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 출신들의 다양한 경력, 재능 기부로 쓰이는 사회 만들어야 해요”
“군 출신들의 다양한 경력, 재능 기부로 쓰이는 사회 만들어야 해요”
  • 오현주 기자
  • 승인 2014.12.19 13:37
  • 호수 4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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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 김진호’ 회고록 펴낸 김진호 전 합참의장

1차 서해연평해전 승리 주역… 토지공사 사장으로 개성공단 준공식 치러
군 폭행자는 성범죄자 처럼 발찌 채워 사회에 나가서도 취업 못하게 해야

ROTC(학군사관후보생) 사상 군대 최고 계급인 대장과 군 서열 1위 자리에 오른 김진호(73) 전 합참의장. 1999년 6월 발생한 1차 서해연평교전을 승리로 이끈 주역이기도 하다. 김 전 합참의장은 최근 펴낸 회고록 ‘군인 김진호’(초록문)에 10·26, 12·12 등 현대사의 주요 고비와 관련한 증언도 적었다. 37년간 군복무를 마치고 전역한 후 한국토지공사 사장으로 개성공단을 준공했으며, 새천년민주당 안보특위 위원장,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안보 고문 등 국가 안보와 관련한 각종 자문에 힘써왔다. 지난 12월 중순, 김 전 합참의장을 만나 책에서 못 다한 이야기, 군대 폭행 근절책 등에 대해 물었다.

-합참의장에까지 오르리라고 생각했나.
“잘 하면 대령까지는 올라가겠지 했는데…. 군에서 스케이트선수로 활동했어요. 전역할 무렵 선수가 필요하다고 해 눌러 앉으면서 본의 아니게 직업 군인이 됐어요.”

-비결은?
“제 좌우명이 ‘솔선수범하며 최선을 다한다’에요. 주변에 도와주는 분들 덕분이지요.”

-10·26 당시 무얼 했는가.
“그 해(1979년) 부마사태가 나고 학생들의 반정부시위로 사회가 혼란스러웠지요. 저는 청와대를 지키는 30경비단의 부단장으로 단장(장세동 대령)과 번갈아 대기하고 있었어요. 그날은 단장이 대기하던 날이었어요. 퇴근하고 청량리 근처에 볼일 보러 갔다가 차에 켜놓은 무전기 연락을 받고 부대로 돌아갔어요.”

-사고 현장 궁정동 안가는 가 보았는지.
“그 지역은 우리의 작전통제구역으로 시간대별 순찰 경로에요. 총성은 났지만 내막을 몰랐지요. 단지 대통령과 관련된 유고 상황이란 것 밖에는요.”

-사고 현장은 어땠는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면 오른편에 문간방이 있어요. 거기에 경호처장과 경호부처장이 테이블 위에 엎어져 있었어요. 테이블 위에는 땅콩 안주와 양주가 있었어요. 안으로 들어가자 바닥에 탄피가 좍 깔려있고 차지철 경호실장이 총을 맞고 대자로 누워있더라고요. 차 실장이 수염이 많아요. 유난히 푸른 수염자국이 불빛에 비쳐 섬뜩한 느낌이 들더라고요. 그 모습이 한동안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았어요. 보안사 요원들과 한두 차례 현장을 더 갔었지요.”

-술자리 시중 들던 여가수(심수봉) 등 두 여인을 보았나?
“산 사람들은 이미 다 간 후에요.”

-사고 다음날 분위기는 어땠나. 북의 위협은?
“유고가 났으니 계엄선포 됐지요. 북의 특별한 징후는 없었어요.”

-12·12가 돌아오면 어떤 생각이 드나.
“사실 책에도 썼지만 그날 일은 잘 몰라요. 직전에 장태완 사령관이 새로 부임해 와 부대 생활개혁 한다고 하면서 위원회를 만들었어요. 제가 위원장이 돼 후암동에 나가 있었어요.”

-아군끼리 교전할 수도 있었다고 하던데.
“그날 30경비단으로부터 퇴근길에 본부를 다녀가라는 연락을 받았어요. 외부인사의 출입을 통제하라며 출입자 명단을 넘겨주었어요. 분위기가 살벌했고 장세동 단장은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았어요. 지금 밝혀진 것으로 보면 그 건은 12·12 참가자 명단이었지요.”

당시 김 부단장은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체포하는 과정에서 합수부와 수경사령관 간의 반목이 발생한 것을 알게 됐다.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경비단이 상부인 사령부와 충돌할 수도 있었던 극한 상황이었다. 참모차장은 사령부가 충돌하면 시가전 즉, 내전 상황까지 돌입할 수 있다며 사령부와 30경비단의 무력충돌인 군사행동 자제를 간곡히 설득했고 쌍방이 전투 부대의 기동을 자제하여 무력 출동은 발생하지 않았다. 김 부단장은 재앙을 피했다는 생각이 들자 안도감을 느꼈다고 한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쿠데타 조짐을 언제 알았는가.
“그런 건 몰라요. 정치적인 질문은 더 이상 노 코멘트.”

-군 시절 에피소드를 들려 달라.
“소대장 시절 후배 소대장들과 같이 보신탕을 먹었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그 개가 바로 연대장님이 키우던 개였어요. 연대 인사과장이 무릎 꿇고 빌라고 해 연대장 사무실을 찾아가 연대장님을 기다렸지요. 연대장님이 들어오시면서 ‘야 김진호, 너 왜 그러고 있냐’라고 하세요. 개 이야기를 했더니만 연대장님이 가만히 생각하더니 ‘알았다, 일어나 내려가라’고 말씀하고는 그 후로는 일체 말씀이 없어요. 불명예 전역을 예상했는데 용서를 해주신 거지요. 후에 전해들은 얘기로는 ‘후배들의 잘못을 선배라고 책임지고 나서는 자세가 보기 좋다고 생각하셨다’고 해요.”

-군 생활 중 힘든 부분은?
“전반적으로 군 생활은 힘들어요. 이사를 27,8번을 했어요. 결혼해 부부가 평생 동반자로 살아야 하지만 군은 떨어져 살아야 해요. 아이들 탈선할까봐 걱정도 되고 정상 가정을 유지하는 게 어렵지요. 평생 마음이 쓰였던 점이에요.”

-어떻게 극복했나.
“아이들의 외출시간을 전화로 보고하도록 했어요. 아들도 ROTC 마치고 장교로 갔어요. 아내가 각각 떨어져 군 생활하는 남편과 아들 뒷바라지 하느라 고생 많았지요.”

김 전 합참의장은 서울 전농동에서 태어나 고려대 사학과를 나왔다. ROTC 2기로 육군 보병 소위에 임관해 군에 입문했다. 1968년 군수장교로 베트남전 참전. 사단장, 군단장, 제2군사령관을 거쳐 1998년 합동참모의장 겸 통합방위본부장에 임명됐다. 1차 서해연평해전을 비롯 크고 작은 북의 도발에 강력 대응했다. 이듬해 10월, 전역 후 정계에 잠시 몸담았다가 한국토지공사 사장(2001~2004)을 역임했다. 현재 안보선진화포럼 이사장, 대한민국재향군인회 고문으로 있다. 대통령 표창, 보국포장, 인헌무공훈장, 미국 공로훈장 등 다수의 상 수상.
-1차 서해연평해전을 승리로 이끌었다고.
“당시 14분간의 쌍방 포격으로 북의 어뢰정 1척 격침, 경비정 반침, 경비선 4,5척이 대파됐어요. CNN 보도에 따르면 북한군인 30여명 사망, 70여명이 부상을 당했고요. 반면에 우리 군의 피해는 5명 부상으로 경미했다는 보고를 받았어요. 체제의 우월성이 전투 현장에서의 승리로 연결됐다고 볼 수 있지요.”

-우리는 선제공격은 못하나.
“우리 국방의 기본은 북의 도발을 막아 전쟁을 억제한다는 방어개념입니다.”

-남북의 군사력을 비교한다면.
“제가 합참의장으로 있을 때 남북의 화력수치는 0.8대 1로 우리가 조금 뒤진 상태였어요. 전쟁이 일어나면 처음엔 북이 우리에게 큰 타격을 입히겠지만 궁극적으로는 우리가 한미동맹체제의 작전지속능력을 가지고 있어 적을 궤멸시킬 수 있어요. 북의 핵무기만큼 걱정해야할 건 화학무기에요. 북은 국제화학무기금지조약에 의해 폐기해야 하지만 여전히 4천~5천 톤의 화학무기를 보유하고 있어요.”

-박근혜 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해선.
“잘 하고 있다고 봅니다. 북한은 일방적으로 우리에게 너무 무리한 요구를 해왔어요. 그걸 수용해주니까 북의 대남정책이 잘못 길들여진 겁니다.”

-부대 내 폭행 문제가 심각하다.
“군에서 때리는 아이가 어디서 왔나요. 별나라에서 온 게 아니에요. 밖에서 남을 때리던 아이가 군에서도 그럽니다. 군에서 남을 때리라고 가르치지 않아요. 군에선 폭행 못하게 감시를 하지만 소대장 하나가 40명, 중대장 하나가 150명을 어떻게 감시해요. 밤에 자다가 나가서 그러는데. 물론 군이 막아야 하겠지만 부모·학교·사회·국가도 책임을 같이 져야 해요. 때리는 거 형사처벌하고 성 범죄자에게 발찌 채우듯이 발찌 채우고 사회에 나가면 취업 못하게 해야 돼요.”

-군의 최고 책임자 처벌에 대해선.
“군에 잠시 가 있는 동안 일어난 일에 대해 어떻게 참모총장이 책임을 져야 하나요. 참모총장이 책임지라니까 은폐가 생기는 겁니다. (폭행)들키면 사단장 이하 모두 날아가게 되니까 숨기는 겁니다. 한 사람 때문에 군대가 쑥대밭이 되는 거예요. 피해를 당한 이는 안됐지만 거기서 잘라야 해요. 사단장은 몰랐잖아요. 사건 자체는 아래서 끝내야 해요.”

-전작권 반환에 대한 생각은?
“북과 대치하는 우리 환경에서 자주의 문제는 생존의 문제보다 후위에요. 김정은의 밑에 가 있으면 다 죽어요. 작전통제권이 우리에게 없는 게 아니에요. 한미연합사령관 마음대로 군을 빼고 박고하는 게 아니에요. 양국의 대통령, 국방장관, 합참의장으로 구성된 국가통수 및 군사지휘기구(NCMA)의 전략지시와 작전지침을 받아 행사해요. 작전 운영권을 준거지 지휘권을 다 준 게 아니에요.”

-한국토지공사의 적자, 방만 경영이 문제다.
“잘못된 사실이에요. 제가 토공 사장이던 2003년 내 연봉이 8500만원이었어요. 금융권의 부장급밖에 안돼요. 지금도 그럴 겁니다. 토공이 적자라는 건 정부 정책을 수행하면서 어쩔 수 없이 발생한 겁니다. 예를 들어 세종시 4000만평 개발에 땅값만 15조원이에요. 땅은 한꺼번에 샀지만 개발은 일부만 됐지요. 자산이 땅에 다 묶여 있어 그게 빚으로 남은 겁니다.”

-토공 사장으로서 기억에 남는 일은.
“개성공단 준공식이지요. 북이 원래 계약했던 땅값의 15배를 요구하는 등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을 비롯 토공 관계자들의 헌신적인 노고로 결실을 본 겁니다.”

-북은 최근 개성공단 임금 인상을 밀어부친다.
“말이 안돼요. 제가 임금을 5% 내에서 인상한다는 계약서를 썼는데요. 개성공단은 민간업체가 하도록 놔두어야 하는데 국가가 들어가니까 저쪽에서 생떼를 쓰는 겁니다. 그렇다고 북이 먼저 개성공단을 폐쇄하지는 못할 겁니다. 거기서 나오는 달러가 얼만데요.”

-군 출신들은 노후에 무얼 하나.
“그게 문제에요. 미국 같은 나라는 방위산업, 군 정책 분야 등 갈 데가 많은 걸로 알고 있어요. 우리는 군의 정치 관여 등 불행했던 과거사로 인해 군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이 깔려 있어 사회에서 재활용되는 면이 적어요. 군에서 쌓은 다양한 경력이 재능 기부되는 분위기가 만들어져야 한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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