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도 들고 세상 보는 눈도 넓어지는 노년… 대접 받을 생각 버려야 해요”
“철도 들고 세상 보는 눈도 넓어지는 노년… 대접 받을 생각 버려야 해요”
  • 오현주 기자
  • 승인 2015.06.12 13:34
  • 호수 47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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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인태 전 MBC 아나운서

‘장학퀴즈’ 17년 진행… 박정희 대통령 아들 출연 소동, 에피소드 많아
혈액암 투병, 심장판막증 수술 등 병마 이겨내고 실향민 위해 봉사

몇 달 전 인터뷰를 요청했을 때 차인태(71) 전 MBC 아나운서는 “몸 상태가 안 좋아 바깥출입을 하지 않는다”며 완곡하게 거절했다. 한동안 잊혀졌던 그가 2009년 돌연 혈액암 투병을 한다는 놀라운 소식이 전해져 그를 아끼는 이들을 안타깝게 했다. 최근 건강을 회복하고 아나운서들의 모임에 참석했다는 반가운 얘기를 전해 듣고 다시 인터뷰를 요청하자 이번에는 주저하지 않았다. 지난 6월 초, 압구정동 자택 인근에서 만나 건강 얘기와 30여년 방송생활 에피소드를 들었다.

-암 투병 소식을 들었는데 건강한 모습을 보니 반갑다.
“졸업이라면 이상하지만 졸업장 없는 수료를 한 셈이에요(웃음), 그리고 작년에 심장판막증 수술을 했어요. 그 때문에 좀 고생했어요.”

-처음에는 충격이 컸겠다.
“감기를 석 달 넘게 앓았어요. 급성폐렴으로 입원해 여기저기 검사를 하는 과정에서 폐와 심장 사이에 종양이 발견됐어요. 주치의 말이 ‘완치율이 40%’라고 해요. 입원하고 치료하고 주사 맞고 하는 과정이 힘드니까 별의별 생각이 다 들더라고요. 왜 나인가, 내가 뭘 잘못 했길래… 등등. 다 나 자신에게 하는 소리였지요.”

-투병 중 느낀 것이 있다면.
“방송인·공직자·교수로 지금까지 누려왔던 것, 주변에서 받은 대접 등이 내 실제 모습과는 달리 과장됐거나 분에 넘치는 것이었어요. 퇴원하고 나서 친구들 만나러 가려고 와이셔츠를 입는데 눈물이 나더라고요. ‘야 차인태, 니가 와이셔츠 단추를 혼자 채웠어’ 칭찬하면서 울었지요.”

-건강에 대한 생각이 많이 달라졌겠다.
“퇴원할 무렵 주치의가 3가지를 조심하라고 일러줬어요. 하나는 ‘너무 귀가 얇아지지 마라’. 이게 좋다, 저게 좋다는 말 듣고 따라하다간 오히려 몸을 해친다는 뜻이지요. 두 번째는 ‘감기에 걸리지 마라’. 감기는 모든 병의 근원이니까요. 마지막이 넘어지지 말라는 거였어요. 늘 머리에 떠올리고 조심합니다.”

차인태 전 아나운서하면 ‘장학퀴즈’이다. 17년 2개월을 진행했다. 한 사람이 그렇게 오랜 세월 지속했다는 점에서 방송사에 남을 만한 기록이다. 연극인 송승환, 영화감독 이규형, 방송인 주철환 등 장학퀴즈 출신 스타들의 면면만 보더라도 방송 인기가 얼마나 컸는지 짐작이 간다. 당시에는 대본을 써주는 방송작가나 조연출조차 없었다. 혼자서 문제 출제부터 진행까지 도맡아했다. 그는 “방송국 앞 여관에 방을 하나 잡아놓고 거기서 매주 문제를 출제했었다”고 회고했다.

-어느 정도 인기였나.
“1973년 2월 첫 방송을 할 때만 해도 MC 맡는 걸 주저했어요. 일개 고등학생들의 퀴즈 경연이었거든요. 그런데 이게 폭발한 겁니다. 녹화가 있는 매주 토요일 정동 MBC 공개홀 앞은 인산인해였어요. 방송국 수위들이 빗자루 거꾸로 들고 방청객들 줄 세우느라 법석을 떨었고 기마경찰이 출동해 교통정리를 했을 정도에요.”

-에피소드가 많았겠다.
“경상도에서 온 친구가 있었어요. ‘조엄이라는 사람이 일본에서 들여온 식물로…’ 라는 문제였어요. 고구마가 정답인데 이 친구가 벨을 삑 누르더니 ‘고메’라고 외치는 겁니다. 제가 경주에서 오래 살아 그 말이 고구마의 경상도 사투리란 걸 알았지만 정답으로 처리하기가 곤란했어요. 다시 기회를 주려고 세 글자라고 했더니 이 친구가 ‘물고메’라는 거에요.”

-박정희 대통령 아들도 출연을 원했다고.
“청와대에서 전화가 왔어요. 본인이 원했는지 아랫사람들이 지만씨에게 추억을 만들어주고 싶어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문제는 대통령 아들이 꼴찌를 해서는 안 된다며 문제를 몇 개 미리 알려줄 수 있느냐는 거였어요. 큰일이었지요. 그래서 제작진이 정치적 라이벌인 ‘3김’ 아들들도 함께 출연시켜 제대로 붙여보자는 묘안을 냈어요. 그러자 청와대에서 없었던 일로 하자고 하더라고요.”

-그 프로 덕에 스타 아나운서가 됐다.
“제가 결혼식 사회를 본 부부가 족히 2000쌍은 될 겁니다. 돈 꿔달라, 병원 수술비 대달라, 딸의 신랑감 찾아달라는 분도 계셨고요.”

-방송 생활 중 기억에 남는 이는.
“제가 30여년 방송을 하면서 역대 대통령과 영부인을 모두 만난 특이한 기록을 갖고 있어요. 1974년 육영수 여사 장례식 방송이 나가고 이틀 후에 전화가 걸려왔어요. 밑도 끝도 없이 수화기 저쪽에서 ‘나 박정희입니다’라는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려왔어요. 순간 대답할 말을 잊었어요. ‘예, 저 차인태입니다’ 했더니 ‘차인태씨, 방송 잘 봤습니다’라고 용건만 말하고 끝이었어요. 비서실을 통한 절차도 생략된 채 군더더기 한 마디 없는 박정희식 화법이었어요.”

차 전 아나운서는 그 후로도 박정희 대통령과 몇 차례의 만남을 통해 인간 박정희가 상당히 외로운 사람이고 혼자 고민을 많이 하는 사람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고 한다. 한번은 청와대에서 열린 국악공연의 사회를 맡았다. 청중을 앞에 두고 있었던 관계로 인간문화재의 대금 연주를 듣던 대통령이 조용히 눈물을 훔치던 모습을 또렷이 볼 수 있었다. 차 전 아나운서는 “그건 외로움이 묻어나는 눈물이었다”고 말했다.
1992년 대선을 앞두고 김영삼 전 대통령이 발음교정 과외를 요청해왔다. 평상시에는 차분하고 정감 있게 얘기하지만 사람이 많이 모이고 박수라도 치면 갑자기 억센 경상도사투리가 섞인 대중연설형 어투로 돌변한다. 차 전 아나운서는 “쌀과 밥을 각각 적은 종이를 보여주자 쌀, 밥이라고 잘 읽었지만 쌀밥이라고 써서 보여주었더니 ‘살밥’이라고 읽었다”며 “교정은 실패였다”고 기억했다.

차인태 전 아나운서는 평안북도 벽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평양의전을 나온 의사였다. 5세 때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월남해 경주에서 컸다. 연세대 성악과 재학 중 학교방송국 아나운서로 활동했던 경험이 계기가 돼 1969년 MBC에 입사했다. 제주MBC 사장을 끝으로 방송 현업에서 물러났고 경기대 교수로 정년퇴임했다. 행정자치부 이북5도 위원장 겸 평안북도 지사를 역임했고 현재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이하 민주평통) 이북5도지역회의 부의장이다. 아버지는 3년 전 타계했고 현재 부인(이선희 전 경원대 미대교수)과 노모와 함께 산다. 두 딸이 낳은 손자·손녀가 3명이다.

-어떻게 월남하게 됐나.
“할아버지가 중국을 오가며 사업을 크게 하셨어요. 당시 북한은 소련이 군정을 했고, 김일성이 소련에서 나와 자기 세력을 확장하던 때였어요. 지주계급, 인텔리계층, 기독교인 등 소위 부르주아는 가진 것을 빼앗기거나 살아남기 힘든 분위기였어요. 우리 집은 모두 해당돼 38선을 넘은 거지요.”

-성악 전공인데 노래하는 걸 못 봤다.
“‘솔리스트앙상블’이라고 우리나라 남자 성악과 교수들로 구성된 합창단에서 오현명·박인수 씨 등과 함께 오래 동안 노래를 불렀어요. 해마다 연말에 예술의전당에서 공연을 갖고 미국순회공연도 10회 이상 다녀왔어요. 요즘은 나가지 않아요.”

-이북5도지역회의는 무슨 일을 하나.
“민주평통은 헌법기관으로 박근혜 대통령이 자문의장이에요. 이북 도민을 대상으로 김동길 연세대 명예교수, 강인덕 전 통일부 장관 같은 분들을 연사로 초빙해 통일을 주제로 강연을 듣기도 하고, 통일에 대한 기본적 자문을 대통령에게 드리는 일을 해요. 예컨대 정부의 5·24 조치와 별도로 인도적 차원에서 이산가족 상봉, 교류, 협력을 지속적으로 해 나가야한다고 건의하는 식이지요. 완전히 봉사직이에요.”

-평북 도지사도 맡았었다.
“우리나라 5천만 인구 중 평안북도 출신은 2세, 3세까지 합쳐 200만명 정도 됩니다. 이들은 ‘도민의 날’ 행사를 하고 체육대회도 열고, 옛날 시·군 별로 향우회도 갖고 성묘도 해요.”

-노인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이나.
“전 노인이라는 단어가 입에서 잘 나오지 않아요. 나이 들면서 철도 나고 세상 보는 눈도 좀 넓어지고, 젊었을 적 치열한 경쟁에서 벗어나 이제는 너그러워지고 편안해졌다고 할까요. 노인 그 자체가 훈장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지금까지 잘, 건강하게 명예롭게 후회 없이 살아온 것에 대해 스스로 가지는 훈장이지 남에게 자랑하고 대접 받으려고 하거나 나처럼 살라고 내세우는 건 아니라고 봐요.”

-아나운서는 어떤 직업인가.
“방송을 통한 우리 국민의 언어교육 선생이지요. 요즘 인터넷 언어를 비롯해 무분별한 외래어가 난무하고 젊은이들은 욕인지조차 구분하지 못하고 잘못된 어휘를 구사해요. 이런 것들을 마지막까지 지키는 사람들이에요. 그런 자부심을 가지고 있지요.”

-다시 마이크를 잡고 싶지 않는지.
“아유, 원 없이 했어요. 드라마 단역까지 했는 걸요. 마지막으로 MBC 아나운서 공개선발 프로그램을 석 달 정도 했습니다.”

기독교 장로인 차인태 전 아나운서는 “아침 식탁에서 ‘맨손으로 삼팔선을 넘어온 월남 피란민으로…’시작해 4형제의 이름을 다 부르고 끝나는 어머니의 진심 어린 기도가 오늘의 나를 있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글·사진=오현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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