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우는 목소리보다 연기… 지금도 힘든 건 없어,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 할 터”
“성우는 목소리보다 연기… 지금도 힘든 건 없어,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 할 터”
  • 오현주 기자
  • 승인 2015.03.20 11:00
  • 호수 46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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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세 현역 방송인 ‘오발탄’의 오승룡

KBS 라디오 ‘바람따라 세월따라’ 진행… 방송하느라 해외여행 꿈도 못 꿔
1960~70년대 시사풍자 ‘오발탄’으로 전성기… ‘방송인 명예의 전당’에 올라

“80 평생 해외여행 해본 적 없고 제주도도 작년에 처음 가봤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랜 세월 마이크를 붙잡고 있는 성우 오승룡(80)씨가 하는 말이다. 오씨는 이름 석자보다 그가 진행했던 라디오 프로그램 ‘오발탄’(1961~1971년)으로 더 유명하다. 1954년 방송 시작한 이후 3개월만 제외하고 하루도 방송을 하지 않은 날이 없다. 그 3개월마저도 군 훈련 때문이었다. 현재도 KBS 라디오 프로그램 ‘김삿갓 북한방랑기’ 후속편인 ‘바람따라 구름따라’를 진행하고 있다.
60여년 방송 생활 가운데 큰 사고, 지각 한 번 없었다. 그런 열정과 성실, 근면을 인정받아 2009년 성우로선 최초로 ‘대한민국 방송인 명예의 전당’에 올랐고 2011년 보관문화훈장을 받았다. 지난 3월 중순, ‘백세시대’ 편집부를 방문한 오씨에게서 방송 뒷이야기와 롱런의 비결을 들었다.

-녹음해놓고 여행 떠날 수도 있지 않았나.
“내 자신이 그런 걸 용납하지 않아요. 생방송이 많아 가능하지도 않았고요. 기상예보도 믿지를 못했어요. 제주도 갔다가 날씨가 안 좋아 다음날 돌아오지 못하면 어떡해요. 지금 하는 방송은 일주일치를 미리 녹음해둬요. 작년에 방송국 노조가 원로들 대우해줘 제주도에 다녀왔지요.”

-사람으로 치자면 환갑이 넘은 세월이다.
“작년이 방송 생활 60년이었어요. 자식들이 회갑잔치 열어주듯 후배들이 축하파티 해준다고 했으면 나갔을 텐데 그런 것도 없어 우리들끼리 조용히 넘어갔어요. 아마 TV였다면 달랐을 거예요. 라디오는 인정을 안 해줘요. 방송의 뿌리는 라디오인데.”

-우리라면 누구를 말하는가.
“‘성우회’라고 KBS의 고은정·김소원·김수일, 기독교방송의 서계영·천선녀·김기갑 등이 한 달에 한 번 모여요. 두 방송국의 1기생들로 같은 해에 성우 생활을 시작했어요.”

-방송 시간은 기네스북 감이다.
“몇 년 전 계산해본 적이 있어요. 하루 한 시간씩 방송했을 경우 1년이면 365시간, 100년을 해야 3만 6500시간인데 저는 2만 4000시간이 넘더라고요. 한창 때는 5분짜리, 10분짜리 드라마, 생방송 합쳐 하루에 17개 프로그램을 한 적도 있어요. 그 무렵 방송인 중 세금도 제일 많이 냈어요. 세계적으로도 나만큼 오래 한 사람 없을 겁니다. 기네스북에 연락하려다 그만 두었어요. 그쪽에서 알고 찾아오면 몰라도….”

-롱런 비결은.
“욕심을 비우면 됩니다. 재능이 아무리 많아도 열심히 하지 않으면 안 돼요. 제가 술고래였어요. 많이 안 먹는다는 날은 소주 2병, 마실 때는 7,8병이에요. 단 한 번도 술 냄새 풍기고 방송 한 적 없고 지각 한 적 없어요.”

-잊지 못할 프로라면.
“역시 ‘오발탄’이지요. 5분짜리 사회고발 풍자프로였는데 1분부터 4분까지 비판하다 남은 1분 동안 비꽈버린 후 오~발~탄! 하고 끝냅니다. 그렇게 해놓으면 중간에 무슨 말을 했든 (비판의) 상대가 말 못해요. 잘못 쏜 총이니까요.”

-방송 예를 들어 달라.
“1963년 쯤 방송 된 겁니다. 국회의원들이 군사정권의 들러리 신세로 전락했던 시대였지요. 방송에서 ‘위대한 선량들이 거수기 노릇하느라 겨드랑이 뻑뻑할 테니 그걸 막기 위해 재봉틀 기름을 한 통씩 선사하면 어떨까요’ 이렇게 비아냥거린 후 오발탄으로 마무리했어요.”

-박정희 정권에서 노골적인 비판이 가능했나.
“6·3사태 이후 풍자프로그램 폐지 명령이 있었어요. 동아방송의 비슷한 프로그램 ‘앵무새’ 제작진이 전부 입건되기도 했어요. 방송사에 상주하던 기관원의 눈을 피해 방송국 앞에 있는 다방에서 대본 작업을 한 뒤 다방 아가씨를 통해 PD, 작가와 연락을 취했어요. 방송국에 몰래 들어가 녹음하고 생방송 테이프에 녹음테이프를 끼우는 일을 한 달간 한 적도 있어요. 기관원이라도 생방송에 끼운 테이프는 어떻게 할 수가 없거든요. 방송 사고가 날 수 있기 때문이지요.”

-동명의 소설도 있는데.
“이범선의 소설 ‘오발탄’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어요. 오발탄이란 말은 당시 담당 국장이 넣은 걸로 압니다.”

오발탄의 인기와 위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정부 부서마다 ‘오발탄 담당관’이 있을 정도였다. 공무원들이 자고 나면 ‘우리 부서가 오승룡이 쏜 오발탄에 걸려들지 않았느냐’가 아침 인사였다고. 동료들의 민원 해결사이기도 했다. 주위에서 무슨 일만 터지면 오승룡을 찾았기 때문이다. 한 동료가 택시기사를 폭행하고 경찰서에 끌려간 적이 있다.
“그런 일이 생기면 나부터 찾아요. 경찰서를 찾아가 당직 경찰관에게 ‘나 오발탄 하는 오승룡이요’ 하면 그 사람이 쩔쩔 매요. 제가 ‘오죽 택시기사가 나빴으면 때렸겠나, 그런 나쁜 사람은 집어넣어야 한다’고 사건을 뒤집어놓아요. 물론 그러면 안 되는 거였지만 그게 통했던 시절이었어요. 기회 된다면 ‘오발탄’ 다시 하고 싶어요.”

-어떻게 성우가 됐나.
“유치원 때 어린이극을 했고 중·고등학교 때 연극반 활동을 했어요. 대학시험에 합격하고 나서 신협 같은 극단에 들어갈까 고민 중이었는데 우연히 신문에서 방송극단 연구생을 뽑는 모집 광고를 봤어요. 그게 성우 시험이었어요.”

-대학생 신분으로 가능했는지.
“필기·실기시험 다 합격하고 면접 볼 때 나이 많은 면접관이 절 보고 ‘학생이잖아’ 그래요. 그래서 제가 ‘모집 요강에 자격이 중졸 이상이라고 돼 있다, 3년 전 중학교 졸업하고 대학 합격해놓고 있다, 왜 안 되느냐’고 따졌더니 합격을 시켜주더라고요.”

-공부는 잘 못했겠다.
“그럼요. 맨날 연극할 생각만 했지요. 성우 월급으로 양담배 피우고 남들보다 풍족한 대학 생활을 했어요.”

‘장희빈’·‘청실홍실’ 등 라디오 드라마를 했던 오승룡은 ‘서울야곡’ ‘세월따라 노래따라’ 등 일반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구수한 입담으로 인기를 얻었다. ‘방송휴게실’이라는 음악 프로그램에서 ‘라디오 DJ’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했으며, ‘내시 목소리’를 처음 개발하기도 했다. 본명은 오세완. 교육자였던 아버지가 아들의 방송 진출을 허락하지 않았다. 라디오에 이름이 소개되면 들킬 위험이 있어 이승만 대통령 특집 드라마를 하다 알게 된 이승만의 아명에서 따왔다.

-내시 목소리를 어떻게 개발하게 됐나.
“거세된 남자의 이미지를 청취자에게 어떤 식으로 전달해야 하나 고민했어요. 경기도 송추에 ‘내시촌’이 있다고 해서 가봤고 효자동 통인시장의 지물포 주인이 내시라고 해 만나보기도 했어요. 그 사람은 정말 목소리나 말투가 여성 같았어요. 제가 코맹맹이 ‘내시 목소리’를 만들어 낸 이후 모든 방송과 영화에서 똑같은 소리를 내더라고요.”

-성우는 타고 나는 건가.
“그렇지 않아요. 목소리보다 연기가 중요해요. 미국에 가 있는 주상현은 목소리가 걸걸하지만 ‘박서방’ 같은 라디오 드라마에서 주인공 역을 했어요. 자기 목소리 가지고 연기해야지 제 맛이지요. 목소리 좋으면 아나운서 돼야하고요.”

-성우는 정년이 없는 것 같다.
“요즘도 힘든 건 없어요.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 할 수 있지요.”

-성우 출신 탤런트들도 많다.
“TV 방송국 생기면서 탤런트들을 뽑아 드라마를 제작하려는데 이 사람들이 대사가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PD가 성우들을 대거 데리고 간 겁니다. 김무생·전훈·오현경 등이 모두 성우 출신입니다.”

-왜 안 따라갔나.
“전 라디오가 좋아요. 얼굴에 분칠하지 않아도 되고 다른 사람하고 호흡 맞출 필요 없고 혼자서 마음대로 정해진 시간을 요리한다는 점이 라디오의 매력이에요.”

-대우는 어땠는가.
“대기업과 비교해 낫지 않았어요. 성우들이 자가용 타고 다니게 된 건 영화 더빙을 하면서부터죠, 동시녹음이 안 되던 시절이라 촬영 장면 보며 입모양도 맞춰야 하고 감정도 살려야 해 힘들어요. 연기자들은 그걸 잘 못했어요. 배우마다 전담 성우들이 있었지요. 신성일을 살려낸 게 이창환이고, 엄앵란을 살려낸 게 고은정이고, 김지미를 살려낸 게 정은숙이에요. 전 트위스트김 목소리를 냈어요.”

-성우란 직업이 예전 같지 않다.
“맞아요. 과거 같으면 나레이션은 성우가 아니면 안됐는데 요즘은 PD들 입맛이 달라져 ‘성우 말고….’ 이런 식이에요. 개그맨들을 갖다 쓰길 더 좋아해요. MBC는 아예 성우를 뽑지 않아요. 그나마 KBS가 일 년에 10여명 정도 뽑아요.”

-성우들의 설 자리도 좁아지나 보다.
“그렇긴 해도 여전히 순정 드라마, 소설극장, KBS드라마… 다 하고 있어요. 성우들이 개그맨이나 탤런트들처럼 공부를 하지 않아 문제지만요.”

오승룡 씨는 수년 전 심장 이상으로 인공 박동기를 달고 다닌다. 10년마다 배터리를 교환하는 일 외에는 일상생활에 지장이 없다고 한다.
오씨 부부는 2남 2녀를 두었다. 딸 둘은 시집을 안간 채 부모와 한집에 산다. 큰아들은 연기자이고 둘째아들은 방송 관련 일을 한다. 오씨는 “컴퓨터를 전공한 딸 덕분에 이메일 주고받는 등 컴퓨터 배우는 재미가 쏠쏠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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