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탯줄 째 들어온 아기 보면 달아난 산모의 목숨이 걱정되기도 했어요”
“탯줄 째 들어온 아기 보면 달아난 산모의 목숨이 걱정되기도 했어요”
  • 오현주 기자
  • 승인 2015.05.04 09:19
  • 호수 46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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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홀트아동복지회 부속의원 원장 조병국

버려진 아이들 주치의로 50년 살아온 ‘할머니 의사’… 6만여명 입양 보내
여든 넘은 현재도 장애 때문에 입양 안 되는 아이들 뒷바라지에 전념

슈바이처의 ‘손’과 마더 테레사의 ‘가슴’으로 살아온 삶이었다. 골목에 버려진 아기들은 소아과 전문의의 손길과 보살핌으로 생명을 되찾고 해외로 입양돼 어엿한 성인으로 성장했다. 그렇게 살아난 아이가 무려 6만명에 이른다. ‘할머니 의사’ 조병국(82)선생이 바로 그이다. 홀트아동복지회 부속의원에서 30여년 근무한 조 선생은 이 시간에도 장애인을 돌보는 봉사의 삶을 살고 있다. 4월 말 홀트일산복지타운 내 ‘말리하우스’에 기거하는 조 선생을 만났다.

-집 이름이 재밌다.
“홀트아동복지회 설립자 해리 홀트의 딸 이름이 말리에요. 말리가 사는 집이지요. 강남에 제 집이 있지만 오고가는데 4시간이나 걸려 아예 방을 하나 달라고 했더니 자기 집 이층 방을 비워줬어요. 결혼도 안한 채 말리씨는 25세 때부터 아버지 일을 돕기 시작해 지금은 여든 나이가 됐어요. 옆에서 보면 어떻게 저럴 수 있나 그런 생각이 들어요.”

-홀트일산복지타운은 어떤 곳인가.
“홀트아동복지회는 해외입양아만 보내는 곳으로 알려져 있지만 장애인 치료와 복지 사업도 하고 있어요. 여기는 장애 때문에 입양도 안 되고 고아원에서도 받아주지 않는, 정말로 오갈 데 없는 아이들 270여명을 수용한 시설이에요. 가장 나이가 많은 이가 65세에요.”

-운영비는 어디서 나오나.
“시에서 지원해주고 아이들 각자에게 나오는 장애수당이란 것도 있어요. 예전보다는 훨씬 잘 돼 있어요. 대신 국민들이 힘들어졌지요.”

홀트아동복지회(서울 합정동)는 한국전쟁 직후인 1955년, 전쟁과 가난으로 부모를 잃은 아이에게 새로운 가정을 찾아주는 입양사업을 시작했다. 설립자 해리 홀트(1905~1964)는 한국 고아 8명의 입양을 시작으로 우리나라의 입양사업과 장애인 복지사업을 위해 모든 재산과 삶을 희생했다.

-홀트 씨는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작년에 말리하고 미국에 갔다가 아버지(해리 홀트)가 어마어마한 재산가였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어요. 바닷가 별장 지역에 많은 땅을 사서 상하수도 시설 등 구획 정리를 해놓았어요. 사후에 아들이 어머니하고 상의해가며 필요한 만큼씩 떼어 팔아 여기다 쏟아 부은 겁니다. 돈도 많고 편하게 살 수 있었는데 말이지요.”

-여기서 어떤 일을 하나.
“1993년 정년퇴직하고 캐나다에 있는 딸집에 가 있는데 말리가 다시 와달라고 했어요. 월요일에는 직원조회 참석하고 같이 예배드리고 근처 병원에 입원한 아이들 방문해 상태가 어떤가 보고 필요한 거 받아오고, 입양됐던 아이들이 여기 봉사하러 오는데 그 애들 통역해주고 그래요. 말하자면 집안의 할머니 같은 존재지요.”

-진료는 하지 않나.
“올해 2월까지도 타운 내 부속의원에서 진료를 했지만 의원이 없어지면서 이제는 하지 않아요.”

-의사가 필요할 텐데….
“엑스레이 기사가 없으면 제가 3개월마다 가서 교육을 받아야 하고 엑스레이 현상액도 함부로 버리지 못한다고 해 이런저런 이유로 의원 문을 닫았어요, 대신 개업의들이 일주일에 두 번씩 방문 진찰을 해줍니다만 아이들이 시간에 맞춰 아플 수는 없지요. 밤에 위급한 일이 생기면 제가 역할을 좀 하고 그러지요.”

-6만명의 아이들을 진찰했다고.
“6만인지 7만인지는 세어보지 않아 저도 잘 몰라요. 소아과 외래에 적을 땐 하루 80명, 많을 땐 223명까지 왔으니까요. 100명 이상은 귀가 아파서 청진을 못해요, 1972년에는 아이들이 2300명이나 됐어요. 그 아이들이 입양될 때까지 보살펴 줬어요.”

-어떤 아이들이었나.
“1950~70년대 못 먹고 못 입던 시절 길거리에서 발견된 아이들이지요. 우리는 ‘버려진 아이들’이라고 하지 않고 ‘발견된 아이’라고 해요. 버려졌다고 하면 슬프지만 발견됐다면 희망적이니까요. 어떤 아이는 태반과 탯줄이 달린 채 피로 얼룩진 속바지에 싸여서 들어오기도 했어요. 아이도 아이지만 자궁수축이 되기도 전 출혈이 멈추지 않은 몸을 끌고 어디론가 도망쳤을 산모가 살아 있을까 걱정을 하고 그랬지요.”

평양에서 7남매의 장녀로 태어난 조병국 선생은 광복 직후 남한으로 내려와 외할아버지 슬하에 컸다. 의료시설이 부족하던 시절 두 동생을 잃고 한국전쟁으로 부상당한 채 버려진 아이들을 보며 의과대학 진학을 결심했다. 연세대 의과대학을 나와 1963년 소아과 전문의 자격증을 취득했다. 서울시립아동병원에서 15년여, 홀트아동복지회 부속의원에서 30여년 근무하다 정년퇴임했다. 그러나 후임자가 나서지 않아 전 원장이라는 직함으로 계속 진료를 하다 올해 초 비로소 청진기를 내려놓았다. 국민포장(1991)·삼성생명 공익재단 ‘비추미 여성대상’(2012) 등 수상.

▲ 홀트아동복지회를 설립한 해리 홀트의 딸 말리 여사(왼쪽)와 함께.

-홀트와는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됐나.
“세브란스병원 레지던트 수련 중 부속의원으로 파견 나갔어요. 할아버지(해리 홀트)가 저를 좋게 봤는지 교수에게 얘기해 다시 가서 도와주라고 해 오게 된 겁니다.”

-요즘도 해외입양이 되고 있나.
“작년에 60명 정도가 갔어요. 법이 많이 달라져 비자가 잘 안 나와요. 가정법원에서도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요즘 고아는 1차로 영아원에 갑니다.”

-해외입양을 돈벌이로 보는 시각도 있었다.
“1989년에 해외입양 전면금지령이 내려졌어요. 내 인생 전체가 흔들리는 위기감을 느꼈지요. 지난 수십 년 간 내가 한 일이 고작 고아수출이었나 하는 생각에 상처가 되더라고요. 우리는 그저 집 없고 병든 아이를 위해 따뜻한 가정과 부모를 찾아주고 싶었을 뿐인데, 국내에 없으니 해외로 눈을 돌렸던 것뿐인데 말이지요.”
-입양아들이 찾아오는 경우도 있나.
“오늘도 남편이랑 같이 온 ‘아이’가 있어요. 미국에 입양돼 잘 커서 미국인과 결혼해 가정도 꾸린 여성이지요. 복지타운에 1~3개월씩 머물며 아이들을 돌보다가 돌아갑니다.”

-부모를 원망하지 않는가.
“그들이 한국을 찾는 건 뿌리를 확인하고 싶어서이지 부모를 찾아 원망을 하려는 게 아니에요 오히려 자기를 버려야 했을 때 엄마가 외롭게 겪었을 고통을 안쓰러워하지요. 이렇게 잘 컸으니 미안해하지 말라고 말하러 왔는데 부모는 차마 자식 볼 면목이 없어 나타나지 않는 거고. 열의 아홉이 그렇게 얘기해요. 대견하지요.”

-기억에 남은 아이도 많을 텐데.
“영수라고, 열 살때에 미국으로 입양됐다 의대생이 돼 제 앞에 나타난 지체장애아에요. 처음엔 서로 얼굴을 못 알아봤는데 입양서류에 적힌 제 이름을 기억해내고는 너무나 반가워하더라고요. 영수를 포옹하고 한참동안 등을 두드려주었어요. 성치 않은 몸에 얼마나 피눈물 나게 노력하며 살았을까 하는 여러 가지 감정이 밀려왔기 때문이지요. 영수는 재활의학과 전문의가 됐고 여기에 봉사를 왔다가 봉사활동을 하는 여성을 만나 결혼도 했어요.”

-감동적인 얘기다.
“처음엔 영수의 아내가 자궁내막염으로 아이를 못 가져 입양을 했어요. 영수가 저에게 부탁을 해 예쁘고 건강한 여아를 보내주었지요. 그런데 놀랍게도 3년 후 아내가 임신을 하게 됐어요. 영수 부부가 저를 찾아와 딸 이름을 ‘말리 병국’이라고 짓겠다며 허락해달라고 했어요. 타운에서 아내를 만난 소중한 인연(말리)에다 입양서류에 사인해주고, 딸도 주었고, 같은 의사라는 이유에서라고 해요. 저는 ‘계집애에게 남자이름을 붙여주면 놀림감이 되지 않을까’ 했더니 ‘미국이니까 상관없다’고 해요. 지금도 영수 가족과는 피붙이처럼 지냅니다.”

-어떻게 희생적인 삶을 살게 됐나.
“외할아버지는 남의 자식을 데려다 키우곤 하셨어요. 언니가 우리 집에 와 살다 시집가면 동생이 오고… 그런 집안에서 커 남과 우리의 차별이 없었어요.”

-지나온 삶에 후회는 없는지.
“내가 하고 싶었던 거 끝까지 열심히 했다는 것에 후회는 없어요. 단지 어머니에게 너무나 미안한 마음이 남아 있어요. 의사가 되겠다고 했을 때 아버지는 무척 반대하셨어요. 어머니는 제가 고생하는 모습 보며 ‘이렇게 가슴 아픈 일 하려고 의사가 된 거냐’고 하셨어요. 내 자식은 어머니에게 맡기고 남의 아이만 돌본 것, 내 자식이 아플 때 어머니가 소홀히 한 탓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했던 것들이 너무나 미안하지요.”

조병국 선생은 의대 동창인 남편 사이에 3남매를 두었다. 은퇴 후 부부는 무의촌에 가 진료하며 여생을 보내자고 약속했지만 남편이 먼저 세상을 떠났다. 조병국 선생은 “복지센터 주변에 사는 노인들이 여기 와서 친구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도와주면 본인도 즐겁고 걸어서 오니까 운동도 되고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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