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곧 문을 열 것인데 한국은 통일 준비가 안돼 있어요”
“북한이 곧 문을 열 것인데 한국은 통일 준비가 안돼 있어요”
  • 조종도 기자
  • 승인 2014.12.12 13:52
  • 호수 4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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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원 2대째 섬기며 통일준비 하는 벤 토레이 신부

한국과 토레이 집안의 인연은 4대째… 부친 대천덕 신부는 예수원 창립
한국 교회가 하나 되는 게 중요… ‘삼수령센터’ 통해 통일 이후 연구할 것

예수원(Jesus Abbey)은 강원도 태백시 북쪽 산골짝 하사미동에 위치한 기독교 공동체이자 수도원이다. 일반적으로 수도원은 독신의 은자(隱者)들이 모여 영성을 훈련하는 가톨릭 기관을 가리키지만 예수원은 개신교의 초교파 수도원으로 기혼·미혼자들이 한 공동체를 이루는 게 특징이다.
지금은 태백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30분 정도 가면 예수원 마을에 도착한다, 1965년 창립 당시에는 사람의 발길이 거의 닫지 않는 오지였다.
버스 정류장에서 다시 10분 정도 걸어 오르면 예수원 입구가 보인다. 입구에는 “토지는 하나님의 것이라”는 성경 말씀(레위기 25:23)이 새겨진 표지석과 설립자 대천덕 신부를 기리는 기념비가 서 있다. 거기서 5~6분 더 오르면 예수원 본관이라 할 수 있는 시온 건물에 도착한다. 돌 벽돌로 아담하게 지어진 데다가 갈대로 엮은 지붕이 정감을 자아낸다. 산골짜기에서 휘몰아치는 12월의 칼바람을 맞아 아직도 얼얼한 방문객의 마음이 풀어진다.
벤 토레이 신부(64)가 있다는 사무실 문을 열자 좁은 신발장이 나타났다. 나무로 짜인 여닫이 문은 오랜 세월을 견딘 듯 낡은 모양새다. 다시 문 하나를 열자 벤 신부가 반갑게 맞이했다. 듣던 대로 푸른 눈에 당당한 풍채를 지녔고 온화한 옆집 할아버지 인상이다.

-예수원 건물이 고풍스럽다.
“내년이면 벌써 설립 50주년이니까요. 벽난로가 있는 첫 온돌방이 완성됐을 때가 기억나네요. 우리는 여러 해에 걸쳐 집을 지었고 계속 별채를 덧붙여 나갔습니다.”

-예수원이 만들어질 때 함께 했는지.
“1965년 7월부터 12월말까지 6개월간 부모님을 비롯한 창립멤버 10명이 천막생활을 했어요. 천막생활 중 눈이 세 번이나 왔지요. 저는 당시 15살 소년이라 대단한 모험이라고 좋아했고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한국과의 인연이 각별하다.
“한국에 사는 것은 3대째이고요. 증조할아버지 토레이 1세도 1924년에 한국에 오셔서 교회 부흥회를 인도하셨으니 4대째 인연이네요. 유명한 부흥사 D. L. 무디와 함께 일하기도 했던 증조할아버지는 1902년 일본 교토를 시작으로 중국, 호주, 인도 등을 다니며 기도운동을 벌였는데 원산의 하디 선교사를 위해서도 기도했다고 해요.”
그의 조부 토레이 2세는 1912년부터 중국 산동·제남에서 장로교 선교사로 활동했다. 1918년에는 부친(토레이 3세)이 태어났다. 국민당 장개석 정부를 돕다가 폭격을 받고 큰 부상을 입은 토레이 2세는 1952년 대전에서 자신의 경험을 살려 장애인 사역을 시작한다. 6.25전쟁에서 수류탄, 폭탄에 맞아 다친 일반인들을 치료하고 의수와 의족을 사용할 수 있도록 도왔다.
그의 부친 대천덕 신부는 1946년 성공회 사제 서품을 받고 성 미가엘신학원을 재건하기 위해 1957년 한국에 왔다. 벤 신부가 8살 때의 일이다. 대 신부는 신학생들을 강단에서 가르치는 것보다 노동과 기도의 삶을 영위하며, 기도의 실제적인 능력을 체험하는 실험실을 제공하고 싶었다. 대 신부는 강릉북부와 속초, 제주도에 이르기까지 전국의 여러 후보지를 물색했다. 마침내 땅을 찾았는데 그곳이 바로 현재 예수원 자리다.

-오랫동안 미국에서 살았는데.
“저는 미국에서 대학(사라 로렌스 대학)을 졸업하고 결혼한 뒤 1978년 1년간 아내(리즈 토레이)와 예수원에서 살며 수련자 과정을 거쳤어요. 그걸로 됐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미국에서 사역하고 있었고 한국에 돌아갈 생각은 없었습니다. 우리 집안은 ‘아버지 따라 가지 말고 성령님 따라 가야 한다”는 가르침이 전통이 돼 있어요.”
그는 1975년 미국 동방교회에서 목회자로 안수 받은 사제이면서 여러 기업에서 컴퓨터 프로그래머와 시스템 개발자로 일하기도 했다. 1994년엔 코네티컷주에 미션스쿨인 킹스스쿨을 설립해 2004년까지 이사장과 학장 등을 역임했다.

-생각을 바꾸게 된 계기는 뭔가.
“2002년 아버지 장례식장에서 한 성도가 어머니에게 전해달라면서 이런 말을 하는 거예요. ‘성경의 에덴동산에는 네 개의 강이 흐르고 있다. 그런데 삼수령에는 강 세 개밖에 없다’고요. 현재 예수원 목장이 있는 곳은 한강, 낙동강, 오십천의 발원지라 ‘삼수령(三水嶺)’이라 불리거든요. 그 말을 듣고 제가 ‘네 번째 강이 필요하죠? 북쪽에 흐르는 생명의 강 말에요’라고 대답했어요. 최근 알게 된 사실인데 그 성도는 1998년 아버지께 똑같은 말을 했고 아버지도 제가 한 대답을 했다는 거예요. 그 후 미국 학교 일에 바빠 더 깊이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제게 이상한 일이 생기는 거예요. 한 목사님이 아프리카 내전에 대해 설교하는데 저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기 시작한 겁니다. 갑자기 북한 사람이 생각났고 북한 사람이 불쌍해서 견딜 수 없었어요.”
다음날과 1주일 뒤에도 북한이 생각나며 또 눈물이 흘렀다. 그때부터 그는 기도로 하나님께 묻기 시작했다. “하나님 저에게 무슨 말 하려는 겁니까.”

-그래서 무슨 대답을 들었는지.
“북한이 얼마 안가 개방이 될 수 있는데 한국은 그걸 위해 준비가 안돼 있다는 겁니다. 그때 저는 깨달았습니다. 네 번째 강을 준비하는 게 필요하고 삼수령센터가 그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을요. 저는 아내와 주변 사람들과 기도를 함께 하면서 확인했습니다. 2003년 6월 예수원에 와서 통일준비를 위해 들어오겠다는 말을 전했고 예수원은 저에게 삼수령센터 추진본부장을 맡겼습니다.”
2004년 예수원에 터를 잡은 벤 신부는 북한 개방에 대비해 ‘네 번째 강 계획’을 시작했다. 그는 북한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다음 세대에 통일한국을 위한 성경적 토지법과 노동관을 가르치는 데 주력했다.
2010년엔 폐교된 하사미 분교를 빌려 기독 대안학교인 ‘생명의강 학교’를 시작했다. ‘생명의 강 학교’는 첫 고교 졸업생 배출을 앞두고 있다.
75년부터 운영해온 삼수령 목장에는 북한 개방 이후를 연구하는 삼수령센터와 공동체 마을, 청소년 수련원을 건립할 예정이다.

-삼수령센터에서 할 일은.
“통일이 된다 해도 사회통합이 되기까지 숱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삼수령센터는 한민족이 통일한국으로 가는 길을 가급적 순탄하고 건강하게 갈 수 있도록 준비하는 곳입니다. 이를 위해 남북한의 모든 연구가, 새터민들과 함께 통일 준비를 위한 컨퍼런스, 캠프, 워크숍 등을 개최할 계획입니다.”

-삼수령센터 건립은 잘 진행되는지.
“이제 때가 됐습니다. 재정이 부족하지만 다른 준비는 거의 돼서 내년에 토목공사를 시작하려 합니다. 이를 위해 ‘물위를 걸어가는 것’ 같은 믿음이 필요합니다.”
1차 공사비 53억원을 포함해 약 300억원에 이르는 사업비 마련은 아직 요원하지만 그의 표정은 밝기만하다.

-모금이 필요하지 않나.
“2002년 처음 삼수령센터로 부르심을 받았을 때 저는 ‘하나님! 돈 엄청나게 많이 필요합니다’라고 기도했어요. 그때 ‘나한테 돈 달라고 기도하지 마라. 너는 나의 일꾼이니까 필요한 건 다 마련해주겠다’는 대답을 들은 것 같아요. ‘그러면 무엇을 위해 기도하길 원합니까’ 물었죠. 그 대답은 ‘한국 교회가 하나 되게 기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돈 달라고 기도하지 않고 교회가 하나 되게 기도합니다.”

-통일에 대비해 무엇을 준비해야 하나.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교회가 하나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문화․언어 등 차이를 극복하는 실제적인 준비입니다. 통일 후 북한에 들어갈 때는 선교보다는 동질성을 회복하기 위해 들어가야 합니다.”

-통일 운동에서 예수원의 역할은.
“기독교만 해도 많은 북한 관련 기관이 있지만 서로 연결시키는 허브 역할을 하는 곳은 없습니다. 예수원은 초교파이므로 이러한 협력을 이뤄낼 수 있습니다.”

-북한을 어떤 시선으로 봐야 하나.
“북한은 악하고 완전히 실패한 나라입니다. 2008년에 직접 가서 봤어요. 그런데 금방 무너져야 할 것 같은데도 안 무너져요. 왜 아직 북한이 존재할까 의문이 생기죠. 거기에도 어떤 뜻이 있다고 봅니다. 남한이 하나 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겁니다. 하나 되길 시작하면 북한이 문을 열 것입니다. 햇볕정책으론 북한이 변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그냥 싸우면서 북한을 압박하는 것도 좋지 않아요. 압박을 가하면 마치 순교자나 된 듯 더 강하게 반발합니다.”

-자녀들도 한국에 관심이 있는지.
“큰 아들 르우벤은 한국서 태어난 직후 미국에 가서 어린 시절 기억은 없지만 한국에 대해 관심이 많아요. 고교 졸업 후 예수원에서 3개월 간 지원자 생활을 한 적이 있고 서울대 어학원에서 1년간 한국말도 배웠습니다. 미국서 목회자와 결혼한 딸 역시 예수원 생활에 관심이 많아요.”

-50주년 행사로 무얼 추진하고 있는지.
“내년 5월, 예수원에서 한 주간 공동체 세미나를 진행하고 아버지와 함께 일했던 분들과 가족들을 초청하려고 해요. 가을에는 서울에서 감사콘서트를 열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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