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간 꿈꿔온 초등 졸업장 받아 ‘한’이 풀려”
“60년간 꿈꿔온 초등 졸업장 받아 ‘한’이 풀려”
  • 이상연 기자
  • 승인 2015.05.15 15:15
  • 호수 46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초등학력인정’ 과정 마친 어르신들 이야기
▲ 권옥순(오른쪽) 어르신과 전섭례 어르신이 초등학력인정서와 졸업장을 받기까지의 과정을 이야기하며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다. 사진=조준우 기자

왕복 9시간 걸리는 먼 곳서 와 수업도… 3년 만에 기어코 졸업
전쟁·가난에 한글교육조차 못 받아… “남들 시선 의식 말고 도전을”

배움에 목말랐던 노인들이 평생의 ‘한’(恨)을 풀었다.
지난 2월 11일 대한노인회 경기 안산 상록구지회 및 노인복지관 소속 어르신 28명은 초등학력인정서와 졸업장을 받았다. 비록 삶에 쫓겨 학업의 기회를 놓쳤지만 가슴 한편에 꿈을 간직해왔던 어르신들은 ‘초등학력인정 문자해득’ 과정 이수 후 자신감과 행복감 넘치는 인생을 즐기고 있다.
전섭례 어르신(74)은 “첫 수업을 받는 날 행복했다. 60년이 넘는 세월동안 꿈꿔온 일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선생님의 설명과 필기, 학우들과의 수다조차 내 마음을 설레게 했다”며 활짝 웃는다.
전 어르신은 막 초등학교 공부를 시작했을 무렵, 6․25가 발발해 학업에서 멀어졌다. 이후 평범한 주부생활을 하다 아들과 며느리의 추천으로 오랜 기간 별러온 한글 공부의 기회를 얻게 됐다.
사는 곳이 포천이라 수업마다 안산의 복지관을 오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수업이 있는 날이면 왕복 9시간을 지하철과 버스에서 보내야만 했다. 그렇게 해서 받는 수업은 단 90여분. 들어간 수고에 비해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는 만족했다. 평생의 한을 해소할 수 있다는 기쁨이 더 컸다.
전 어르신은 “집에 도착해서는 하루 동안 밀린 집안일을 처리한 뒤 남편이 잠든 시간에 예습, 복습에 매달렸다. 이런 과정을 거쳐 받아낸 졸업장은 내게 커다란 자랑거리”라며 흐뭇해한다.
김춘희 어르신(72)에게도 졸업장은 소중하다. 건강상의 문제로 일찍 학업을 중단해야 했던 그에게 저학력은 콤플렉스가 됐다. 중학생 나이가 됐을 때엔 학교에 다니는 또래 친구들이 부러워 하루 서너 번씩 등하교 하는 학생들을 바라보곤 했다. 어릴 적부터 영특하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던 터라 세월이 지날수록 학업에 대한 아쉬움은 더욱 커졌다.
김 어르신은 “가족들에게도 똑 부러진 아내이자 어머니였는데, 초등학교 졸업장조차 없는 내 모습에 속병 앓은 적이 많았다”면서 “이런 내 모습을 바꾸려 교육 프로그램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갔고, 운 좋게 이 프로그램을 알게 돼 졸업장을 받을 수 있었다”고 말한다.
두 어르신에게 졸업장은 학력인정 그 이상의 의미였다. 남들에겐 종이 한 장에 불과할지 몰라도 그들에겐 그 무엇보다 소중한 선물이었다.
옆에서 둘의 이야기를 듣던 권옥순 어르신(73)도 지그시 눈을 감고 과거를 회상했다. 그는 학교 문턱을 밟은 기억이 없다. 8세 때부터 피난길에 올라 공부에 신경을 쓸 틈이 없었다. 그렇게 평생 공부와는 인연이 없을 것이라 여겼던 그가 지난 2월 ‘빛나는’ 졸업장을 받게 됐다. 평생의 한이 풀리는 순간이었다.
권 어르신은 “중학생이 된 손녀에게 학사모 쓰고 졸업장 든 내 사진을 보여줬더니 ‘할머니가 자랑스럽다’고 해 뛸 듯이 기뻤다”면서 “남들에겐 별거 아닌 일일 수도 있지만 나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 잊지 못할 행복과 추억을 선사해 준 이 교육 프로그램에 고마움을 느낀다”며 소감을 밝힌다.
세 어르신은 국가평생교육진흥원(이하 국가평생교육원)이 추진 중인 ‘초등학력인정 문해교육’ 프로그램의 수혜자들이다. 이 프로그램은 국가평생교육원 ‘성인문해교육지원사업’의 일환으로, 사회·경제적인 이유로 배움의 기회를 놓친 저학력 성인에게 제2의 교육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마련됐다. 한글 습득 수준별 3개 과정(한 과정당 교육기간 1년)을 이수하면 해당 교육청에서 정식 학력 인정서를 발급한다.
국가평생교육원 관계자는 “현재 전국 15개 시·도(전북·세종 제외)교육청으로부터 위탁운영 지정된 복지관, 초·중·고 평생교육원 등 217개 기관에서 활발히 진행 중”이라며 “특히 상대적으로 위탁운영 가능한 곳이 많은 서울이 58개소로 전국에서 가장 많은 기관을 보유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한편 전남도 교육청도 2년 전부터 학력인정 프로그램을 활발히 추진 중이다. 올해 2월엔 155명의 어르신들이 졸업장을 받았으며, 현재 107명 어르신들이 학업의 꿈을 키워가고 있다.
전남도 교육청 행정과 김미선 주무관은 “일부 어르신들은 한글은 물론 기본적인 숫자 교육도 부족해 대중교통 이용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도 있는데, 정말 뼈를 깎는 노력으로 기어코 졸업장을 받아 가신다”면서 “졸업식장은 이런 어르신과 가족들의 눈물바다가 된다”고 설명한다.
이렇듯 학력인정 프로그램은 초기 취지에 걸맞은 성과를 내놓고 있다. 반면 일부 어르신들은 문해교육에 참여하는 사실을 밝히길 꺼려하는 경우도 있다. 배우지 못한 자신에게 쏟아질 주위의 눈총이 염려된다는 것.
이에 대해 권옥순 어르신이 과거 자신과 같은 처지에 놓인 채 발발 동동 구르고 있는 어르신들에게 충고한다.
“우리가 공부를 하기 싫어서 안한 것이 아니잖아요. 못한 거예요.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왜 남들의 시선을 의식해 사실을 숨기려는지 모르겠네요. 부디 많은 분들이 용기를 내 저와 같이 행복감을 만끽하길 바랍니다.”
이상연 기자 leesy@100ssd.co.kr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