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하는 한국의 대통령들] 박정희 前대통령 ②
[장수하는 한국의 대통령들] 박정희 前대통령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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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6.08.25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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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묵했지만 세상에 대한 깊은 생각으로 들끓었다

본지는 우리 한국의 전직 대통령들이 대개 장수하는 데 주목하여 은퇴한 노인으로서 겪는(은) 일상의 작은 행복과 세월의 무상함 등을 살펴볼 수 있는 지면을 마련했습니다. 공과 과가 있겠으나 어차피 전직 대통령들은 역사입니다. 따라서 정치적 편향성 없이 나라와 민족을 위한 선의는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며 인간적인 관심사와 삶의 즐거움, 건강생활, 원로로서의 자리 등을 살펴보고 건강 노년, 문화노년 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 세번째로 박정희 전대통령 편을 4회 연속 게재합니다. 

 
한국 나이(1917년생)로 치면 서거할 당시 63세. 1979년 우리나라 사람 평균수명을 기준으로 한다면 결코 그 일생이 짧은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한 나라의 국정을 이끈 최고 통수권자로서 63세의 일기는 그리 길다 하기 어렵다.


1979년의 그날 ‘10·26’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박 대통령은 장수했을까  대통령이라는 지위에 맞는 의료서비스를 받고, 최고의 조리사가 영양을 챙겼을 터이므로 다른 대통령들과 마찬가지로 장수했을 것이 확실하다.

 

육영재단의 최수현 자료실장은 “곁에서 직접 대면한 적은 없으나 원체 많이 움직이신 분이어서 오래 살 체질이었던 것 같다”고 한다. 재임 중 국정을 그렇게 적극적으로 챙기느라고 앉을 새도 없이 분주했던 것 같다면서 “즐기던 막걸리가 몸에 안 좋다 하여 가끔씩 양주로 바꿔 즐기는 정도였다”고 한다.


‘한국의 장수하는 대통령’ 시리즈 세번째 순서로 박정희 대통령을 상재하는 것은 그 점에서 의미가 있다. 또 대통령의 장수를 말하는 것이라면 한 개인으로서 ‘생명의 물리적 존속기간’ 이상의 의미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국가와 민족의 지도자로서 어떻게 그 이름을 뒤에까지 남기게 되는지에 대해서도 관심가지 않을 수 없다.


박정희 청년의 내면을 보기 전에 겉으로 드러나는 건강 상태를 보자. 대구사범학교에서도 체력적인 면이나 군사훈련 면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만주군관학교에서는 수석으로 졸업했을 정도였으니 체질적으로 건강한 몸을 타고 난 사람이었다.

 ‘박정희 바로 알리기 자발적 국민모임’(이하 바로 알리기)에서 펴낸 책에 나오는 만주 군관학교 선배 방원철씨의 증언은 체력적으로 박 대통령이 강했던 사람이라는 사실을 단적으로 뒷받침한다.


“후배들 군기를 잡는다고 박정희를 주먹으로 때린 적이 있다. 다른 사람은 턱을 맞으면 휘청휘청하는데 그는 딱 버티고 서서 차돌같이 단단한 느낌이 들었다. 맞아서 몸이 밀리면 금방 제 자릴 와서 다음 주먹을 기다리는 것을 보고 지독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는 우리보다 나이가 많은 것을 몰랐다.”

“차돌같이 단단한 느낌이 들어”


하지만 후천적인 환경이 요즘 유행하는 말로 ‘웰빙’하는 조건은 아니었던 듯하다. 체력은 강했으나 일제시대를 사는 젊은이로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서 고뇌할 게 많은 사람이었다. 몸에 해로운 담배를 즐기고 술도 많이 마실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위의 ‘바로 알리기’ 책에서 만주 군관학교 동기생 이재기씨는 박정희 대통령이 외출을 나가면 규칙을 어기고 줄담배를 피웠을 정도였다고 증언한다. 담배 피운 것이 발각되면 퇴학을 당할 수 있어서 외출에서 돌아오면 칫솔질을 열심히 해서 담배냄새를 없애려고 한 모습을 기억한다는 것이다.


훗날 청와대에 들어간 뒤에도 박정희 대통령은 담배를 많이 피웠다. “뭔가 깊은 생각에 골몰하게 되면 저녁 시간에 새로 놓아둔 재떨이가 아침에 가 보면 가득 차 있는 경우가 있었다”는 육영수 여사의 육성 기록도 남아 있다.


그런가 하면 박정희 대통령은 평생 울분이나 고통을 음악을 통해 해소했던 것으로 보인다. 박근령 이사장의 한 지인은 피아노나 기타 같은 음악 연주나 노래를 불러 위로받는 것 같았다고 한다. 일종의 음악요법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마음을 정화했다는 이야기다.


조갑제 기자는 ‘내무덤에 침을 뱉어라’에서 신현준의 증언이라며 노래 하나를 소개한다. “조팝 깡다귀에/소금국만 먹어도/광복군 정신만은/씩씩하게 살아 있다”는 노래를 박정희 대통령이 작사 작곡하여 혼자서 콧노래를 부르곤 했다고 한다.

 

 이 노래를 하도 많이 들어서 50년이 지난 뒤에도 기억이 난다고 했다는 것이다. 과장도 없지 않겠으나 박 대통령이 사범학교시절부터 나팔을 불며 음악을 즐긴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새마을 노래’외에도 둘째딸 근령씨가 쓴 곡에 박 대통령이 가사를 붙인 건전가요 ‘나의 조국’을 만들기도 했다.

깊은 내공·과묵한 성격으로 각인


건강 체질에다 음악을 통한 스트레스 해소 비결도 있었으니 박정희 대통령의 청년 시절이 밝고 활달했을까  전혀 아니다. 청년 박정희의 트레이드 마크는 과묵함이었다. 가족들이나 휘하 측근들에 의하면 유머러스한 면도 많지만 부인 육영수 여사가 평생을 ‘여보’라고 부르지 못하고 ‘이거 보세요’식으로 어렵게 불렀을 정도로 위엄이 있었다.


대구사범학교 기록에 의하면 종합적인 평가란에 “빈곤, 음울, 활발하지 못하다”고 적힌 곳이 많다고 한다. 이로 보아 활발한 학교생활을 한 것 같지는 않다.

 

‘바로 알리기’ 책에는 또 “결석일수가 많고, 학업 성적도 하위권에 들었으나, 세계문학전집, 풀루타르크 영웅전, 고전, 역사, 소설, 전기 등 다양한 독서를 하면서 지적 세계를 넓히고 교양을 쌓았다”고도 한다.


대구사범학교의 은사였던 김영기씨의 증언에 의하면 박 대통령은 “무인다운 기골을 지니고 있었으며, 입은 천근같이 무겁고 성격은 침착했으며, 창백한 기품과 함께 정의감이 강했다”고 한다.


조갑제 기자는 과묵함을 “‘생각이 많음’이란 뜻의 다른 표현이다”며 “말이 적었던 만큼, 아니 말이 적었기 때문에 박정희는 생각을 많이, 깊게 하게 되었다. 계산, 구상, 상상, 계획, 반성 등등의 과정을 담은 이 생각에 시간을 많이 보낸 이가 박정희였고, 그의 힘은 바로 이 생각의 축적량이 엄청나다는 데서 나왔던 것이다”고 한다.


요즘 쓰는 표현으로 말없음은 결국 ‘내공’이 깊다는 것을 의미했다. 리더십, 카리스마는 결국 거기서 연유한다고 할 수 있다. 박정희 대통령을 겪어본 숱한 사람들이 한결같이 내공이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기억하고 있기도 하다.


깊은 내공의 내용을 짐작해 볼 수 있는 자료들을 보자. 문경보통학교 제자 황실광은 조선어를 가르치며 “학생 한 사람을 복도에 세워놓고 일본인 교장이나 교사가 오지 않나 망을 보게 했다”고 한다.

 

또 만주 군관학교 시절 동기 이기건은 “내가 처음 박정희를 만났을 때 ‘왜 여기에 왔느냐 ’고 물었더니 그는 당돌하게 왜놈 보기가 싫어서 왔다고 하더라. 나는 그때 ‘일본놈’이라고 하지 ‘왜놈’이라고는 하지 않았다”고 했다.

 

‘왜’란 일본을 비하하는 표현으로 그만큼 일본에 대한 감정이 안 좋았다는 것을 뜻한다. 박근령 이사장의 지인은 이런 감정 때문에 훗날 청와대에서도 가끔 사용하고 육영수가 고운 말을 사용하자고 말하기도 했다고 한다.

혼란·부정부패 보며 의식 드러내


일본 육사를 같이 다닌 이섭준은 “일본육사 교육은 만주군관학교보다 더 정신적으로 쥐어짜는 것이었다. 박정희는 여기서도 모범생이었다. 그는 도무지 말이 없었기 때문에 한문 선생이 ‘박정희의 작문에는 뭔가 숨어 있는데 뭔지 잘 모르겠다’고 한 적이 있다”고 하기도 했다.


박정희 청년의 속내를 엿보게 하기에 충분하다. 식민지 시대를 사는 지식인으로서 당시 사회를 우울하게 바라보지 않는다면 그것이 이상한 일이었다. 게다가 박 대통령은 당시 구미지역의 지성인이었던 형 상희씨로부터 영향을 받고 자랐다.

 

과묵했지만 내면에서는 세상에 대한 생각으로 들끓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대통령이 된 훗날, ‘깊은 물은 고요하다’라는 휘호를 남긴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깊은 생각은 해방 뒤 극심한 혼란상을 보면서 실체를 서서히 드러낸다. 실록 소설 ‘청년 박정희(정영진 저)’에 의하면 일본인들이 명태와 조선인은 패야 한다는 말을 할 때 왜놈들을 패주고 싶었는데, “오늘 이 꼬라지를 보니 그런 히니꾸(비아냥)를 들어도 싸다 싶습니다…”라고 했다고 한다.

 

6·25를 겪은 뒤 군 장성으로 재직하면서도 지인들이나 뜻있는 인사들에게도 그런 철학의 일단을 조금씩 피력하기도 한다. 이것은 1961년 ‘5·16혁명’ 뒤 사회 지도층 인사들에게 요구되는 ‘지도자도(指導者道)’로 세상에 구체적으로 드러나게 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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