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이력
제2의 이력
  • 신은경
  • 승인 2015.07.24 11:32
  • 호수 47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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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요즘 폴 투르니에가 쓴 ‘노년의 의미’라는 책을 읽고 있다. 심리학과 기독교 상담 영역에 두루 관심을 보이는 저자는 인간적인 문제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몸의 질병과 치료에 영향을 미친다는 ‘인격의학’을 만들어 낸 스위스 출신의 정신의학자이다.
그는 저녁시간 벽난로 앞에 환자와 마주앉아 한가한 대화를 나누는 것이 신체적인 질병치료에 도움을 준다고 주장하는 의사다. 말하자면, 환자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격려하며 함께 걱정하고 고민을 이해해 주며 함께 삶을 나누는 것이 어떤 약보다도 효과적이라는 얘기다.
이 책을 들고 다니는 나를 본 사람들은 책 표지와 내 얼굴을 번갈아 보면서 ‘아직 그 책을 읽을 나이는 아니잖아’하는 표정을 짓는다. 그러나 그의 나이 72세에 쓴 이 책에는 노년을 잘 보내기 위해서는 젊었을 때 열심히 일해 돈을 벌어두는 것이 아니라 노년을 즐겁고 보람 있게 보낼 즐거운 여러 가지를 미리 배워두고 연습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타이밍은 은퇴하는 60대 이후가 아니라 한참 바삐 일하는 40대나 50대에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이 폴 투르니에의 주장이다.
은퇴 후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것은 허탈함과 상실감이다. 더 이상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이 없다는 것을 느끼며 원망과 낙심으로 자신이 쓸모없는 존재라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은퇴 후 시간 관리를 잘 하는 사람들도 있다.
어떤 이는 은퇴 후에도 이전과 마찬가지로 이른 아침에 일어나고 어디론가 출근을 하기도 한다. 내가 아는 사회 저명인사는 매일 아침 단정하게 옷을 차려입고 2층 자신의 서재로 ‘출근’을 한다. 그곳에서 종일 책을 읽고 연구를 하다가 아래층으로 ‘퇴근’을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의 고모부는 젊어서 꾸준히 테니스를 즐기시던 분인데 지금 여든이 훌쩍 넘은 나이에도 일주일에 한 번씩은 친구들과 만나 테니스를 치기 위해 2시간 거리를 운전하여 간다며 노익장을 과시한다. 어떤 40대 교수는 고단한 일정 가운데에서도 일주일에 한 번씩 미술교실을 찾아 그림을 그린다. 그림을 그리는 동안은 세상 모든 고단함을 완전히 잊게 된다고 말한다. 이런 사람은 은퇴 후 행복한 삶을 착실히 연습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바람직한 ‘노년이 의미’에서 눈길을 끄는 한 가지 단어가 바로 ‘제2의 이력’라는 용어이다. 직업상의 이력과 비교해서 ‘제2의 이력’이란 단순한 여가활동이나 취미생활과 조금 다른 차원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제2의 이력은 여가활동에 비해 다른 동기, 상대적으로 사회성을 띤 동기에서 시작된다. 또 성실하고 이기적이지 않은 마음가짐을 요구하며, 조직적으로 행해지는 어떤 목적이나 사명을 띤다고 정의한다.
돈을 버는 직업과 관계가 없기 때문에 의무적이지는 않지만 인간에 대한 사랑이 우선돼야 한다고 한다. 폴 투르니에가 말하는 제2의 이력은 ‘현실세계로 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참여’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 취미로 노인 건강교실을 다녔는데 그로인해 건강에 더욱 관심을 갖게 되고 헬스 케어 강사가 되어 전국을 순회한다든가, 아니면 강사는 되지 못했다 하더라도 전문 강사를 모시고, 관심 있는 은퇴자들을 모으고, 시간표를 짜서 지역사회를 위한 노인 건강교실을 새롭게 운영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들이 모여 지역 아동들에게 혹은 장애인들에게 가르치며 봉사하는 생활을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제2의 이력은 봉사의 차원이며 문화적인 성격을 띤다.
생각할 거리를 많이 제공하는 책이어서 천천히 음미하고 읽다가 딸아이에게 물었다. “엄마는 어떤 제2의 이력을 가지면 좋을까?” 그랬더니 딸아이의 대답이 놀랍다. “엄만 이미 제2의 이력에 들어섰잖아” 한다.
그러고 보니 그렇기도 하다. 직업으로의 방송인이 아니라, 봉사와 사명으로 하는 방송을 하고 강연을 하고, 후학들을 지도하러 먼 길을 오가는 나의 요즘 생활은 분명 ‘성공과 명성과 돈’을 위한 일이 아니라 ‘봉사와 사명’의 이력임이 확실하다. 아니, 벌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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