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롭지는 않아… 과연 내가 잘 살아왔나 정리하는 시간도 가져요”
“외롭지는 않아… 과연 내가 잘 살아왔나 정리하는 시간도 가져요”
  • 오현주 기자
  • 승인 2015.07.17 11:19
  • 호수 47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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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양원에서 지내는 여배우 최은희
▲ 사진=중앙일보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북에 납치돼 8년간 억류 생활… 매일 북한 공작원에 쫓기는 악몽 시달려
“장례식장에 ‘나는 바보처럼 살았군요’라는 노래 틀어달라고 부탁했어요”

김정일의 지시로 북에 납치됐다 탈출했던 여배우 최은희씨의 근황은 충격적이었다. 올해 구순. 경기도 용인시 수지에 있는 한 요양원에서 지내며 척추협착증으로 5년 전부터 휠체어 신세를 졌고 1년 전부터는 일주일에 3회 신장투석을 할 정도로 건강이 좋지 않다.
최씨는 “병신이 다됐어요. 눈이 침침해져서 식탁 위의 반찬도 겹쳐 보일 때가 있어요. 어머니가 아프다면 주물러드렸는데 이제는 그 고통을 피부로 느낍니다”고 말했다.
최씨는 기력이 없어 보였지만 얼굴 표정만은 과거 화려했던 시절이 연상될 정도로 밝았다. 나이를 못 속이는 듯 손은 주름이 졌고 묵주반지를 끼고 있었다. 가늘어진 손가락 사이로 반지가 흘러내릴까봐 실로 칭칭 감았다. 최씨는 몸이 불편해 성당은 가지 않지만 묵주기도는 하루도 빠뜨리지 않고 한다. ‘성 나자로마을’을 세운 고 이경재 신부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세례명은 데레사.
최씨는 직접 낳은 자식이 없다. 대신 아들과 딸을 입양했다. 최씨의 남편 신상옥 감독(1926~2006)이 영화배우 고 오수미씨와 사이에 낳은 남매도 있다. 이들은 연락도 자주하고 음식을 해가지고 요양원을 찾아와 함께 식사를 하기도 한다. 병원생활이 어떠냐는 질문에 “외롭지는 않다”며 이렇게 대답했다.
“아픈 사람이 이렇게 많은 줄 몰랐어요. 아픈 사람들끼리 위안을 받기도 해요. 사람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거지요. 예전에 화려했던 순간, 숱하게 고생했던 일 등 여러 가지 생각을 하곤 해요. 내가 과연 잘 살아왔는지, 여생을 어떻게 마무리할 건지 정리하게 되고요. 나이 든다는 건 좀 더 자유로워지는 것 아니겠어요.”
최은희씨는 1960년대 신상옥 감독과 함께 한국영화 전성기를 이끌었다. 최씨가 주연으로 활약한 영화 ‘성춘향’(1961)과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2) 같은 영화는 지금까지도 명작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사랑방…‘은 당시 이례적으로 베니스영화제에 출품돼 한국영화를 알리는 계기가 됐다.
최씨는 1940년대 초반 연극무대로 출발했다. 배우가 기생처럼 천대받던 시절 동네친구의 권유로 극단 ‘아랑’을 찾아간 게 천직이 됐다. 그 시대엔 ‘연극을 하면 정신대에 끌려가지 않는다’는 말도 작용했다. 철모르고 결혼했던 첫 남편과 헤어진 후 신 감독이 제작하는 한국 홍보영화 ‘코리아’를 촬영하면서 신 감독과 가까워졌고 부부의 연을 맺었다. 신 감독은 그 이전에 최씨의 열렬한 팬이었다고 한다. 최씨가 연극 ‘춘향전’의 무대에 섰을 때 매일 연극을 보러갔다는 것이다.
신상옥 감독은 1960~70년대 자신이 경영했던 영화사 ‘신필름’을 통해 300여편의 영화를 제작했다. 김기영·김수용·이만희 등 걸출한 감독들이 모두 신필름을 거쳐 갔으며 신성일·김승호· 김진규 등이 신 감독의 작품에 출연하며 톱스타 반열에 올랐다.
두 사람의 결혼생활은 신상옥 감독이 여배우와 외도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파경을 맞았다. 최씨는 당시 “그 여배우가 신 감독의 자식을 낳을 때까지 그 사실을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다”며 “처음에는 원망스러웠고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웠지만 둘 사이에 아이가 두 명이라는 말을 듣고는 물러나야겠다고 생각했다”고 기억했다.
신 감독의 외도로 남남이 되었지만 최씨가 북에 납치됐을 때 그를 찾는데 가장 앞장섰던 이는 신 감독이었다. 이혼은 했지만 가슴 속 깊이 최씨에 대한 사랑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이혼 후 최씨는 안양예고 교장으로 재직하며 이별의 아픔을 달래기 위해 일에만 몰두했다. 어느 날 홍콩에 안양예고와 비슷한 성격의 학교가 있다는 말을 듣고 최씨는 자매결연을 맺기 위해 홍콩을 찾았다가 바로 북한 공작원에 의해 남포항으로 납북됐다. 최씨는 김정일을 처음 만났을 때를 이렇게 기억했다.
“김정일이 남포항으로 저를 마중을 나왔어요. 악수를 하자고 손을 내밀었지만 저는 악수할 기분이 아니어서 가만히 서 있었어요. 30대의 김정일은 성격이 활달하고 카리스마가 굉장히 강했어요. 저에게는 잘 대해줘 불편 없이 지냈어요 처음엔 ‘날 죽이려나’ 생각했지만 부드럽고 예의를 깍듯이 차려서 ‘죽이려고 데려온 것은 아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김정일은 “낙후된 북한영화를 국제적으로 키워보고 싶어 데려왔다. 앞으로 일을 좀 해달라”고 했다. 김정일은 세계영화를 1만 5000여편 소장할 정도로 영화광이었다. 한국작품도 많이 가지고 있었다.
신 감독은 최씨의 실종 소식을 듣고는 만사를 제치고 최씨를 찾아다녔다. 그 과정에서 신 감독도 78년 말, 북의 공작원에 납치됐고 탈출을 시도하다 붙잡히는 바람에 4년 넘게 감옥에 갇혀 있다가 1983년에야 최씨를 만났다. 최씨가 기억하는 극적인 상봉 순간.
“김정일이 주선한 파티에 초대 받아 갔는데 신 감독이 거기 있는 걸 보고 깜짝 놀랐어요. 김정일의 주선으로 우리는 다시 만나 부부의 연을 맺었는데 마침 그날이 30년 전 처음 결혼한 날이라 감회가 컸어요. 신 감독을 만나 북한을 탈출할 수 있을 것이란 희망도 갖게 됐어요.”
김정일은 2만평 규모의 ‘신필름영화촬영소’를 설립한 후 영화를 제작해달라고 해 신 감독은 ‘밀사’․‘소금’․ ‘철길을 따라 천만리’ 등 17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탈출 기회만 엿보던 두 사람은 1986년 3월, 운 좋게 오스트리아 여행 허락을 받았다. 비엔나의 미국대사관으로 무작정 달려가 CIA요원에게 도움을 요청, 영화 같은 탈출에 성공했다. 납치 8년만의 일이다. 최씨는 여전히 납북 후유증에 시달린다고 한다.
“지금도 북한공작원에 쫓기는 악몽에 시달려요. 누군가 저를 겨누고 있는 것 같은 공포심과 불안감에 사로잡혀요. 안 겪어본 사람은 모릅니다. 요즘 뉴스를 보면 북한 사회도 전보다 자유로워졌다고 하는데 제 경험에 비춰볼 때 수긍이 안돼요. 라디오 채널조차 고정시켜 놓은 곳이거든요. 오스트리아 미국대사관 안가에 도착해 ‘웰컴 투 웨스트’(Welcome to West)라는 말을 들었을 때 눈물이 펑펑 쏟아졌어요. 목을 놓아 울었어요.”
이후 미국 워싱턴DC 교황대사관에서 결혼미사를 올리고 다시 정식으로 부부가 됐다. 부부는 오수미씨가 낳은 자식과 입양아를 모두 미국으로 불러들여 함께 살았다. 최씨는 이때 비로소 평범한 아내의 행복을 맛보았다고 한다. 신 감독은 미국에서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마유미’․ ‘실종’ 등을 제작해 화제가 됐지만 흥행에는 별 재미를 보지 못했다.

▲ 영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의 한 장면.

두 사람은 고국을 잊지 못해 2000년 한국으로 돌아왔다. 신 감독은 70이 넘은 나이에도 영화에 대한 열정은 여전해 치매 노인 문제를 다룬 ‘겨울 이야기’를 제작했지만 개봉은 하지 못했다. 2006년 간이식 수술을 받은 신 감독은 회복하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요즘도 매일 신감독이 꿈에 나타나요. 말을 주고받을 수는 없지만 그 양반은 항상 뭘 하고 있어요. 시나리오를 쓰거나 책을 읽고 있거나… 평생 영화밖에 모르던 외골수였잖아요. 술도 담배도 못했고요. 천당에서 다른 영화인과 함께 뭔가 찍고 있을 겁니다.”
최은희씨는 출연작마다 대히트를 쳤고 ‘대종상 여우주연상’(1962, 65, 66년),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 보관문화훈장’(2014년) 등 큰 상도 많이 받았다. 어떤 여배우보다 화려한 명성을 얻었고 경제적으로 풍족한 삶을 살았을 것이다. 그런데 대답은 의외였다.
“화려하게 살아온 것 같지만 지금까지 변변한 패물 하나 없어요. 촬영장마다 짐을 풀고 다시 싸는 ‘트렁크 인생’이었어요. 신 감독과 함께 하면서도 개런티 한 번 제대로 받지 못했어요. 돈 한 번 풍족하게 쓴 적도 없었고요. 제일 좋아하는 노래가 김도향의 ‘나는 바보처럼 살았군요’에요. 장례식장에 틀어달라고 부탁도 해놓았어요.”
신상옥 감독 소지품과 자신이 쓰던 물건을 차곡차곡 모아두었다는 최씨는 “죽기 전에 ‘신상옥기념관’을 짓는 것이 꿈”이라고 말했다.

▲ 최은희·신상옥 부부의 젊은 시절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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