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랄 때 먹던 음식 맛의 기억을 하나하나 살려 반가 음식 재현해냈죠”
“자랄 때 먹던 음식 맛의 기억을 하나하나 살려 반가 음식 재현해냈죠”
  • 배성호 기자
  • 승인 2015.06.26 16:56
  • 호수 4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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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반가 음식 후계자, 전통요리연구가 ‘김숙년’ 선생

부마‧형조판서 배출한 명문가의 장녀… 국전 서예부문 수차례 입선
은퇴 후 어머니 음식 재현하며 요리연구의 길로… 신사임당상 등 수상

서울 강북구 ‘북서울꿈의숲’에 위치한 창녕위궁재사. 2002년 서울시 등록문화재 40호로 지정된 이곳은 조선 23대 순조의 부마(駙馬)인 창녕위(昌寧尉) 김병주의 재사(齋舍: 자손들이모여 제사 지내는 곳)로 한일합병 후 김병주의 손자 김석진(당시 형조판서)이 일본의 남작작위를 거절하고 순국자결한 역사적 의미를 가진 건축물이다.
이 집에는 다른 이름이 있다. 바로 오현(梧峴)집이다. 최근 ‘오늘의 육아’(꽃숨)를 낸 요리연구가 김숙년(여‧80) 선생은 자신이 태어나서 결혼해 출가할 때까지 산 이곳을 오현집이라 불렀다. 조선시대 숱한 재상을 배출한 양반집안의 맏딸로 태어나 물 한 방울도 손에 묻히지 않았을 것 같은 그는 의외로 일제 치하와 한국전쟁 등 한국사의 풍파를 온몸으로 겪으며 살아왔다. 이화여대 가정학과를 나온 그는 어려서부터 어깨 너머 배운 서예로 국전에서 입선한 실력을 가지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성심여고에서 서예 교사로 교직생활을 시작했다.
김 선생이 요리연구가로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한 건 퇴임 후다. 서울 반가(班家) 음식을 먹고 자란 그의 머릿속에는 요리법과 맛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김 선생은 ‘김숙년의 600년 서울 음식’(동아일보사)을 발간하면서 본격적인 전통요리연구가의 길로 들어선다.
서울 송파구 자택을 방문해 전통요리연구가로 인생 이모작에 성공한 김숙년 선생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집이 스튜디오 같다.
“벽 한쪽만 새로 도배한 이유가 있어요. 이명박 대통령 시절 외국사절에게 줄 선물로 한국음식 책을 제작하기로 해서 제가 그 책을 만드는데 참여했죠. 책에 들어갈 음식 사진을 찍어야 하는데 나는 밖에서 하는 게 싫었거든요. 식기를 다 챙겨서 가면 무당 같은 느낌이 들어서 거절했어요. 결국 집 한쪽 벽만 노란색으로 칠해서 스튜디오로 만들었죠. 요리강습도 집의 식탁과 거실에서 하고 있어요.”

-평소 요리 연구는 어떻게 하나.
“계절에 맞게 집안에서 내려온 음식을 만들거나 기법을 응용해 만들어요. 거창하게 하지 않아요. 아침에 일어나면 노트부터 챙겨요. ‘오늘 아침엔 뭐 먹을까’, ‘혼자 먹어도 난 여왕이니까 요렇게 해서 먹어야지’, ‘생선을 비린내가 안 나게 이렇게 해서 구워야지’, 남으면 은박지에 반 토막을 싸놓았다가 점심에 마저 먹어야지‘ 하는 소소한 걸 기록합니다. 이렇게 고민하는 순간 떠오르는 모든 걸 흘려보내지 않아요. 밥을 먹는 순간이 요리연구죠. 밥만 먹어도 자꾸 할 일이 생겨요.”

-자손이 어떻게 되는지
“1남 2녀와 8명의 손주를 두고 있어요. 앞집에 사는 둘째딸이 언어학과 교수고 둘째 사위는 의사에요. 큰딸은 사업가한테 시집을 갔어요. 큰사위는 제조업을 하고 있고 아들은 현재 배명고등학교 교장으로 재직 중입니다.

-교육가들이 많이 배출됐다.
“아버지가 창문여고의 설립자입니다. 조선시대 아니 고려시대부터 교육자 집안이었대요. 서예와 그림에 능했던 문인들이 많았고 오늘날 장관에 해당하는 벼슬을 한 사람들이 많았답니다.

-어린 시절 가문의 위세가 어느 정도였나.
“오현집이 99칸짜리였어요. 할머니가 10남매를 낳았는데 아버지가 장남이라 다른 형제들을 돌봐야 했고 당숙, 당고모 등도 함께 살았습니다. 어머니는 종가집 맏며느리로 100여명의 음식을 차려야 했고요. 집이 커서 한국전쟁이 났을 때 북한군이 쳐들어와 막사로 이용할 정도였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폭격으로 유실된 집을 복원했지만 규모는 축소됐죠. 점차 함께 사는 식구가 줄어들었고 아무도 살지 않는 상태임에도 세금이 연간 수억 원씩 나와 오세훈 서울 시장 재임시절 서울시에 집을 기증하게 됐습니다.”

-서예는 어떻게 익혔나
“어깨 너머로 보기만 했어요. 어른들이 붓을 어떻게 들라고 가르쳐 준 적도 없었죠. 근데 쓰니까 자연스럽게 되더라구요. 조상들의 DNA가 내 몸에 새겨져서 저절로 쓸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20세기 한글 서예의 지평을 연 일중(一中) 김충현이 나의 작은 아버지에요.”

-교사 시절은 어땠나
“당시 학생들 상담을 맡아 방을 혼자 썼어요. 해방둥이 교사들이 많았는데 아침 7시부터 수업이 있어 식사를 못하고 오는 사람이 많았죠. 그럼 내가 밥을 줬어요. 술 먹고 골골거리는 선생들에게는 해장국도 끓여 줬고요. 내가 관둔다고 하니까 당시 선생들이 뭐 먹고 살아야 하는지 걱정된다 합창을 했다고 합니다.”

워킹맘이었던 김 선생은 1996년 정년퇴임 후 가정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교사 재직시절부터 음식 솜씨가 소문나면서 서울 반가 음식의 전통을 잇는 후계자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의 소문을 듣고 동아일보사에서 직접 나서 서울 반가 음식을 재현하자는 제안을 했다. 어머니가 남긴 자료가 없어 고민하던 김 선생은 책을 직접 만들기로 하고 혀와 머리에 남은 기억을 더듬어가며 ‘김숙년의 600년 서울 음식’을 집필했다. 현재 이 책은 7쇄까지 찍으며 서울 반가 음식의 바이블로 인정받고 있다. 이런 업적을 인정받아 2014년에는 신사임당상을 수상했다.

-요리 조기교육을 받았다는데.
“어렸을 때 소꿉놀이를 할 때 남들처럼 흙을 가지고 하지 않았어요. 실제로 쌀을 빻아서 떡을 만들거나 음식을 만들었어요. 어머니도 많이 도와드렸죠. 수십 명이 먹을 음식을 삼시세끼 만들어 내는 어머니 손이 마치 요술을 부리는 것 같았어요.”

-‘한식대첩’ 참가 제의를 거절했다.
“케이블방송 ‘올리브’ 채널에서 몇 년을 두고 제의가 계속 들어왔는데 싫다고 했어요. 나는 기능인이 아니고 요리연구가이거든요. 한식대첩은 제한된 시간 안에 요리를 해내야 하는 기능 대결이기 때문에 음식점을 연 적이 없는 내가 나가는 것은 맞지 않는 것 같아요.”

-외국인들도 한식에 관심이 많다.
“10여년 전에 타임지 부장급 기자가 나를 만나러 온 적이 있어요. 당시 그 기자는 하체가 뚱뚱한 미국인들의 체형을 바꾸기 위해 어떤 식생활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기사를 작성하려고 준비하고 있었죠. 그러던 중에 한국음식을 추천받았다고 합니다. 북한에 갈 수 없어서 우리나라에서 대상자를 찾던 중 나를 소개받았다고 해요. 서울 하얏트 호텔에서 만났는데 한국의 김치, 장, 젓갈 등은 수 천 년의 역사를 통해 탄생한 것인데 몇 십년 가지고는 도저히 따라 할 수 없다고 했어요.”

김 선생은 ‘오늘의 육아’, ‘105가지 김치’(동아일보사) 등 요리책과 동화책 ‘할머니가 물려주신 요리책’(장영) 등 10여권의 책을 낸 저자이기도 하다. 그는 3년 전 백내장 수술을 했는데 최근 다시 나빠져 재수술을 했다. 이로 인해 현재는 컴퓨터로 글을 쓰지 못하는 상태. 하지만 김 선생은 이에 굴하지 않고 양면괘지에 손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시간이 조금 오래 걸리지만 생각할 시간이 많아 더 좋은 글이 나오는 거 같다”며 그는 할머니와 손주들이 소꿉놀이 하는 내용을 담은 동화책을 얼마 전 탈고했다고 말했다.

-노인들이 여름에 무엇을 먹으면 좋은가.
“단백질과 비타민C가 풍부한 음식을 충분히 섭취하면 여름을 잘 날 수 있어요. 닭고기‧돼지고기‧소고기 등 동물성 단백질을 많이 먹는 게 좋죠. 두부는 쉬니까 조심하고, 콩국‧콩밥 등으로 식물성 단백질도 보충하고 채소, 과일을 많이 먹어 비타민도 충분히 채워줘야 합니다. 여름에는 입맛이 떨어지고 땀이 많이 나니까 짠 음식을 먹는 게 좋아요. 대신 칼륨을 함께 섭취해야 해요. 칼륨은 파란 잎사귀가 있는 채소에 많이 있어요. 감자도 쪄서 많이 드세요. 그러다 보면 저절로 제철 음식을 먹게 되죠.”

-인생 이모작에 성공했는데.
“석 달에 한 번씩 치매 체크를 하러 병원에 가는데 담당의사가 매번 나에게 물어봐요. ‘어떻게 하면 선생님처럼 이렇게 두뇌를 보존하죠? 배우고 싶다’고요. 그래서 나는 요리연구가 비결이라고 했어요. 매시간 생각하고 고민하고 그걸 적는다고 알려줬죠. 또 40여년 간 선생님을 하다가 예순이 넘어 직업을 바꿨다 했더니 의사가 박수를 치며 공감했어요. 60대에 직업을 바꾸면 생동감도 생기고 아이디어도 많아져 80을 넘어서도 건강해요.”
배성호 기자, 사진=조준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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