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성 고민’ 중국 동포 작가의 얼굴 없는 자화상
‘정체성 고민’ 중국 동포 작가의 얼굴 없는 자화상
  • 배성호 기자
  • 승인 2015.04.03 11:50
  • 호수 4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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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성곡미술관 ‘최헌기 전’
▲ 최헌기는 자신이 고안한 광초를 플라스틱과 실리콘 등을 이용해 입체적으로 선보이기도 했다. 사진은 2013년 作 ‘태양시리즈-홍’과 개막 공연 중인 무용수들.

중국 지린성 출신… ‘경계인’ 모습 회화‧설치작품으로 표현
광초 기법 활용한 ‘붉은 태양’, ‘고전액자‧초상’ 시리즈 볼만

붉은색과 보라색 불빛이 희미하게 빛나는 어두컴컴한 방 안에 구슬픈 멜로디의 자장가가 흘러나온다. “잘 자거라 아가야 내 사랑 아가야 밤은 캄캄 길어도 잠 잘 자거라…” 자장가를 배경으로 아무렇게나 휘갈겨 쓴 글자가 천장에서부터 아래를 향해 늘어져 있다. 마치 눈 내리는 모습을 연상케 하는 글자는 해독이 불가능하다. 작품명 ‘설국의 자장가’. 이 설치작품은 분단된 국가의 피를 가지고 중국에서 자란 한 작가의 내면을 드러내고 있다.
재중동포 최헌기의 작품세계를 조명하는 자리가 마련됐다. 서울 종로구 신문로에 위치한 성곡미술관에서 오는 5월 31일까지 ‘최헌기 전’이 열린다.
중국 지린성(吉林城) 출신인 최헌기는 한국과 중국의 문화적 경계에서 살아가면서 자신의 삶을 회화와 설치 작품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의 부모는 일제 강점기 때 전남을 떠나 중국 지린성 백두산 근처에 정착했다. 최헌기는 어렸을 때부터 ‘꼬마 화가’로 불릴 정도로 재능을 보였고 30대에 베이징 중앙미술학원에 입학하면서 두각을 나타냈다. 부모님의 나라와 자신이 태어난 나라 어디에도 속하지 못했던 그는 역설적으로 제3자의 눈을 갖게 됐다.
이번 전시는 그의 초기작 ‘자화상’(1994)에서부터 시작된다. 중국 내 소수민족이었던 최헌기는 문화대혁명을 거치면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다. 3개의 캔버스로 구성된 작품은 제목과 달리 ‘얼굴’이 없다. 각각의 캔버스에 얼굴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흐릿하게 일그러진 태극기, 중국의 오성홍기, 북한의 인공기가 자리하고 있다. 붉은색이 유난히 강조된 작품은 최초 공개 당시 관람객들의 낙서까지 더해져 어지러운 모습을 연출하고 있다.
1995년 발생한 ‘천안문사태’를 기점으로 최헌기는 잠시 순수한 동심으로 돌아가는 ‘설국’ 시리즈에 몰두한다. 그가 어린 시절을 보낸 백두산은 눈이 많이 내린 곳이었다. 최헌기에게 눈은 차가움 보다는 따뜻함을 상징하는 소재였다. 1관에 전시된 ‘설국’ 시리즈는 하얀 눈을 대하는 그의 따뜻한 시선이 더해져 포근한 분위기를 풍긴다.

▲ ‘붉은 태양’, 2013년 作

순수한 동심의 세계를 구축해가던 것도 잠시 우리나라의 ‘IMF 구제금융 사태’와 중국의 사회‧경제적 격변은 최헌기의 작품세계의 큰 변화를 가져온다.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잠시 과도기를 겪던 그는 그의 작품세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광초 작업’을 선보이며 미술계에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다.
광초(狂草)는 한자 서체인 초서에서 착안한 기법으로 초서를 극단적으로 흘겨 써 글자인지 풀인지 분간할 수 없게 한 것이다. 플라스틱‧실리콘‧철사 등으로 표현한 광초는 캔버스에서 터져 나오거나, 거꾸로 치솟고, 폭포처럼 줄줄이 흘러나오기도 한다.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의도적으로 읽지 못하게 함으로써 혼란스러운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있다.
최헌기는 다양한 작업에 광초 기법을 사용해 작가로서 자신의 작품세계를 형성해 나갔다. 앞서 언급한 ‘설국의 자장가’ 외에도 광초 기법이 잘 드러난 작품은 ‘고전액자’와 ‘초상’ 시리즈이다. 알몸으로 명상을 하는 여자의 사진 위에 흐릿한 유리를 덧대고 그 위에 알 수 없는 글자를 새겨 넣은 ‘고전액자’ 시리즈는 사회 속에서 자신의 본 모습이 흐려지고 혼탁해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또 레닌, 마르크스, 마오쩌둥 등 역사적 인물의 초상화 위에 ‘고전액자’와 같은 방식으로 표현한 ‘초상’ 시리즈는 실패로 끝난 사회주의 실험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번 전시의 백미는 2관 1층을 채운 ‘붉은 태양’(2013)이다. 레닌, 마르크스, 마오쩌둥의 동상은 각각 깃털펜‧만년필‧붓을 들고 있다. 이들은 온전히 바로 서지 못하고 공중에 떠 있거나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이들이 공중에 흘려 쓴 의미를 알 수 없는 광초가 마구 뒤엉켜 붉은 빛의 구(球)를 만든다. 구의 표면에는 롤렉스‧프라다 등 명품 브랜드 상표가 붙어 있다. 사상가의 공허한 이상과 거대 자본을 향한 욕망이 뒤섞인 중국의 현실은 흐릿한 태양의 불빛처럼 어지럽다. 이들 가운데 반투명 허수아비, 최헌기의 자각상만이 꼿꼿이 서 있다. 정체성의 혼란을 딛고 비로소 당당히 선 최헌기의 모습을 함축해 놓은 작품이다. 관람료는 5000원이며 65세 이상은 무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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