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분별을 일깨우는 노래 ‘앵화폭풍’
삶의 분별을 일깨우는 노래 ‘앵화폭풍’
  • 이동순 영남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 승인 2015.07.17 11:08
  • 호수 47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938년 오케레코드사는 특이한 제목의 음반 하나를 발표했다. 제목은 ‘앵화폭풍’(櫻花暴風). 조명암 작사, 박시춘 작곡으로 만들어진 이 노래는 가수 김정구가 걸쭉하고 구성진 음색의 만요 스타일로 불렀다.
여기도 사꾸라 저기도 사꾸라/ 창경원 사꾸라가 막 피어났네/ 늙은이 젊은이 우글우글 우글우글/ 얼씨구 좋다 응- 꽃 시절일세 헤헤이/ 처녀 댕기는 갑사나 댕기/ 총각 조끼는 인조견 조끼/ 밀어라 당겨라 잡아라 놓아라/ 두둥실 흥 꽃이로구나/ 일천간장 다 녹이는 꽃이로구나
낮에도 사꾸라 밤에도 사꾸라/ 창경원 사꾸라가 막 피어났네/ 혼 나간 범나비 너울너울 너울너울/ 얼씨구 좋다 응 꽃 시절일세 헤헤이/ 영감 상투는 삐뚤어지고 / 마누라 신발은 도망을 쳤네/ 영감 마누라 꼴 좀 보소 / 어헐싸 흥 꽃이로구나/ 싱긋벙긋 껄껄 웃는 꽃이로구나
제목의 앵화(櫻花)는 벚꽃이다. 사꾸라는 벚꽃의 일본말이다. 전체가사에는 1922년부터 해마다 열려온 ‘창경원 밤 벚꽃놀이’의 풍속도가 실감나게 담겨 있다. 창경원은 원래 조선왕조의 유서 깊은 창경궁이었는데, 1909년 일제는 궁궐의 전각을 헐고 그 자리에다 동물원을 조성했으며, 일본에서 왕벚나무 묘목을 1000그루나 갖고 와서 일본식 벚꽃 길을 조성했다.
해마다 봄이 되면 이른바 벚꽃 하나미(花見) 행사를 일본인 중심으로 하다가 1924년부터 본격적으로 일반에게 공개하는 창경원 야앵회(夜櫻會)를 시작했던 것이다. 이를 보기 위해 서울시민은 물론이고 전국에서 구름처럼 많은 인파가 몰려들어 이 일대가 온통 아수라장이 됐다고 한다.
일단 노래가사를 음미해 보면 전체에서 그 인파의 밀고 당기는 북새통과 아우성이 생생한 현장감으로 다가온다. 작가는 늙은이 젊은이가 우글우글하다고 대혼란의 현장을 표현한다. 또 창경원 벚꽃구경 간답시고 남녀노소 제각기 새 나들이 복장으로 뽐을 내고 있다. 그런데 그 외모가 ‘밀어라, 당겨라, 잡아라, 놓아라’하는 범벅 속에서 본연의 매무새는 다 ‘구겨지고, 삐뚤어지고, 도망치고, 찌부러지고, 찢어져’ 있다.
이 대목에서 작가는 몽매한 대중들을 향해 매섭게 한방 먹인다. 그 얼빠진 속중(俗衆)들의 꼴을 ‘혼나간 범나비’로 풍자하고 있는 것이다. 모두들 영혼이 빠져 달아난 무지하고 몽매한 바보들의 군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노래가 음반으로 만들어진 시기는 1938년이다. 그해 2월에는 지원병제도 발표가 있었고, 이미 실시해오던 신사참배 강요에 대해 전국에서 산발적 저항이 잇따른다는 기사가 심심찮게 언론에서 보인다. 일제는 한국인의 숨통을 더욱 옥죄는 방식으로 조선근로보국대 조직, 등화관제 규칙, 조선중요광물 증산령, 조선사상보국연맹 따위의 수상한 조직과 시행령을 시시각각 쏟아낸다. 군국주의체제가 한층 강화되면서 질식할 것 같은 식민지후반기의 사회분위기 속에서도 시대적 고통을 소낙비처럼 온몸으로 겪고 있던 피지배민중들의 현실은 이렇게도 한심하고 꼴불견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이 노래가사 전체를 음미하면서 특히 당시 노년세대의 모습을 유심히 지켜본다. 젊은이들에게 모든 것의 모범이 되고 삶의 훌륭한 선례가 돼야 할 노년세대가 오히려 한술 더 떠서 대혼란의 현장에 앞장서서 참가하고 있다.
가정의 무게중심으로 우뚝하게 자리해야 할 노부부가 어인 창경원 벚꽃놀이로 뜬금없이 무리한 걸음을 하다가 상투가 비뚤어지고 갓조차 모두 찌그러졌겠는가? 이는 당시 삶의 중심을 심하게 벗어난 노년세대의 이탈현상과 그 현실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고발적 세태풍자의 그림이라 하겠다.
품격이 있어야 존경 받을만한 기본적 위상에 자리하지 않겠는가.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제대로 가려서 실행하는 노년세대의 진정한 지혜가 그 어느 때보다도 필요한 시점이다. ‘곱게 늙는다’라는 말은 분명 인격에서 덕망의 향내가 풍기는 그런 듬직한 노년세대를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