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후반부에 혼자 있으니 늘 애절하게 갈구하는 낱말이 사랑”
“인생후반부에 혼자 있으니 늘 애절하게 갈구하는 낱말이 사랑”
  • 오현주 기자
  • 승인 2015.05.08 13:52
  • 호수 46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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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 앞두고 소설 ‘단 한 번의 사랑’ 쓴 김홍신

국회 권위주의에 맞서 ‘청바지 등원’, 세비 반납 운동… 8년 연속 의정활동 1등
“가족이든, 사물이든, 직장이든 이 시간에 즐기고 그걸 기뻐하면 그게 행복”

작가 김홍신(68)이 사랑소설 ‘단 한번의 사랑’을 펴냈다. 2007년 역사소설 ‘김홍신의 대발해’(전10권) 이후 8년만이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진저리치면서 썼다’. 지난 5월 초,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만난 작가는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혼을 끄집어내 사랑을 제대로 해보고 싶은 갈증 같은 것을 갖고 있다”며 “사랑의 세부적인 묘사에선 꽉 막혀 자신에게 화가 날 때도 있었지만 늘 써보고 싶었던 가슴 떨리는 사랑 이야기를 완성해 가슴 벅찬 느낌”이라고 소감을 밝혔다.
김 작가는 이 자리에서 ‘…대발해’를 쓰며 건강을 잃을 뻔했던 아픈 경험을 토로하기도 했다. 하루 12시간씩 책상에 앉아 만년필로 총 1만 2000여장의 원고지를 메우는 과정에 허리통증과 요로결석이 생겼고, 얼굴과 목에 돌기가 솟고, 나중에는 관상까지 바뀌었다고 한다.

-관상이 어떻게 변하던가.
“몸을 비틀고 글을 쓰다 보면 아랫입술이 말아 올라가고 이마에 세로 주름이 생겨요. 만년필을 쥔 오른손이 마비되고 그게 목을 타고 올라갔어요. 제가 스카프를 두르는 이유가 멋을 내기 위한 게 아니에요. 물을 적게 먹고 방에만 있다 보니 얼굴과 목 주위에 햇빛알레르기가 생겼어요. 그 흉터를 감추려고 하는 겁니다.”

-낼모레 칠순에 ‘사랑소설’이라니 놀랍다.
“인생 후반부에 혼자 있으니까 늘 애절하게 떠오르고 갈구하는 낱말이 사랑이에요. ‘인간시장’ 같은 사회비판적인 글을 써오면서도 가슴 떨리는 사랑 이야기를 늘 쓰고 싶었어요. 제 작품 중 가장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노작가에게 사랑은 어떤 건가.
“우리 집 앞에 있는 전봇대에 까치가 새집을 짓고 있었어요. 가만히 보니까 부지런히 나뭇가지를 물어다 집을 짓지만 전봇대 아래엔 더 많은 가지가 떨어져 있더라고요. 그래도 까치는 끊임없이 물어다 짓는 겁니다. 사랑은 새가 둥지를 짓는 것처럼 그럼에도 완성하려는 애절함 같은 것이라고 할까요.”

-사랑 이야기만 들어있나.
“국회의원 시절에 가짜 독립운동가 5명이 국립현충원에 묻혀 있다는 사실을 밝혀 훈장을 취탈하고 파묘까지 한 일이 있어요. 그 일을 이번 소설에 반영했어요. 독립유공자 후손들은 박복하게 사는 반면 친일파 집안은 번성하는 현실에 분노가 치밀었어요. 독립유공자 심사를 친일파들이 했다는 것은 우리 역사에 정말로 부끄러운 일이에요.”

‘단 한번의 사랑’의 줄거리는 암으로 6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은 40대 여배우가 이혼을 선언하고 첫사랑을 찾아가지만 가짜 독립운동가 집안 남편의 집요한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음을 맞고 첫사랑 역시 살해당한다는 내용이다.
충남 공주 출신의 김홍신은 건국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76년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 국내 최초의 밀리언셀러 소설 ‘인간시장’(1981)으로 30대에 스타 작가가 됐다. KBS 라디오 ‘안녕하세요, 김홍신 김수미입니다’에서 당시 김영삼 대통령을 1분여 동안 비판했다 방송출연 금지를 당했고 이를 계기로 국회에 진출했다. 15,16대 의원 시절 ‘상습 당론거부자’로 의원들 사이에선 미움의 대상이었지만 언론과 시민단체로부터는 의정활동 1등 의원으로 평가 받았다. 시민운동에 참여했고, 건국대 석좌교수를 지냈다. ‘김홍신의 대발해’ 등 소설과 산문집 ‘인생사용설명서’ 등 130여권의 책을 펴냈다. 2004년 부인과 사별해 혼자 지낸다.

-어떻게 작가가 됐나.
“시골이었지만 가톨릭성당에서 운영하는 유치원에 다녔어요. 프랑스 신부님이 ‘땡땡’(Tintin)이라는 프랑스 만화를 번역해 주어 그걸 무척 재밌게 읽으며 책을 좋아하는 습성을 갖게 됐어요. 중·고등학교 시절 백일장에서 상을 받은 절 보고 작문 선생님이 ‘넌 작가가 되라’고 했어요. 의대 시험에 떨어지고 재수하면서 작가의 꿈을 키웠지요.”

-‘인간시장’이 많이 읽힌 이유라면.
“군사정권 하에서 국민은 억압되고 가슴 답답한 세월을 보낼 때였어요. 주인공 ‘장총찬’이 여기저기 손을 보고 기득권자들을 응징하는 것에 속이 시원했을 겁니다. 소설이 분노의 분출을 대신 해주었다는 평가에 저도 동감합니다.”

-위험한 현장 취재를 많이 했다고.
“가짜휘발유 제조법을 알려고 경기도 김포의 한 장소를 찾아갔어요. 마지막에 넣는 일제약품 이름은 밝히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제조법을 알아냈어요. 서울역 뒷골목에서 건달에게 붙잡혀 각목으로 생명의 위협을 받은 적도 있지만 나중에 오히려 그에게서 도움을 받기도 했지요.”

-책 인세가 상당했겠다.
“처음 100만부를 돌파(1984)하자 출판사에서 포니2를 사주었고, 2년 뒤에 중형차 ‘스텔라’를 사주더군요. 총 560여만부가 나갔어요.”
-‘김홍신의 대발해’는 어떻게 쓰게 됐나.
“내 자신을 쳐다보면 근원을 잘 모르겠더라고요.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가, 우리 민족은 왜 그 고생을 하며 살았을까 등등의 의문을 가졌어요. 내 조상을 알면, 내 피를 알면, 그게 역사이지요, 해답이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어떤 답을 찾았나.
“1960년대 국민소득 80달러에서 40여년만에 230배가 된 세계 역사상 유래가 없는 나라예요. 중국이 주변 국가들을 다 흡수해도 유일하게 못한 나라가 우리입니다. 중국을 수없이 쳐들어갔고 중국 황제, 일본 황제에게 호통 쳤던 역사가 있어요. 소설 구상을 위해 러시아·일본을 수차례 다니면서 우리는 흥이 나면 못하는 게 없지만 한에 젖으면 포기하는 그런 나라라는 걸 알게 됐어요.”

-의정 활동 첫날부터 유명해졌다.
“국회 개원일이 5월 30일입니다. 이날과 31일 이틀 일하고 한 달치 세비를 받아요. 공무원은 이틀치만 받잖아요. 말이 안 되지요, 당장 세비거부운동을 했어요. 국회의원 세비 변경에 관한 법안 작성한 지 6년 만에 비로소 법이 바뀌어 지금은 이틀치만 줍니다.”

-청바지 등원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처음 국회에 들어가 보니까 국회의원 전용 엘리베이터가 있는데다 장관, 의원만 다니는 복도에 레드 카펫이 깔려 있고 일반인은 쪽문으로 다녀요. 국민을 위해 자기 존엄성을 지키는 건 괜찮지만 너무 권위주의로 가는 건 잘못입니다. 이런 분위기를 바꾸고 싶어 전 청바지를 입고 보좌관들은 반바지 차림에 꽁지머리 하고 머리를 노랗게 물들이게 하고 그랬지요.”

-여성의원 전용사우나도 만들었다고.
“남자의원들을 위한 고급스러운 사우나는 있었지만 여성의원이나 보좌관 등 일반 직원들을 위한 사우나가 없었어요. 이들을 위한 사우나를 만들어 줄 것을 국회의장에게 요구했지만 잘 되지 않았어요. 막판에 이만섭 국회의장이 ‘네 말이 맞다’며 들어주었지요. 그러자 당시 김정숙 의원이 저에게 ‘고맙다’며 농담으로 ‘여성사우나에 눈 감은 김홍신 동상을 세워주겠다’고 말해 ‘한쪽 눈만 뜨게 해 달라’고 대답했어요.”

-정치를 그만두게 된 건.
“2004년 17대 총선 당시 정동영·김한길 의원이 저를 찾아와 종로를 맡아달라고 했어요. 중환자실에 입원해있던 집사람에게 ‘출마해도 될까’ 하고 묻자 감겨있던 두 눈 중 한쪽 눈이 살짝 떴다 감겼어요. 전 그걸 승낙으로 간주하고 나갔지요. 선거 막판에 아내가 세상을 떴어요. 그런 와중에 선거운동을 제대로 했겠어요. 정치 1번지에서 선거 40일 전에 출마해 500표 차로 떨어진 것에 위안을 삼았지요.”

-부인에게 미안한 감정이 남아있겠다.
“집사람은 젊어서도 그랬고 결혼 후에도 늘 아팠어요. 국회의원 부인들의 모임에도 한 번 못 나갔어요. 비행기를 못타니까 장거리여행도 못했고요. 내가 희생하더라도 공기 좋은 곳에 집을 마련했어야 하지만 그러지 못한 게 아쉽기도 해요. 대신 아파트가 아닌 꽃과 나무가 있는 주택에서 30여년을 살고 있어요.”
작가는 한동안 긴 글을 못 쓰고 짧은 문장의 시만 썼다. 시집 ‘한 잎의 사랑’(2004)에 아내에 대한 그리움과 미안함을 담은 시 ‘지금 거신 전화는’이 수록돼 있다. 다음은 시 전문.
“네가 떠난 뒤 그리움에 북받쳤다/ 네가 세상에 없는 줄 알면서 그냥 걸어봤다/ 지금 거신 전화는 없는 번호입니다/ 그래 너 없는 세상 난 어쩌란 말이냐”

-정치권에서 손짓이 오나.
“정치권을 떠난 지 꽤 오래 됐지만 과거 제 의정 활동을 생각해서인지 지금도 출마해 달라, 어디를 맡아달라는 등 요청이 옵니다. 인연이 깊어서 그걸 거절하기가 어려운 게 사실이지만 작품 쓰기 전엔 아무것도 못한다고 얘기하면 다들 이해합니다.”

-인생을 어떻게 사는 게 좋은가.
“이집트 속담에 사람이 죽은 뒤 천당과 지옥을 결정하는데 ‘사는 동안 기뻤느냐’, ‘남도 기쁘게 했느냐’ 이 두 가지를 묻는 답니다. 둘 다 ‘그렇다’면 천당에 간다고 합니다. 적어도 기쁘게 살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건강해야 하고 남을 용서하고 사랑하고 베풀어야 합니다.”

-노년층에 들려줄 말은.
“행복을 마음 밖에서 찾지만 마음속에 있다고 봅니다. 사람들은 죽을 때 ‘뭘 할걸 그랬지, 뭘 할 뻔 했는데….’라며 후회들을 합니다. 지금 가진 것, 그것이 가족이든 사물이든 직장이든 이 시간에 즐기고 그리고 그걸 기뻐하면 그게 행복입니다.”

국회의원도 해보고 시민운동도 해보고 여러 보직도 맡아봤다는 작가 김홍신은 “글 쓰는 일이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죽을 때는 글쟁이로 기억되고 싶다”며 “앞으로도 휴머니즘과 사랑을 다룬 소설을 계속 쓰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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