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균관대 안에 명륜당 등 옛 시설 남아
성균관대 안에 명륜당 등 옛 시설 남아
  • 조상제 지하철 여행가
  • 승인 2015.09.11 13:50
  • 호수 48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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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여행]<44>성균관
▲ 성균관은 인재 교육과 함께 선현의 제사를 받드는 향사(享祀)의 역활도 했다. 사진은 성균관 명륜당의 모습.


성균관이란 고려 말과 조선시대 최고의 국립교육기관으로 내로라하는 인재들의 집합소이다. 우리나라 최고의 학부기관으로서 ‘성균관’이라는 명칭이 처음 사용된 것은 고려 충렬왕 때로 당시 교육기관인 국자감의 명칭을 ‘성균’으로 바꾸면서부터이다. 성균관은 태학으로도 불리었다.
조선 건국 이후에도 성균관이라는 명칭은 그대로 사용됐다. 1395년부터 새로운 도읍인 한양의 숭교방(崇敎坊, 지금의 서울 명륜동) 지역에 대성전과 동무·서무·명륜당·동재·서재·양현고 및 도서관인 존경각 등의 건물을 지었다. 당시 완공된 성균관의 총 규모는 96칸이었다. 임진왜란 때 화마로 잿더미가 됐다. 선조 대부터 복원이 진행돼 문묘의 대성전이 중건됐고 명륜당도 제모습을 찾았다.
성균관은 학문적 연구보다는 집권 양반자제들의 입신출세의 도구로 이용됐다. 이로 인해 서서히 교육은 침체됐고, 1876년 개항이 된 후에는 이 속도가 더 빨라졌다.
이후 전국 유림들에 의한 성균관 교육기능의 회복 움직임이 크게 일어나, 명륜전문학원이 설립됐지만 일제의 태평양전쟁으로 폐교 조치되고 말았다. 광복과 함께 명륜전문학교가 부활하고 이듬해인 1946년에 명륜전문학교는 발전적으로 해체되고, 그 대신 성균관대학(成均館大學)이 설립되고 현재의 성균관대학교로 발전했다.
성균관은 단순히 교육만을 담당하는 기관은 아니었다. 유학의 역사에 공헌한 선현의 제사를 받드는 향사(享祀) 역할이 교육 못지않은, 또는 그 이상 가는 성균관의 중요한 기능이었다. 그래서 성균관 건축은 이른바 전묘후학(前廟後學)이라는 전통적인 방식에 따라 앞쪽에 선현의 제사를 받드는 향사 공간을 마련하고 그 뒤로 교육 공간을 배치했다.
현재 성균관은 남향인 대성전을 중심으로 그 앞쪽에 동서로 길게 마주보고 있는 동무(東廡)와 서무(西廡), 대성전과 남북 일직선의 축을 이루며 신문(神門)이자 성균관의 정문이 되는 외삼문과 그밖의 부속건물로 이루어지는 일곽이 향사 공간, 즉 문묘가 된다. 그리고 대성전 뒤편 담장 너머, 역시 대성전과 동일한 축선상에 남향한 명륜당과 그 앞쪽에 서향과 동향으로 길게 마주보고 있는 동재(東齋)와 서재(西齋)를 중심으로 편재된 일련의 건물군이 교육 공간을 형성하고 있다.
◆가는 길:4호선 혜화역 4번 출구로 나와 도보로 10분 이동해 성균관대학교 정문을 지나 우회전하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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