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사하러 떠난 해외여행… 10년 만에 건강해져 돌아와 화가로 변신
객사하러 떠난 해외여행… 10년 만에 건강해져 돌아와 화가로 변신
  • 오현주 기자
  • 승인 2015.08.21 13:34
  • 호수 48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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췌장암 극복한 시인 전규태

호주에 집짓고 생식하며 해외여행 다녀… 그림·여행이 건강 회복 비결
교수·문인으로 잘 나갔지만, 교만과 아집 모두 내려 놓은 지금이 행복

“하루 종일 달려도 풀 한포기 없는 황무지 ‘눌라보’를 가보라.”
10여년간의 해외여행에서 돌아온 전규태(82)씨에게 혼자 떠나는 여행은 어디가 좋으냐고 묻자 이렇게 말했다. 지난 8월 초, 경기도 고양시 삼송동 임대아파트 전씨의 집 거실. 전씨는 “눌라보는 호주의 지명으로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다. 그곳에서는 눈앞에 보이지 않는 지도의 모든 부분은 공백임을, 마음이란 눈으로 볼 수 있는 공간보다 더 큰 것을 생각해낼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고 덧붙였다.
전씨는 100여권의 저서를 남길 만큼 활발한 집필활동을 한 시인이자 문학평론가다. 외국에서 가장 오랫동안 한국학을 가르친 교수인 동시에 한국의 고전문학과 현대문학을 체계적으로 연계한 최초의 국문학자이기도 하다.
그러나 2000년 들어 문단과 학계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췌장암에 걸려 시한부 삶을 선고받았고 객사하러 해외여행을 떠났다는 얘기도 가까운 지인들만 알고 있었다. 그런 그가 멀쩡히 살아있으며 책까지 펴냈다고 해 만났다.

-언제 암 소식을 들었나.
“1998년 복통이 너무 심해 병원에 갔다가 발견했어요. 수술하려고 배를 가른 담당의사가 ‘그냥 덮자’고 할 정도로 악화된 상태였지만 일단 수술을 받았어요.”

-수술은 성공적이었나.
“췌장을 반쯤 잘라내고 비장은 아예 들어내고 대장의 일부도 잘라냈어요. 수술 직후 담당의가 여행을 권해 항암치료도 받지 않은 채 호주로 떠났어요. 당시 오갈 데도 없었고 딸도 그게 좋겠다고 했어요.”

-오갈 데가 없었다니.
“집이 없었어요. 아내가 저 모르게 돈을 빌려 아들 사업자금을 대주었는데 잘 안됐어요. 빚 8억8000만원을 대신 갚느라 집을 포함해 모든 재산 날리고 길거리에 나앉았지요. 아내는 가출했고 아들도 행방불명 됐어요. 친구들이 절 위로한답시고 술을 사주었어요. 여기저기 전전하던 중 복통이 생기더라고요. 충격으로 인한 스트레스와 음주 등으로 암에 걸린 것 같아요.”

-왜 호주였나.
“1985년 무렵 호주국립대학 정교수로 5년간 한국학을 가르친 적이 있어요. 호주 수도 캔버러의 ACT(호주 국유지) 지역 땅 200평을 빌려 최소한의 비용으로 집을 지었어요. 호주의 땅은 대부분 국유지로 임대기간이 100년이에요.”

-여행경비는 어떻게 조달했나.
“교수연금을 깼어요. 췌장암은 99%가 5년 이내 사망해요. 어차피 살지 못할 바에 연금이 무슨 소용이 있나 싶었지요.”

-호주에서 무얼 했나.
“그 집을 베이스로 삼아 세계를 다녔어요. 유럽·남미·아메리카 등 안 간 곳이 없어요.”

-여행을 안 할 때는 그 집에서 무얼 했나.
“그림을 그렸어요. 어릴 적 꿈이 화가였어요. 사생대회 나가면 항상 일등을 했지만 집안에서 화가는 가난하다는 이유로 반대했어요. 그림을 정식으로 배운 건 아니고 독학으로 익혔어요. 여행 중 도움을 주는 이들에게 초상화라도 그려주려는 생각에서요.”

-식생활은.
“생식을 주로 했어요. 당근·양배추 등 채소를 잘게 썰어서 먹었어요. 건강 회복에 도움이 컸다고 봐요.”

-사람들을 만나지 않았나.
“담당의사가 저에게 3S(스트레스·섹스·스크린)를 멀리하라고 했어요. 스트레스는 사람에게서 받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가까운 사람이 주니까 알고 지내던 이들을 되도록 만나지 말고 산속 깊이 들어가든가 아니면 외국으로 가든가 하라더군요.”

-스크린은 무언가.
“TV·영화·인터넷 같은 거에요. 그런 걸 많이 보면 녹내장이 온다고 해요.”

-고독도 스트레스의 원인일 텐데….
“한국에서 ‘절대고독’을 견디지 못하고 허우적거릴 때면 자리를 박차고 으슥한 산길을 도보로 여행하곤 했어요. 한밤중에 상원사에서 암자로 가는 산길을 걸었어요. 길은 몹시 가파르고 숲이 우거져 으스스할 법도 했지만 달빛이 유난히 밝아 아늑했어요. 세계 도처에서 달을 보았지만 여기에 비할 곳이 없어요. 실크로드의 한적한 길목에서도, 도나우강의 연변에서도, 안데스의 잉카 로드에서도 보았지만 상원사 수행길의 달빛에는 견줄 수가 없었어요.”

-완치됐다고 느낀 건.
“호주에서 몇 달 지낸 후 딸에게 전화했더니 딸이 놀라더라고요. 의사가 딸에게만 3개월 시한부란 말을 했다고 그제야 아비에게 말해주었어요, 죽지 않고 전화했으니까 살아난 셈이지요.”
2011년 잠시 귀국한 사이 호주의 집에 불이나 전소됐다. 호주에선 매년 큰불이 난다. 불이 쉽게 붙는 잎을 가진 ‘검트리’라는 나무 때문이다. 당시 화재로 470여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전씨는 “임시로 살 집이라 보험도 들어놓지 않아 그것으로 끝이었다”고 말했다. 이후 국내에 눌러앉았다.
전규태씨는 연세대 국문학과와 동대학원을 나와 동양통신 기자를 2년여 하다 교수가 됐다. 한양대·연세대·전주대 교수를 역임했고, 시드니대·하버드대·컬럼비아아대 교환교수를 지냈다. 호주국립대학 정교수로 5년간 학생들을 가르쳤다. 동아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부문으로 등단한 문학평론가이며 시인이자 한일 비교문화 연구자이다. 현대시인상, 국가공로자 서훈, 국민훈장 모란장 등을 받았다. 시집 ‘길 그 너머의 그리움’ ‘한국고전문학사’ ‘한국현대문학사’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새로운 작문’ 등 3종의 교과서를 집필했다. 최근 장기간의 호주생활을 정리한 산문집 ‘단테처럼 여행하기’(열림원)를 펴냈다.

-호주국립대에선 무얼 가르쳤나.
“한국학이요. 단군신화 등을 가르쳤어요. 한국학의 원형이 신화에요. 일본 신화의 뿌리도 모두 우리 신화입니다. 호주 외교관 중 저에게 배우지 않은 이가 없을 정도에요.”

-혼자 떠나는 여행이 좋은가.
“젊었을 적부터 여행을 좋아했어요. 외국 대학에서 한국학 관계학과가 창설될 때마다 자원해 나갔기 때문에 그동안 줄잡아 10여 차례 세계 일주를 한 셈이에요. 혼자 긴 여행길에 나선다는 것은 나 아닌 또 하나의 나를 찾는 길이에요. 해외여행을 오래하다 보면 고향에 대한 그리움도 생기고 자기 자신을 객관화해서 볼 수 있는 기회도 생겨요. 그게 나를 찾는 길입니다.”
-여행을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여행의 특징은 호기심·도망·발견·자유예요. 호기심은 여행자의 발길을 재촉합니다. 프랑스 시인 샤를 보들레르는 일찍이 ‘여행은 도망’이라고 했어요. 보들레르는 도시와 일상에서 도피하고 싶어 했어요. 여행은 습관화된 생활에서 벗어나는 것이기도 해요. 오래 눈에 익었던 사물에서도 여행 중에는 새로움을 발견합니다. 끝으로 여행은 우리를 해방시켜줍니다. 여행을 하면서 자유를 느껴본 사람이 인생에 있어서 자유인이 된다는 것은 확실해요.”

-살아온 과정이 드라마틱하다.
“젊은 나이에 교수가 됐고, 해외 교환교수로 나가도 봤고… 내 능력에 비해 너무 과중한 업무에 겁을 먹기도 했지만 저도 모르는 사이에 교만과 아집도 있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요즘은 모든 걸 내려놓고 역지사지의 마음으로 살아 편하고 행복해요.”

-죽음을 어떻게 생각하나.
“삶의 고비를 넘기고 나니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졌어요. 저는 죽음과 사랑을 동일선상에 놓고 봅니다. 죽으면 옷을 벗고 사랑도 하려면 옷을 벗어야 하니까요.”

-하루를 어떻게 보내나.
“그림을 그립니다. 그림 그리는 동안은 무념무상이 돼요. 어떤 날은 하루 종일 그려요. 풍경화·인물화·추상화 등등 장르 구분 없이 그려요. 한국미술협회 고문이고 귀국 후 전시회를 3회 했어요.”

-생활은 어떻게 하나.
“‘창조문예’란 기독교 잡지에 연재도 하고 그림도 팔아요. 시는 한편에 몇 만원이지만 10호짜리 풍경화는 인사동 화랑에 맡겨놓으면 100만원도 받아요.”

전규태씨는 슬하에 1남 3녀를 두었다. 딸들은 출가했다. 아들은 여전히 신불자로 남아있고 가출했던 부인은 현재 요양원에 있다. 대한노인회가 펼치는 재능나눔활동사업에도 참여해 경로당에서 한자·문장수업 등을 지도한다.
글·사진=오현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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