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때 치열했던 전투·전우들 기억 생생… 총상 입은 채 압록강 밟았어요”
“6·25때 치열했던 전투·전우들 기억 생생… 총상 입은 채 압록강 밟았어요”
  • 오현주 기자
  • 승인 2015.06.05 11:40
  • 호수 47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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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용 전 주월 공사

월남 패망 당시 교민 550여명 피신시키고 형무소에서 5년여 갇혀
“인사가 만사”… 박정희 대통령은 인재 등용 잘 했지만 지금은 잘 못해

올해는 6·25 전쟁 발발 65년이 되는 해이자 월남이 공산화된 지 40년이 되는 해이다. 이 두 개의 역사적 사건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이대용(90) 전 주월 공사이다. 그는 6·25 전쟁 당시 20여 차례 전투를 치르며 최초로 압록강까지 밀고 올라간 부대의 중대장이었다. 그는 또, 월남 패망 당시 민간인들을 철수시키고 자신은 베트남 특수경찰에 붙잡혀 치화형무소에서 5년간 억류당하는 등 우국충정의 희생적 삶을 살았다. 지난 6월 초, 서울 다동에 위치한 사단법인 ‘자유수호 국민운동’ 사무실에서 만나 호국 보훈의 달을 맞는 소감과 삶의 드라마틱했던 순간을 들었다.

-이 때쯤이면 생각나는 이들이 많겠다.
“6․25때 같이 싸우던 전우들이 모두 총에 맞아 죽고 나만 살아남았어요. 그들의 이름과 사망한 장소까지 생생히 기억합니다. 김용배 대대장은 양구에서, 육사 5기 조현묵 부대장은 압록강 부근 초산이라는 곳에서 죽었어요. 저 역시 여기저기 총상을 입었지만 다행히 관통상은 아니었어요.”

-그 많은 전투에서 살아남은 게 기적이다.
“한 학도병도 전투에 참가해 내 옆에서 수류탄을 던지다 얼굴에 총탄을 맞고 죽었어요. 3일만에… 그게 전투 경험이 없어서 그랬던 겁니다. 배울 때는 일어서서 던지라고 했지만 싸움터에선 고개를 숙인 채 참호 밖으로 굴려야 해요. 머리를 들면 바로 총에 맞거든요. 지금 생각하면 사람은 태어날 때 몇 날 몇 시에 죽을 운명이 정해져 있는 것 같아요.”

-기억에 남는 전투라면.
“제가 6사단 7연대 중대장이었어요. 대위 진급을 앞두고 있었는데 전쟁이 나는 바람에 일주일 앞서 대위로 특진했어요(웃음). 부대가 교대로 나가 교전하는 게 전술의 원칙이지만 우리 부대는 워낙 싸움을 잘해 항상 앞장섰어요. 그 덕에 압록강도 가장 먼저 밟았지요.”
이대용 전 공사는 황해도 금천에서 태어나 고향의 인민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김구 선생을 비판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반동으로 몰리자 목숨을 걸고 월남했다. 육사 7기로 임관한 뒤 전쟁을 맞았다.
1963년 주 월남대사관 무관으로 파견되면서 월남과의 악연이 시작됐다. 3년여 근무하고 귀국해 소장으로 예편한 후 1973년 주 월남대사관 부공관장격인 경제공사로 부임했다가 1975년 월남이 공산화된 직후 미처 철수하지 못해 체포됐다.

-왜 철수하지 못했나.
“미 대사관 측이 헬리콥터를 띄워 약속 장소에서 기다렸지만 그걸 타지 못했어요. 그 전에 우리 대사관의 중요문서를 없애느라 시간을 낭비했고, 약속 장소에 가는 도중 우리 대사의 차량을 만나면서 착오가 생겼던 겁니다.”

-당시 베트남 대사(김영관)는 먼저 철수했다는데.
“그 얘기는 하고 싶지 않아요.”

-그때 상황을 얘기해 달라.
“1975년 4월 당시 사이공에는 우리나라 교민 550여명이 있었어요. 대부분은 한국 LST(상륙함)로 탈출했지만 대사관 가족과 베트남 여자를 부인으로 둔 민간인 등 175명이 남게 됐어요. 제가 그들의 철수를 맡은 본부장이었어요. 이미 대사관 고위층 인사들은 떠나버린 후라 다음으로 최고 선임자였던 제가 그들을 안전하게 대피시켜야 할 책임이 있었어요. 미국의 베넷공사는 나만이라도 헬기를 타고 미 7함대로 가라고 했지만 그럴 수는 없다고 했어요. 미 대사관에서 헬기를 타려던 계획이 갑자기 취소돼 치외법권 지역인 프랑스 정부가 운영하는 그랄병원으로 모두 피신시켰어요. 4개월 후 특수경찰이 베트남 혁명사업을 방해했다는 죄목으로 나를 체포해 치화형무소에 투옥시켰어요.”

-남은 사람들은 다들 어디로 갔나.
“현지에서 사업을 하던 이들은 남기도 했고, 미국으로 간 이들도 있고, 나중에 서울로 들어온 이도 있었어요. 그랄병원이 아니었다면 한국을 증오하던 월맹군의 총탄을 피하지 못했을 겁니다.”

-형무소 생활이 가혹했다고 들었다.
“햇볕을 298일 만에 쪼였을 정도니까 말 다 했지요. 음식은 하루 두 끼, 국은 멀건 호박국이 전부에요. 78kg였던 몸무게가 48kg로 줄었어요. 잠을 안 재우고 눈앞에서 불이 번쩍거리게 하는 게 정말 괴롭더라고요. 나중엔 머리가죽을 뒤에서 잡아당기고, 혈관 속으로 벌레가 기어가는 느낌이 들었어요.”

-고문은 안 당했나.
“그런 건 없었지만 전향서를 쓰라고 했어요. 태어나서 그때까지 살아온 과정을 쓰게 한 후 앞으로는 김일성에게 충성을 다하겠으니 과거를 용서해달라는 식으로 적으라고 강요했어요. 장성 출신에다 외교관인 나를 북으로 끌고 가면 좋은 선전감이 될 테니까요. 6·25 전쟁 때 죽을 목숨이었는데 50세까지 살았으니 살만큼 살았다고 생각하고 끝까지 거부했어요. 나중에 내가 겪은 일들을 자유세계에 폭로하고 싶기도 했고요.”

-어떻게 풀려났는가.
“유태계 미국인 아이젠버그란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은 우리나라에 외국차관을 알선해주는 대가로 엄청난 알선료를 받아 부를 축적한 거상이었어요. 박정희 대통령이 못 마땅해 하던 인물로 자유국과 공산국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사업을 했던 사람이지요. 그 사람이 나를 빼오는 대가로 다시 한국에서 일할 수 있게 해달라는 조건을 제시했어요. 그 사람의 개인전용기를 타고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어요.”
-후유증은 없었나.
“1년여 서울대학 병원에 입원해 있으면서 치료를 잘 받아 회복했어요. 병원 측에서 참 잘해주었어요. 10여년 전 증상이 다시 나타나 고생했지만 지금은 괜찮아요.”

-국가에서 어떻게 대우해주었나.
“청와대로 당시 최규하 대통령을 뵈러 갔어요. ‘청와대가 사정이 안 좋다’며 봉투를 건네주세요. 그 안에 300만원이 들어 있었어요. 그걸 보고 사람들이 ‘역시 주사야, 주사’라고 했어요. 주사는 최 대통령의 별명이에요. 쩨쩨하다는 의미지요. 박정희 대통령 같았으면 20억원은 줄 거라는 얘기들을 하기도 했어요(웃음).”

-체포했던 경찰을 후에 만났다고.
“날 체포했던 즈엉징특이라는 사람이 두 나라 수교 후 주한 베트남 대사가 돼 한국에 와 만났어요. 그 사람은 주변 사람들에게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나라고 했대요. 나라와 운명을 같이하려는 꿋꿋한 정신이 적이지만 머리가 수그려지더라는 겁니다. 심문 당할 때 제가 그 사람에게 ‘영원한 적국도 없고 우방도 없다. 외교관은 절대 체포를 못하게 되어 있지 않은가. 추방을 하면 되는데 당신은 나를 심문할 자격이 없다”고 항의했어요. 그 사람은 ‘영원한 적도…’ 라는 내 말이 가장 생각이 나더랍니다.”

-월남 패망의 원인은 무언가.
“부정부패에요. 월남의 정치인들은 이전투구를 벌이고 있었고 군대는 싸울 의지가 없고 전투력도 약했어요. 월맹군보다 숫자는 많았지만 ‘플라워 솔저’(꽃군인)나 ‘팬텀 솔저’(유령군인) 같이 민간인들과 어울리는 군인 같지 않은 군인들이 많았어요. 돈 있는 집안의 자식들은 다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고요.”
-월남 패망에서 얻은 교훈이라면.
“월남엔 친북성향의 세력이 많았어요. 인구 2000만 중 18%가 공산당이었어요. 심지어 월남의 티유 대통령 보좌관이 공산당원이었을 정도니까요. 월남에서 한 모든 회의가 스파이를 통해 그대로 월맹군에게 전해졌다고 해요. 우리나라도 지금 사회 곳곳에 친북세력이 들어가 있어요. 그 수치가 공교롭게 18%라고 해요. 친북세력을 제거하지 않으면 큰일 납니다.”

-애국심이 부족하다고 원로들이 걱정하는데 방법은 무언가.
“인사가 만사입니다. 교육과 국방 분야에 애국심이 투철한 사람을 앉혀야 해요. 박정희 대통령은 그걸 잘 했어요. 경제발전을 위해 자신과 아무런 연고가 없는 남덕우·태완선·장기영 같은 이들을 기용했어요. 지금은 그걸 잘 못하고 있어요.”

-귀국 후 현재까지 어떻게 지내왔나.
“처음엔 아무런 일도 하고 싶지 않았어요. 가고 싶은 곳을 갈 수 있다는 자유 그 자체가 너무 행복했어요. 나중에 화재보험협회 이사장과 생명보험협회 회장을 지냈어요. 한·월친선협회 회장을 맡기도 했어요.”

-삶의 철학은.
“숙려단행(熟慮斷行). 깊이 생각하고 과감하게 행동한다는 뜻이지요. ‘한순간의 모면을 위해 거짓말 하지 말고 정도를 걸어야 한다’는 말을 4형제에게 귀에 못이 박히도록 일렀어요. 아이들이 그렇게 사니까 돈은 잘 못 벌더라고요.”

이대용 전 주월공사는 장경순 전 국회부의장 등과 함께 애국단체 ‘자유수호 국민운동’을 만들어 공동의장을 지냈다. 현재는 이 단체의 고문으로 있으며, 일주일에 두 차례 경기도 원당의 아파트에서 지하철로 다동의 사무실에 나온다. 90세에도 건강을 유지하는 비결을 묻자 “일제 때 배운 맨손체조와 엎드려뻗쳐를 해오고 있다”며 “총알이 날아오는 전쟁터에서도 바위 뒤에 숨어 체조를 했다”고 말했다.
글 사진=오현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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