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모령’과 아리랑고개
‘고모령’과 아리랑고개
  • 이동순 영남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 승인 2015.06.05 11:33
  • 호수 47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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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친구들과 한 잔 술 나누다가 흥이 오르면 으레 한 두 곡의 옛 노래가 저절로 흥얼거려진다. 주흥이 오르면 대개 노래방으로 자리를 옮겨 모니터에 떠오르는 가사를 보면서 마이크로 소리를 꽥꽥 질러대는 풍경이 요즘 세태이다. 하지만 예전에는 앉은자리에서 그대로 눈을 지그시 감고 기억하는 노래들을 잇달아 불러대곤 했다. 이때 반드시 중심적 역할을 하던 사람이 있었는데, 그를 에워싸고 모두들 합창으로 분위기를 달구었다. 이제 이런 모습들을 보기란 불가능하다. 그 시절에 자주 부르던 노래 중에 우리는 <비 내리는 고모령>(유호 작사, 박시춘 작곡, 현인 노래, 럭키레코드사, 1947)을 떠올린다. 일단 가사부터 한번 음미해보자.
어머님의 손을 놓고 돌아설 때엔/ 부엉새도 울었다오 나도 울었소/ 가랑잎이 휘날리는 산마루턱을/ 넘어 오던 그날 밤이 그리웁고나.
작품의 시적화자는 현재 고향을 떠나 머나먼 타향에 있다. 그곳이 국내일 수도 있고, 아니면 해외일 수도 있다. 식민지 시절이었으면 일본, 중국, 만주, 연해주, 사할린, 남양군도 등지였으리라. 그곳에서 주인공은 떠나온 고향집과 어머니, 부엉새, 어머니와 작별하던 고향의 언덕길, 물방앗간 등을 사무치도록 그리워한다. 유난히 굴곡도 많았던 한국현대사를 통해 우리 민족은 숱한 억압과 유린, 상처와 모멸의 시간을 겪었다. 가족이 한집에서 편안히 살 수 있는 여건과 환경은 전혀 보장되지 못했다.
지원병이란 이름으로 일본군대에, 징용이란 이름으로 일본의 탄광과 군수공장, 혹은 비행장 활주로 공사장에, 정신대란 이름으로 일본군 위안부의 흉측한 역할을 강요받았다. 만리타국에 백골을 묻고 무주고혼(無主孤魂)되어 비 오는 날 그 혼백이 꺼이꺼이 울며 헤매고 다니는 경우가 얼마나 많았을까? 그들에게 가장 절대적인 귀착지(歸着地)는 오로지 고향이란 두 글자였다.
맨드라미 피고 지고 몇 해이던가/ 물방앗간 뒷전에서 맺은 사랑아/ 어이해서 못 잊느냐 망향초 신세/ 비 내리는 고모령을 언제 넘느냐.
필자가 사는 곳은 이 고모령에서 가깝다. 예전에는 경산 소속이었지만 현재는 대구시 수성구 고모동으로 바뀐 이곳에는 폐쇄된 고모역 건물이 남아있다. 이곳에서 인터불고호텔 쪽으로 조금 더 가면 야트막한 언덕길이 하나 눈앞에 나타나는데 주민들은 이곳을 고모령이라고 부른다. 하필 한자가 돌아볼 고(顧), 어미 모(母)로 합쳐진 말이니 길 떠나는 아들을 배웅하던 모자간은 대개 이 고모령 부근에서 작별을 했던 것인가.
작사가 유호(본명 유해준)는 광복 직후 부산에서 완행열차를 타고 서울을 향해 가던 길이었다. 당시 증기기관차의 연료는 석탄이었고, 보일러에 물을 끓여서 그 증기의 힘으로 열차의 엔진은 움직였다. 급행열차를 먼저 보내주려고 대구 가까운 고모역에 열차가 대기하고 있던 중 유호는 가랑비 뿌리는 창밖으로 어머니와 아들의 이별장면을 보았다. 아들은 어디 먼 길을 떠나는 행색이었고, 어머니는 줄곧 아들 옆을 따라가며 무어라 신신당부의 걱정 어린 말씀을 하는데 거리가 멀어 그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모두 아들에 대한 염려와 걱정이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눈물 어린 인생 고개 몇 고개더냐/ 장명등이 깜빡이던 주막집에서/ 손바닥에 쓰인 하소 적어가면서/ 오늘밤도 불러본다 망향의 노래.
필자의 장난스런 심사는 어느 날 기어이 고도계(高度計)를 들고 고모령 언덕에 올라 높이를 측정했는데, 해발 40미터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추풍령, 이화령, 대관령 등 한국의 높은 고개라면 적어도 500m는 넘어야 하는데, 어찌하여 이 낮은 언덕에 ‘영(嶺)’이란 과분한 글자가 붙은 것일까? 그것은 과학적으로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다. 그리하여 필자는 밤 깊도록 고모령의 의미와 상징성에 대하여 사색과 성찰을 계속했다. 오래지 않아 답이 풀렸다. 고모령은 바로 우리 민족이 험난했던 한국현대사의 전체구간을 살아오면서 무수히 넘고 넘었던 아리랑고개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해방과 분단, 좌우익대립과 6·25전쟁, 보릿고개, 거듭된 독재정권의 발호, 베트남전쟁 참전, 서독의 광부와 간호사 파견, 중동근로자 파견, 민주화를 향한 숱한 시련의 과정들… 한 고개를 넘고 나면 또 다른 고개가 앞을 가로막았다. 그 모든 곡절이 우리가 넘어왔던 아리랑고개였다. 이리하여 옛 노래 <비 내리는 고모령>에 등장하는 고모령은 바로 아리랑고개의 또 다른 이름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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