오기 직전인데 솔직히 지금 말하자면 저는 ‘이래선 안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자꾸 빚만 지고, 이걸 다잡아야겠는데 아무도 나서지를 않아요. 식자들도 입 다물고 있고 그래서 나라도 좀 나가봐야겠다, 그렇게 생각했던 거지요. 한나라당 이름을 내가 지었어요.”

-요즘 정치판을 보면 어떤가.
“우리나라 정치 이대로는 안돼요. 대통령제는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조간신문에 ‘미국 대통령제는 막장드라마다’고 썼는데 맞는 말이에요. 우리나라 대통령제도 막장드라마에요. 양당제 문제가 많아요. 당이 좀더 많아져야 해요.”

-왜 정치가 이 모양인가.
“두 가지가 안 돼 있어요. 좋은 사람 데려오기가 힘들고 그런 인물이 왔더라도 분위기가 안돼 있어요. 우리나라는 패거리에 속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못해요.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못해요. ‘나는 거짓말 하지 말아야겠다’고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안됩니다. 당의 사정에 따라 그 자리를 모면하고 그게 한두 번 쌓이면 원래 가졌던 뜻을 펴지 못해요. 저 역시 ‘내가 이래가지고 되겠나’ 그래서 정치 그만둔 거예요. 그리곤 다시는 여의도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어요. 여의도공원만 만들고(웃음).”

-헌재 심판 받는 통진당을 어떻게 보나.
“사실 전 통진당이 무얼 했는지 자세히 알지 못해요. 그 사람들이 뭘 조직해서 그런 거 했다지만 얼마나 했는지 잘 모르겠고요. 그러나 우리나라 사정을 봐서는 그런 당을 해서는 안되지요.”

-빈부·세대·지역 간 갈등이 크다.
“한꺼번에 당장 해결할 수는 없지만 방법은 있어요. 우선 그게 왜 생겼나를 따져봐야 해요. 경상도와 전라도 사이가 나쁘지 않았어요. 박정희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당시 집권세력이 정권을 유지하려면 저쪽 지역을 배제해야겠다고 해 생겼지요.”

-해결 방법은?
“교육에 있어요. 우리는 교육의 목적을 돈벌이에 두고 있어요. 세상에 우리나라 같은 교육은 없어요. 교육이 아니라 경제만 가지고 그러다보니 ‘교육은 제2의 경제’라는 말까지 나왔어요. 교육이 첫째인데도 말이지요. 인재를 키워야 해요. 인재는 뛰어난 사람이 아니에요. 책임감 있고 나름대로 능력을 써야할 곳에 성심껏 쓰는 사람을 말해요.”

-인생의 원칙이라면.
“세 가지 교육을 받았어요. 부모님에게, 일본인에게 그리고 미국사람에게 배웠지요. 소학교(초등학교) 때 일본 교사들이 한국학생들을 정말 열심히 가르쳤어요. 황국신민을 만들려고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성실하게 가르쳤어요. 지금도 그때 선생들이 가끔 생각나요. 미국에서 공부할 때 배운 건 ‘나는 내 생각대로 한다’는 겁니다. 누가 뭐래도 내가 생각한 대로 행동한다는 거지요. 자유와 자주를 배웠어요. 그게 제일 감명 깊었어요.”

-부모님에게 배운 것은?
“부모님에게 유교식으로 배웠어요. 성실한 거, 사람이 그것 외에는 없어요. 아버지는 조그만 자작농을 했어요. 자식을 위해 많은 희생을 하고 노력도 하고 그러셨어요.”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라면?
“경제기획원 장관 했을 때 빈부 격차가 벌어지기 시작했어요. 이거 굳어지면 안 된다, 좀 줄여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형평’이라는 말을 많이 썼어요. 그 때 부동산투기가 한창 성했지요. 그거 억제하고 형평 주장하고 그랬다가 사회 부유층하고 잘 맞지가 않아 결국 1년 남짓하고 그만 두었지요.”

-최경환 부총리의 경제정책을 어떻게 보나.
“어려울 때 맡았어요. 시대가 요구하는 게 성장을 하라는 거지만 그대로 하면 안돼요. 성장만 하려다 고용도 안 되고 경제의 피가 안돌고 멈추었어요. 솔직히 지금은 방법을 찾기가 어려워요.”

-무상급식·무상보육은?
“무상 안 해도 될 사람까지 주면 안 됩니다. 노인에게 신경을 더 많이 써야 해요. 최소한 살 정도는 만들어줘야 합니다.”

-공무원연금 삭감에 대해선.
“저도 연금생활자이지만 나라가 이렇게 되면 각자가 내핍을 해야 해요. 아일랜드가 그걸 잘했어요, 금융위기 일어나고 했을 때 그 나라 근로자, 공무원들이 2%씩 덜 받았어요. 그래서 다시 일어선 겁니다. 우리도 모두 2%씩 덜 받아야 해요.”

-경로당에 나가봤나?
“그럼요. 집 가까이 있는 경로당에 자주 나갔어요. 이게 어느 날 시니어클럽이라고 바뀐 뒤로는 나가지 않아요. 경로당이란 말이 얼마나 좋아요. 그렇게 바꾸면 안 되지요. 강릉 고향에 있는 경로당은 현판까지 내가 써주었어요.”

조 순 명예교수는 1시간 넘게 이어진 인터뷰에도 피로한 기색이 없었다. 조 명예교수는 1980년 당시 직접 지은 주택에서 살고 있다. 3살 연하 부인 사이에 둔 4형제가 교수, 의사, 기업인으로 훌륭히 성장했다. 조 명예교수는 “논문 다 쓰면 다시 새로운 책을 쓸 계획이다”고 강단 있는 학자의 면모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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