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서 무상으로 받은 경비행기 항공대에 기증, 학생들이 비행기술 익혀”
“미국서 무상으로 받은 경비행기 항공대에 기증, 학생들이 비행기술 익혀”
  • 오현주 기자
  • 승인 2015.03.06 11:29
  • 호수 4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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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최초 여류 비행사 김경오

6·25 당시 경비행기 L-19 타고 후방 연락임무 맡아… 공군 대위로 예편
미국 여성 파일럿박물관에 ‘김경오 기념관’… 국제항공단체 통해 민간 외교

“전 아직 현역이에요.”
3월 초, 서울 퇴계로 ‘한국의 집’에서 만난 여류 비행사 김경오(81) 대한민국 항공회 명예총재가 한 말이다. 김 명예총재는 이날 존타클럽 이사회와 한일여성친선협회 모임 등 두 곳에 각각 장학위원장과 이사 자격으로 참석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최초 여류 비행사인 김 명예총재는 국제항공단체 활동을 통한 민간 외교와 국위 선양으로 여성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차별을 깨는데 크게 기여했으며, 우리나라 여성의 항공 분야 진출에 교두보 역할을 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앙드레김이 해준 유니폼을 차려입고 국내외 항공단체 및 여성단체 행사에 참석하느라 거의 매일 외출하다시피한다는 김 명예총재의 성공적인 삶과 꿈을 들었다.

-대외 활동이 여전한가 보다.
“제가 명함 3개를 들고 다녀요. 극동지역 여성항공연맹 총재에다 민주평화통일 자문위원으로 32년째 일하고 있어요. 존타클럽 한국지부를 창설해 과학을 전공하는 여학생들에게 장학금 주는 일을 하고 있고요, 여성단체협의회 회장을 두 차례(10․11대) 지낸 관계로 그쪽 일에도 관여해요.”

-마지막 비행은 언제인가.
“2009년 미국 오클라호마에서 세스나 경비행기를 몰았어요.”

-그 나이에 비행이 가능한가.
“전혀 문제없어요. 민간 비행사들은 비행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비행기를 타요. 일 년에 45시간을 채워야 라이센스가 유지돼요. 우리나라는 안보 문제로 자유로운 비행을 할 수 없어 늘 외국에 나가 렌트해 탔어요. 비행을 하면 보람도 느낍니다. 비행기술은 한 번 익히면 평생 잊어먹지 않아요. 그렇지만 자동차 운전은 못해요.”

-자동차 운전은 못 한다니 의외다.
“오토바이가 눈 깜짝 할 사이에 옆으로 획 지나가고 골목에서 차가 튀어나오고 무서워서 못 해요. 면허도 없어요. 배울 생각도 못했어요.”

-비행기를 조종하는 건 어떤 기분인가.
“커다란 기체를 다섯 손가락으로만 움직여 국경 없이 세계 어디든지 갈 수 있지요. 하늘을 정복했다는 자부심 같은 걸 느껴요. 동시에 1초의 방심으로 영원히 실패하는 인생이 된다는 것도 신중하게 여겨요. 비행기에 오르기 전 유서 많이 썼어요.”

-비행시간은.
“5000시간 미만이에요. 우리처럼 민간 조종사는 여객기 조종사와 달라 비행시간이 많지 않아요.”

-전투기를 조종해본 경험은?
“그거 타보는 게 꿈이었어요. 군에서 훈련은 다 받았고 애국심도 충만했지만 여자라는 이유로 전투기를 탈 기회는 주지 않았어요.”

-6·25 때는 무얼 했나.
“여자 조종사는 저 한 명이라 늘 시험 대상이었어요. 위에서 ‘저거 시켜봐라’ ‘이거 시켜봐라’ 그런 식이었지요. 당시 공군본부가 대구에 있었어요. 대구에서 정찰기 L-19를 타고 사천비행장을 경유해 강원도 횡성에 갔다가 돌아오는 하루 일정을 소화하곤 했어요. 연락임무지요.”

-전역 후 한 일은.
“미국 유학을 다녀온 후 전국의 중고등학교를 찾아다니며 항공 관련 강연을 했어요. 대한민국이 강한 나라가 되려면 항공과학·항공산업을 발전시켜야 한다, 젊은이들은 창공을 나는 비행사의 꿈을 가져라 같은 말을 하고 다녔어요. 당시 내 강연을 들은 학생 중에 후에 장관이 된 이도 있어요.”

평안북도 강계 출신의 김경오 명예총재는 해방 후 가족과 함께 남쪽으로 내려와 동덕여고를 다녔다. 이승만 대통령은 대한민국 건국을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여자 조종사육성을 계획했고 공군사관학교 1기생 모집 때 여자도 넣었다. 전국의 여고생 250여명이 시험에 응시했고 김 명예총재 등 15명이 뽑혔다.
그러나 나머지 여생도들은 오래가지 못했다. 입대 2년여 만에 다들 ‘결혼’, ‘대학 진학’ 등을 이유로 중도 하차했다. 김 명예총재는 무사히 사관학교를 졸업해 전쟁을 치렀고 공군 대위로 퇴역 후 미국 유학을 다녀왔다. 미국 오클라호마 세계여성파일럿박물관에 한국 여성으로는 유일하게 ‘김경오 전시관’이 마련돼 있다.

-끝까지 버틴 이유는?
“여자 한 명만 남게 되자 군에선 겉으로는 잘 대해주었지만 속으로는 귀찮아했어요. 참모총장도 저보고 ‘대학에 가라’는 말을 종종 했고요. 그런 여성에 대한 편견을 이겨내야겠다는 일념으로 여기까지 온 겁니다. 비행이 적성에 맞기도 했고요.”

-미국 유학은 어떻게 가게 된 건가.
“예편 후 미국에서 민간 항공을 연구하고 와 후학을 양성하라는 특명을 받고 노스캐롤라이나에 있는 길퍼드 대에 들어갔어요.”

-본인의 이름을 딴 기념관이 자랑스럽겠다.
“그곳에 태극기가 크게 걸려 있고, 군 시절 사진을 비롯해 인터뷰 기사 등 저에 관한 많은 자료가 진열돼 있어요. 정말 자랑스럽지요.”

-귀국 때는 비행기도 한 대 가져왔다고.
“교지에 한국에서 온 유일한 여성 조종사라고 소개되면서 하루아침에 유명해졌어요. 방송사 퀴즈프로그램에도 나가고 전쟁 강연도 다녔어요. 현지 언론에 제 이야기가 기사화되면서 기업에서 기부금을 주고, 한 경비행기 회사로부터 훈련용 ‘파이퍼 콜드’를 무상으로 받았어요.”

-그 비행기를 어떻게 했나.
“박정희 대통령이 저를 공군 대위 시절부터 알고 계셨나 봐요, 그분이 여의도비행장 대통령 전용기 옆에다 세워놓으라고 했어요. 공군에서 정비도 해주는 등 신세 많이 졌지요. 비행기란 게 자주 타주어야 해요. 할 일도 없이 여기도 갔다 오고 젖먹이 딸도 태우고 그랬어요. 그러다 남편이 ‘개인이 비행기를 갖고 있는 건 국민 정서에 맞지 않는다’고 했어요. 당시엔 비행기가 귀해 항공대 학생들이 비행기 한 번 못타보고 졸업할 정도였어요. 그래서 항공대에 기증을 했어요. 지금도 학교에 비행기가 남아 있어요. 분해돼 교육용으로 활용돼요.”

-젖먹이 딸이 유명한 이보영 영어강사인가.
“맞아요. 우유병 챙겨갖고 비행기에 태웠는데 아이가 새파랗게 질려버려 다시는 태우지 않았어요. 그 애가 고소공포증이 있어요. 지금도 비행기 잘 못 타요.”

-딸을 훌륭한 영어강사로 키웠다.
“일찍부터 외국의 국제대회에 참가하면서 영어가 중요하다는 걸 깨닫고 딸아이에게 미군 방송을 많이 듣게 하고 관심을 갖게 했어요. 그 애가 20년간 하던 생방송을 끝내고 최근에 이화여대 대학원 부원장이 됐다고 해요. 참 대견해요.”

-딸이 경제적으로 도움을 많이 주겠다.
“빛 좋은 개살구란 말이 있잖아요. 제가 꼭 그래요. 우리 딸이 방송에도 나가고 베스트셀러 영어책도 많이 내 돈을 많이 벌어 주변에서 재벌 딸을 둬 좋겠다는 말들을 해요. 그렇지만 딸에게 한 푼도 받아본 적이 없어요. 이번 설에도 세배하고 나서는 우리에게 세배 돈을 달라고 손을 벌리던데요(웃음).”

-남편 얘기는 알려져 있지 않다.
“전 어려서 군에 들어가 애국심으로 다져진 탓에 결혼 생각은 없었어요. 주위에서 그래도 면사포를 써봐야 하지 않느냐고 결혼을 종용해 경찰이었던 현재의 남편과 선을 보고 며칠 뒤 바로 식을 올렸어요. 남편도 경찰항공대를 창설하고 항공대장을 지낸 조종사에요.”

-건강은 어떤가.
“우리 부부 다 건강은 좋아요. 며칠 후면 우리 부부 결혼 50주년이 됩니다. 그런데도 각자가 자존심 같은 게 있어서 요즘도 사소한 걸로 하루도 싸우지 않는 날이 없어요. 그렇게 큰 소리로 다투며 사는 것도 건강에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웃음).”

-여류 조종사로서 업적이라면.
“나라마다 의무적으로 가입하는 국제항공연맹이라는 기구가 있어요. 유엔과 같은 거대한 조직이지요. 거기서 모형항공부터 우주항공까지 모든 항공정책을 다룹니다. 저하고 영국의 대표가 여성이에요. 이 단체가 1년마다 돌아가며 총회를 개최하는데 나라마다 유치 경쟁이 치열해요. 제가 2009년에 우리나라에 유치시켰어요. 올림픽 유치에 비유될 정도로 의미가 커요. 또, 김영삼 대통령에게 여성에게도 사관학교의 문을 개방하라고 간절히 부탁해 여성 입학이 실현됐고요.”

-생애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인물은.
“이승만 대통령이에요. 우리 여생도 15명을 경무대로 불러 ‘너희들이 우리 하늘을 지켜야 한다’며 등을 두들겨 주시곤 했어요. 미국 유학 시절 ‘공부 끝나면 거기 머물지 말고 한국으로 돌아오라’는 그 분 말 한 마디 때문에 죽어라하고 돌아왔어요.”

‘남북통일이 되면 고향인 북한 땅을 비행하는 게 꿈’이라고 밝힌 김경오 명예총재는 인터뷰 말미에 “노인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 있다”며 “과거에 비추어 현재의 나를 조명해 자신을 행복하다고 믿고 즐겁게 생활해야 늙지도 않고 건강하게 오래 산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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