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은 ‘도서관’이다, 치매를 피할 수 있다면…
노인은 ‘도서관’이다, 치매를 피할 수 있다면…
  • 배성호 기자
  • 승인 2015.08.21 13:53
  • 호수 4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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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소설이 그리는 노인들의 모습
▲ 노인 독서 인구가 증가하면서 소설 속 노인의 역할도 조연에서 주연으로 변하고 있다. 사진은 노인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2000년대 소설들.

‘창문 넘어 도망…’ 주요 역사와 호흡한 한 노인의 100년사 담아
‘살인자의 기억법’ 치매에 걸린 노인 연쇄살인범의 부성애 다뤄
‘몸의 일기’ 10대에서 80대로 늙어가는 몸의 변화 일기로 그려

소설가 박범신(69) 씨가 올해 2월부터 출판사 문학동네 인터넷 카페에 연재해온 장편소설 ‘꽃잎보다 붉던’이 최근 완결됐다. 70대 후반인 노부부가 치매에 걸려 함께 죽어가는 사랑 이야기를 다루며 인기를 끈 소설은 오는 10월에 책으로도 출간될 예정이다.
2009년 여고생을 향한 노(老) 시인의 사랑을 담은 ‘은교’를 통해 30만 독자의 호응을 이끌어낸 적이 있던 박 씨는 이번에도 노인의 사랑을 전면에 내세운 작품으로 독자들에게 다가서고 있다.
최근 베이비부머들의 노인세대 편입 증가로 책을 읽는 노인들이 늘고 있다. 국립중앙도서관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60대 이상 도서관 방문자수는 17만8984명으로 전체(82만4233명)의 21.7%를 차지했다. 이는 2006년 12.4%에 비해 두 배 가까이 비중이 커진 것이다.
이런 분위기를 반영하듯 문학계에서도 조연에 불과했던 노인들이 주연으로 등장해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폭넓은 사랑을 받고 있다. 이들 작품 속 노인들은 늙고 나약한 단편적인 이미지를 벗어던지고 입체적인 캐릭터로 등장하면서 많은 지지를 얻고 있다.
주요 작품 속 노인의 모습을 통해 2000년대 소설이 노인을 어떻게 그리고 있는지 정리해본다.

◇노인은 ‘도서관’이다=‘노인 한 사람이 죽으면 도서관 하나가 불타는 것과 같다’라는 아프리카 속담이 있다. 수십년의 세월을 살아온 노인이 가진 지식이 도서관에 버금간다는 뜻이다. 바꿔 말하면 평범한 노인이라도 그 사람 자체가 하나의 역사가 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 스웨덴 작가 요나스 요나손이 쓴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열린책들)이다. 작품은 주인공 알란이 100세 생일에 양로원을 탈출한 후 우연히 갱단의 돈 가방을 손에 넣으면서 벌어지는 갱단과의 추격전과 폭약 전문가로 살아온 100년의 개인사를 교차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주목할 점은 알란의 100년사가 20세기 세계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는 점이다. 알란은 ‘검둥이’를 보겠다며 스페인에 갔다가 우연히 내전에 참가해 독재자 프랑코 장군의 목숨을 구하고, 미국 로스앨러모스 국립 연구소에서 웨이터로 일하다 미국 과학자들에게 핵폭탄 제조의 결정적 단서를 알려준다. 훗날 러시아도 술에 취한 알란이 흘린 정보로 핵 개발에 성공하지만 정작 알란은 스탈린에게 밉보여 블라디보스토크로 노역을 갔다 가까스로 북한으로 탈출한다. 기쁨도 잠시 김일성과 어린 김정일을 만나 다시 위기에 처하는데 과거 마오쩌둥의 아내를 구한 인연으로 목숨을 구한다.
작품은 오랜 시간 역사와 호흡하며 나이를 먹은 노인의 특징을 살린 캐릭터를 통해 스페인 내전, 중국 국공 전쟁, 한국 전쟁, 미국과 러시아의 핵 개발 경쟁 등 굵직굵직한 주요 사건을 풍자하고 있다. 올해 초 1000만 관객을 동원한 ‘국제시장’도 노인 캐릭터가 가진 이러한 힘이 통하면서 성공할 수 있었다.

◇노인 최대의 적, 치매=최근 표절 논란으로 씁쓸하게 퇴장한 신경숙의 최대 히트작 ‘엄마를 부탁해’(창비)는 치매에 걸려 집을 나간 어머니를 둘러싼 사건을 그린 작품으로 밀러언셀러를 기록했다. 외국 작품에서도 치매는 큰 관심사다. 대표적인 작품은 최근 영화로도 개봉된 ‘스틸 엘리스’이다.
치매는 노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질병 중에 하나이다. 이로 인해 소설에서 가장 많이 차용되는 소재이기도 하다. 초기엔 치매 환자의 비극성을 그리는데 급급했지만 최근엔 여기서 더 발전돼 문학의 주제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소재로 사용되고 있다. 대표적인 작품이 지난해 발간된 김영하의 ‘살인자의 기억법’(문학동네)이다. 영화로도 제작 예정인 이 작품은 치매에 걸린 연쇄살인범 노인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한때 수의사로 일했고 시집도 한 권 낸 적이 있는 70살 노인 김병수. 그는 철저한 자기 통제로 20여년간 연쇄살인범이라는 정체를 숨긴다. 하지만 그가 알츠하이머성 치매에 걸리면서 이야기는 급박하게 진행된다. 기억이 사라져 가는 자신을 지키기도 벅찬 상황에서 새로운 연쇄살인범이 마을에 등장해 자신의 딸이 위험에 빠진다. 기억을 잃지 않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김병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의 딸을 향한 위협은 점점 커져간다.
이야기가 전개 될수록 치매 증상이 심해져 오락가락하는 김병수의 모습은 실제 치매환자와 대화를 나누는 듯한 느낌을 준다.
치매 환자의 고통은 그대로 전달하면서 정체성을 잃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인간의 본능도 잘 담고 있다.

◇누구나 노인이 된다=세상을 떠난 80대 노인이 딸에게 유품으로 자신의 일기장을 남겼다. 10대 때부터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쓴 일기는 하루 일과를 쓴 보통의 기록이 아닌 ‘몸’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그렇다 해서 투병기를 담은 것도, 건강 유지 비결을 전수한 것도 아니다. 양치질의 귀찮음과 코딱지를 가지고 노는 소소한 이야기부터 동성애‧월경‧불면증‧몽정‧섹스 등 진지한 주제까지 몸에 관한 온갖 생각을 기록하고 있다.
지난 7월 발간된 프랑스 작가 다니엘 페나크의 장편소설 ‘몸의 일기’(문학과지성사)는 20대부터 서서히 늙어가는 몸의 변화를 그린다. ‘사람은 누구나 노인이 된다’는 진리를 담고 있는 작품으로 늙어서 병들거나 나약하지는 건 사람이 겪는 자연스러운 과정이라고 말하고 있다.
일기의 주인공 ‘나’는 어린 시절 숲에 혼자 버려져 극한의 공포를 체험한 다음 날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한다. “이젠 두려워하지 않을 거야”로 시작한 ‘나’의 일기는 2차 성징을 거쳐 성인이 되고, 손주를 보며, 몸을 가누기 어려운 80대로 늙어가는 과정을 꼼꼼하게 기록한다.
몸을 관찰하며 쓴 일기지만, 그 속엔 결국 인간이 살면서 겪는 삶의 굴곡이 녹아 있다. 2차 성징으로 느끼는 혼란스러운 마음, 사춘기 자녀를 키우는 난처한 부모의 심정, 검버섯을 처음 발견한 때의 느낌, 사랑하는 이를 먼저 떠나보내는 일 등 평범한 사람의 일상을 담고 있다. 죽음을 앞둔 그의 일기가 큰 울림을 주는 이유다.
배성호 기자 bsh@100ss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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