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10여년 후 훈장… 내 이름 잊혀지지 않았다는 사실에 보람 느껴”
“은퇴 10여년 후 훈장… 내 이름 잊혀지지 않았다는 사실에 보람 느껴”
  • 오현주 기자
  • 승인 2015.03.13 11:06
  • 호수 46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기상 전문가 김동완

1970년대 폭발적 인기… TBC와 KBS 백지수표까지 걸고 스카우트 경쟁
국회의원 선거 출마했다 40여년 모은 재산 몽땅 날리고 아내는 실명까지

구수한 경상도 억양으로 매일 밤 일기예보를 들려주던 기상 전문가 김동완 (80)씨는 여러 가지 기록을 가지고 있다. 국립기상기술원양성소 1기 출신의 기상 전문가로 처음 정규 방송을 진행했고, ‘체감온도’라는 기상 용어를 가장 먼저 소개했으며, 최초로 일기도를 직접 그리며 예보를 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사실은 그로 인해 우리나라에 기상 캐스터란 직업이 새롭게 등장했다는 점이다. 김씨는 “물론 제가 아니더라도 시대의 요구가 있었겠지만 그나마 역할을 제대로 한 덕에 기상 캐스터의 등장을 10년은 앞당겼을 것”이라고 말했다.
2006년 이후 처음으로 서울에 한파주의보가 내려진 3월 초, 김씨에게서 40여년 날씨와 함께 웃고 울던 이야기를 들었다.

-꽃샘추위치곤 너무 춥다.
“이때가 봄으로 들어가는 계절이에요. 기상학적으로는 시베리아 고기압 세력이 약해지다가도 다시 세력을 뻗칠 때가 있어요. 우리나라 기후가 원래 그런 겁니다. 우리 맘속에는 봄이 들어와 있지만 날씨는 겨울이니까 더 춥게 느껴지는 겁니다.”

-체감온도라는 말을 처음 썼다고.
“이전에는 그런 말을 쓰지 않았지요. 바람이 강하면 강할수록 체감온도는 더 떨어집니다. 체감온도는 아무렇게나 정하는 게 아니고 계산법이 따로 있어요. 이제는 손을 놔서 기억이 안나지만요.”

-직접 일기도를 그리게 된 배경은.
“방송국 아나운서가 기상대의 예보를 받아 전달하다가 산업화가 진행되고 날씨의 중요성이 인식되면서 기상대 직원이 직접 방송을 하게 됐지요. 그 일을 맡게 된 저는 뭔가 차별을 두어야겠다는 생각에서 시작한 겁니다.”

-일기도 그리는 게 결코 쉽지 않았을 텐데.
“일기도란 게 참 묘하더라고요. 그걸 보고 날씨를 점치니 일종의 점판인 셈이에요. 그게 신기해 혼자서 열심히 따라 그리다보니 숙달이 됐어요. 등고선을 그리면 어떤 때는 인체의 중요한 부분처럼 보이는 경우도 있어요. 그러면 제가 ‘오늘 일기도 모양이 조금 이상하네요, 이상하면 어떤가요, 날씨만 맞으면 됐지요’라고 했어요. 그런 멘트가 먹혀들어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어요.”

-신선하기도 했다.
“하루는 서독대사관 직원이 제 녹화 장면을 무비카메라로 찍는 겁니다. 자기가 세계 각국을 돌아다녀봤지만 일기도를 직접 그리는 건 처음 본다며 자국의 기상대 직원들에게 참고로 보여주겠다고 하더라고요. 일본 아사히신문도 ‘덴기노 오지상’(날씨의 할아버지)이란 타이틀로 3회 소개한 적이 있어요.”

-어떻게 기상대에 들어가게 됐나.
“제 원래 꿈은 교사였어요. 고등학교 졸업 무렵 가정형편이 어려워 대학진학을 못하고 군대를 다녀왔어요. 대학입학시험을 치르기 전 우연히 국립중앙관상대 직원 모집 공고를 보고 실력을 한 번 테스트해보자는 마음에서 응시했는데 다행히 붙었어요. 주위에서 선생이나 관상대 직원 모두 국가 공무원이고 오히려 후자가 더 나을 수도 있다는 말을 해 눌러 앉은 거지요.”

1935년 경북 김천 출신의 김동완은 대구공고를 나와 서울역사박물관 부근에 있던 국립중앙관상대에 들어갔다. 1959년의 일이다. 김씨는 나중에 설립된 초급대학 수준의 국립기상기술원양성소에서 기상학을 정식으로 배웠다. 1965~1997년 32년간 TBC· KBS ·MBC에서 ‘예보관’ ‘통보관’ 등으로 불리며 기상 전문가로 이름을 날렸다. 방송국끼리 그를 스카우트하는 과정에서 백지수표까지 등장했다. 2010년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상했다.

-1960년대 기상예보는 어땠나.
“일상생활에 날씨를 별로 따지지 않았고 기상대는 한직으로 여길 때지요. 제대로 된 구름사진도 없고 기상 레이더도 없었던 시절이에요. 겨우 일본 동경지역센터로부터 정보를 얻었지만 ‘쓰레기’ 수준이었어요. 관상대 들어가 처음 배운 게 모르스부호에요.”

-군에서 사용하는 모르스부호라고.
“나라마다 글이 달라 기상 전문은 세계적으로 통일을 시켰어요. 예를 들어 한국과 일본은 47, 중국은 땅이 넓어 50, 51, 52 등 숫자로 지역을 구분해요. 서울은 108, 하늘을 다 덮는 구름은 8, 서풍이면 27이에요. 그러니까 4710882710하면 서울 하늘 전체가 흐리고 서풍이 10노트로 분다는 뜻이에요. 이걸 모르스 부호로 받는 겁니다. 처음엔 무척 힘들었어요.”

-생활기상이란 게 무언가.
“단순히 날씨만 전하는 게 아니라 생활 속 기상 얘기를 한 겁니다. 가령 오늘같이 바람이 세게 부는 날은 ‘생활에 리듬을 잃지 마라’는 말을 합니다. 말은 쉽지만 사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모르지요. 일정한 시간에 자고 일정한 시간에 일어나는 등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것을 말해요. 가장 기본적인 것을 그대로 하면 그게 제일 좋은 방법이라는 거지요.”

-과거엔 일기예보를 잘 안 믿었다.
“50년대는 일기예보 믿으면 손해, 60년대는 믿거나 말거나, 확률이 50%이니까요. 70년대는 믿으면 덕을 보고, 80년대는 믿으면 돈을 번다는 말과 함께 ‘웨더 마켓’이란 말도 나왔어요. 날씨로 돈을 번다는 의미이지요. 적중률이 80%를 넘어야 경제적 가치가 있어요. 세계기상기구에서 일기예보의 경제적 가치는 20배라고 해요. 1을 투자하면 20배를 번다는 뜻이지요. 그래서 기상회사도 생겨났고요. 저도 잠깐 개인이 하는 기상회사에 나간 적이 있어요. 우리나라 기상예측 능력은 93,94%로 선진국 수준이에요. 동남아시아에 전수할 정도입니다.”

-‘김동완은 잘 맞춘다’는 말도 있었다.
“기상대는 자기들이 발표한 예보를 한자도 틀리지 않게 전달하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곳에 따라 비가 온다’고 하면 사람들은 비가 온다는 사실만을 크게 기억해요. 비가 오지 않는 지역의 사람들은 예보가 틀렸다고 하겠지요. 저는 이걸 ‘비가 오는 지역도 있겠지만 전반적으로 대체로 흐리겠다’고 말을 바꿔 비를 강조하지 않아요. 그럼 비가 오지 않은 지역의 사람들이 김동완이 잘 맞춘다는 생각을 하는 겁니다. 기상대에서 대선배에게 뭐라 말을 못하는 거지요.”

-‘백지수표’ 얘기는 뭔가.
“1970년대 지금은 없어진 동양방송(TBC)에서 일할 때 인기가 대단했어요. KBS의 한 이사가 저를 차로 납치하다시피 해 여의도 방송국으로 데리고 갔어요, 당시 사장이 저에게 백지수표를 내밀며 ‘3억이든 5억이든 줄테니 마음대로 쓰세요’라고 말해요. 그때 변두리 주택 한 채 값이 몇십만원 하던 때라 저에겐 엄청 큰 액수였지요. 그런데 다음날 이병철 회장이 저를 8층 집무실로 부르더니 제 손을 잡고 토닥토닥 두드리며 ‘5년만 더 근무하면 그 다음엔 일하지 않고 종신이사로 지내도록 하고 집도 사주고 기사 딸린 차도 내주고 일년에 4차례 세계 기상대 시찰도 보내준다’고 했어요.”

-어느 쪽으로 갔나.
“그대로 TBC에 남아 있다가 1980년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고 언론통폐합으로 TBC가 KBS로 합쳐지면서 KBS를 다니게 됐지요. 조금만 더 근무해 5년을 채웠더라면 전 상팔자가 됐을 텐데요(웃음).”

-이 회장이 말대로 대우를 해주었나.
“그럼요. 약속대로 정말 잘 해주셨어요.”

-그럼 재산도 많겠다.
“16대 총선에 고향에서 자민련 소속으로 나갔지만 당선도 못하고 40여년 아끼고 절약해 모은 돈을 6개월만에 몽땅 써버렸어요. 제가 죄인이에요. 집사람은 그 때문에 실명까지 했어요. 선거 운동 쫓아다니느라 당뇨병 치료시기를 놓쳐 그렇게 됐어요. 지금 요양병원에 있어요. 제가 일주일에 한 번씩 찾아갑니다.”

-화병이 생길만도 하다.
“그렇지 않아요. 전 좀 특이해요. 돈이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아요. 내가 벌어서 내가 썼는데요 뭘…. 월사금 좀 낸 대신 사람 보는 눈은 떴다, 그렇게 생각해요.”

-가장 보람 있었던 일이라면.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은 거지요. 대부분 전성기 때 받지만 저는 은퇴 10여년 후에 받았어요. 내가 잊혀지지 않았다는 게 보람이고, 또 기상 전문가가 훈장을 받았다는 사실은 음지에서 고생하던 기상대가 양지로 나왔다는 의미이기도 해 자랑스럽기도 했어요. 자식들한테 내 제사 때 지방 쓰지 말고 훈장 올려놓으라고 했어요.”

김동완 씨는 1남 4녀를 모두 출가시키고 서울 신정동의 아파트에서 혼자 지낸다. 낮에는 부천시 오정구에있는 노인복지관에서 컴퓨터 교육을 받는다. 블로그를 운영하고 영상앨범을 제작할 정도로 컴퓨터 실력이 상당한 수준이다. 기업체 강연도 나가고, 결혼 주례도 선다. 1000회를 넘겼다. 담배 냄새 맡기 싫어 경로당에 나가지 않는다는 김씨는 “장수집안이라 앞으로 10년은 자신 있다”며 활짝 웃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