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 살 줄 알고 유혹에 빠지지 않는 60~75세가 황금 나이”
“더불어 살 줄 알고 유혹에 빠지지 않는 60~75세가 황금 나이”
  • 오현주 기자
  • 승인 2015.02.13 10:41
  • 호수 4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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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白壽> 눈앞에 둔 철학자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30여년 연세대서 철학 가르쳐… 1960년대 쓴 수필집 100만부 이상 팔리기도
“행복하게 사는 나라의 국민들은 윤리적 가치로 사는데 우리는 그게 없어”

가난하고 힘들던 시절 사색적·서정적 에세이로 지친 영혼을 위로해준 김형석(95) 연세대 명예교수가 1세기 가까운 세월 동안 변함없이 삶의 지혜와 성찰을 전하고 있다는 사실은 경이롭고 축복할 만한 일이다. 1985년 연세대에서 정년퇴직 한 뒤 세인의 기억에서 사라지는 듯 했지만 실은 왕성한 사회활동을 하고 있었다. 김 명예교수는 “작년만 해도 일주일에 두 번은 지방대학이나 학술단체 등에서 강연을 했다”며 “조만간 책도 나올 예정이다”고 말했다. 지난 2월 초, 이화여대 후문에 위치한 카페에서 만나 2시간여 동안 가치 있는 삶과 죽음, 나눔의 행복에 대해 들었다.

-조만간 책이 나온다고.
“지금까지 내가 공부하고 성장하고 노력한 것이 있지 않겠어요. 축적된 지식을 나눠주고 있는 듯해요. ‘인생이여 행복하라’, ‘인생, 사랑의 나무를 키우는 것’ 두 권의 증보판은 곧 나오고 새로 쓰고 있는 책은 명년 안으로 발간할 겁니다.”

-새 책에는 어떤 내용이 들어 가는가.
“성숙된 인생을 보는 수필집이에요. 김태길 서울대 교수(1920~2009), 안병욱 숭실대 교수(1920~2013) 등 내 친구들에 대한 회고도 있고요.”

-안병욱 교수와는 가까웠다고.
“고향도 같고, 평양에서 학교도 같이 다녔고, 같이 철학을 공부했으니까요. 여든 넘어 서울대 선배 교수하고 셋이서 계절이 바뀔 때마다 만나 정담을 나누곤 했어요. 처음 만났을 때 안 교수가 우리를 보고 ‘왜들 다 늙었어’ 라며 3가지를 하면 늙지를 않는다고 했어요. 하나가 공부해라, 두 번째가 여행을 많이 해 호기심을 충족해라, 세 번째가 연애를 하라는 겁니다. 우리가 ‘그런데 당신은 왜 늙었느냐’고 되묻자 그이가 ‘연애를 못해서’라고 대답해 웃었던 기억이 납니다.”

-되돌아볼 때 가장 좋았던 나이는.
“80대 중반에 김태길 교수하고 만나 얘기하다가 우리 둘이 60~75세가 가장 좋았다고 회고한 일이 있어요.”

-왜 그때인가.
“젊어서는 뭔가 많이 소유하는 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나이가 되면 그런 게 행복이 아니고 더불어 살 줄 알고 무엇인가 사회에 기여할 수 있다는 게 행복이라는 걸 깨닫게 되지요. 성경을 읽다보면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달라고 하지만 그 나이가 되면 유혹에서 좀 벗어나고요. 지금 생각하면 60 이전은 좀 철이 덜 들었던 것 같아요.”

-나누어주면 행복해지는가.
“물질에 가치를 둔 사람은 많이 소유하고 뺏어 오려 하지만 정신적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은 나누어 주려고 해요. 정신적 가치로 화가는 그림을 주고, 시인은 시를 주고, 학자는 학문을 줍니다. 나를 통해서 더 많은 사람이 행복해집니다. 행복은 개인적이라기보다 인간관계에서 옵니다.”

-죽음을 어떻게 보나.
“죽음이 없다면 지옥일 겁니다. 병들고 고통스럽고 늙은이만 가득 찼다고 해봐요. 죽음은 하나의 아름다운 현상입니다. 육체적 고통은 겪더라도 정신적으로는 담담하게 받아들이자, 문제는 무엇을 남기고 가느냐, 그것이 숙제이지요.”

-몇 살까지 살면 좋을까.
“정신적으로 성장하고 다른 사람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줄 수 있을 때까지 사는 것이 가장 좋을 것 같아요.”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
“요한 바오로 2세가 남긴 유언이 ‘나는 행복했습니다. 여러분도 행복하십시오’에요. 그 말이 참 인상 깊어요. 종교인들은 내세가 있고 천당이 있다고들 하지만 그건 내가 어떻게 해서 되는 게 아니고 목사가 설교를 했다고 해서 갈 수 있는 것도 아니지요. 내가 살아있을 때까지 많은 이에게 도움을 주고 그것이 끝난다면 최선의 인생이 아닌가 합니다. 변종하 화백(1926~2000)이 말년에 뇌경색으로 몸을 못 쓰게 되자 의자에 몸을 묶고 그림을 그렸어요. 마지막까지 그림으로 주고 가려는 마음, 나도 그렇게 죽음을 맞고 싶어요.”

-신앙은 노인들에게 좋은가.
“일본 유학 시절 한국에서 일본을 가려면 부산에서 연락선을 타고 시모노세키로 가서 열차를 타고 동경까지 갑니다. 거기를 헤엄쳐 가라면 불가능하지요. 부산과 시모노세키 사이에 밧줄이 하나 있고 그걸 알고 헤엄쳐간다면 중간에 쉴 수도 있고 갈 수가 있지요. 신앙은 그런 겁니다. 신앙을 가지게 되면 그게 곧 인생관이 되고 가치관이 됩니다. 그것으로 인한 혜택은 큽니다.”

평남 대동군 출신의 김형석 명예교수는 숭실학교, 일본 조치(上智)대 철학과를 졸업했다. 1947년 월남해 중앙고 교사를 거쳐 1954~1985년까지 30여년 연세대 철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미국 시카고 대학과 하버드 대학의 연구교수를 지냈다. ‘철학개설’ 등 10여권 이르는 철학분야 서적, 10권에 달하는 종교학 분야 서적, ‘영원과 사랑의 대화’(1961) 등 40여권의 수필집 등이 있다. 국민훈장 모란장, 제1회 인제인성대상, 제6회 일송상 등 수상.

-‘영원과 사랑의 대화’는 지금의 50~60대는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다.
“그 책 서문을 출판사에 넘기고 외국을 다녀왔더니 유명해져 있더라고요. 그 책이 출판 역사를 새로 썼다고 해요. 당시 소설보다 많이 팔린 수필집이 없었다는데 가장 많이 나간 박태순 작가의 순애보소설의 10배를 넘었다고 해요.”
-몇부나 팔렸는가.
“자세한 건 모르지만 100만부는 넘었을 겁니다. 작년에도 2000부가 팔렸다니까요. 내가 젊었을 적 가난했어요. 그 책 인세로 집도 장만했고 6남매 자식들도 키웠어요.”

-책을 낸 계기는.
“그 무렵 중앙고 교사로 있다 연세대로 가게 돼 고민을 많이 했어요. 내 꿈이 사립고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거였어요. 중고등학교 교육이 정말 교육이고 대학은 학문의 전달이나 지식 창조입니다. 학생들을 정말 사랑했기 때문에 꼭 우리 아이들을 내버려두고 다른 데 가는 죄책감 같은 게 들었어요. 그래서 그 아이들과 대학교 1학년을 위해 해주고 싶은 말을 쓴 겁니다.”

-어떤 내용인가.
“고등학교 2,3학년이 되면 문제도 많고 방황할 때입니다. 어떤 길을 가야할지 모르는 그들에게 ‘인생을 성실하게 살자’, ‘아름다운 정서를 가져다오’ 두 가지를 부탁했어요. 그 책이 많이 읽힌 걸 보면 당시 아이들이 상당히 공허했던 거 같아요. 중앙고 제자들이 학교 졸업 후 군대에 가서 만나 모교 얘기를 하다가 서로 ‘너 김형석 선생 닮았다’는 말을 주고받았다고 해요. 오늘 낮에 제자 부부와 식사를 했어요. 그 제자가 헤어지면서 고마운 마음을 표시할 길이 달리 없다며 봉투를 내밀더라고요. 가만 보면 내가 사랑했던 것보다 그 아이들이 나를 더 사랑했다는 걸 느껴요.”

-철학은 어떤 학문인가.
“인생을 사는데 가치 있는 거, 진리는 무어냐 그걸 터득하는 거지요. 정치인도 그걸 모르니까 정치를 잘 못하는 거고 경제인도 그걸 모르고 돈만 벌면 되는 줄로 알아요.”

-우리 사회의 갈등이 심각하다.
“제일 낮은 사회는 힘이 지배하는 사회이고 그 위 단계는 법이 지배하는 법치사회에요. 정의와 질서가 있고 정치가 그걸 담당하지요. 그러나 법치사회, 민주주의는 인간답게 행복하게 사는 건 안돼요. 그 위에 또 하나가 있어야 해요. 철학적·학문적 가치, 도덕과 윤리적 가치, 예술과 아름다움을 위한 가치가 아래의 두 사회를 지배해야 합니다. 그게 선진국이에요. 우리는 법치사회까지만 오면 되는 줄 알아요. 세계에서 행복하게 사는 국가를 보면 윤리적 가치로 삽니다. 우리는 그게 없어요.”

-깊이 새겨들을 만한 글귀를 부탁드린다.
“강원도 양구에 저와 안병욱 교수를 기념하는 철학의 집이 있어요. 거기 도자기에 내가 한 말이 씌어 있어요. ‘나에게는 두 별이 있었다. 진리를 향한 그리움과 겨레를 위한 마음이었다. 그 짐은 무거웠으나 사랑이 있었기에 행복했다’.”

-존경하는 인물은.
“도산 안창호 선생에게 애국심을, 인촌 김성수 선생에게 대인관계를 배웠어요. 미국 LA 리버사이드라는 중소도시의 시청 앞에 있는 기다란 공원에 마틴 루터 킹 목사, 그 뒤에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 동상과 도산 선생의 동상이 있어요. 그곳의 오렌지농원에서 정말 열심히 일했던 젊은 안창호가 한국에서 민족적인 지도자가 됐다고 이를 기념해서 세운 겁니다.”

-건강은?
“지금은 혈압·당뇨병도 없고 건강하지만 어릴 때는 그렇지 못했어요. 오죽하면 어머니가 형석이는 스무 살까지만 살면 좋겠다고 하셨을 정도였으니까요. 나에게는 일이 첫째에요. 건강이 목적이 아니고 일하기 위해 건강해야 한다, 건강하기 위해서는 운동을 해야겠다고 생각돼 쉰 넘어 시작한 수영을 지금껏 해오고 있어요.”

김형석 명예교수는 수년 전 부인을 떠나보내고 연희동 단독주택에서 혼자 지낸다. 김 명예교수는 요즘도 정기적으로 3곳의 강의를 나간다. 교회의 바이블 클라스, 양구의 철학의 집 강의, 김 명예교수를 중심으로 하는 사회 모임 등이다. 글·사진=오현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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