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는 神을 기억하는 작업… 다시 태어나도 시인이 되겠다”
“시는 神을 기억하는 작업… 다시 태어나도 시인이 되겠다”
  • 오현주 기자
  • 승인 2015.09.18 13:37
  • 호수 48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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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세 시인 황금찬

“시대가 어려워도 문학은 해야 한다”는 춘원 이광수 말 잊지 못해
‘황금찬 문학상’ 제정, ‘대한민국예술원상’ 수상… 올해는 축복의 해

노시인의 1세기 가까운 삶을 관통하는 단어는 ‘가난’이었다. 황금찬(97) 시인. 그에게 ‘살아보니 인생은 어떤가’, ‘장수의 비결’ 등을 묻자 ‘가난’이라는 똑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어린 시절의 지독한 가난에 한이 맺혔고, 못 먹은 탓에 과식하지 않아 오래 산다는 의미다. 이에 대해 시인의 둘째아들(도정)은 “특정 부분만 기억하는 노인의 습성 같은 것”이라며 곧이곧대로 듣지 말라고 했다. 그렇지만 적어도 올해만큼은 황 시인에게 영예와 축복의 해이다. 지난 5월 ‘황금찬 문학상’이 제정됐고, 9월 초엔 ‘대한민국예술원상’(문학부문)도 받았다. 여전히 뜨거운 시 열정을 간직한 황 시인이 말하는 ‘시와 인생’.

-여러 상을 받았다.
“가장 기억에 남는 상은 ‘대한민국 문학부문 문화예술상’(1996년)이에요. 재밌게 얘기한다면 이번 상은 상금(5000만원)이 많아서 좋아요. 그렇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내가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인가 잘 모르겠어요.”

-요즘도 시를 쓰는가.
“시를 써보려고 끄적거리긴 하지만 작년부터는 잘 안돼요. 늙으면 모든 상념이 늙어버리나 봐요. 나이의 한정이 있다고 생각해요.”

-건강은 어떠신가.
“오래 걷지를 못해요. 음식은 가리지 않고 먹고 당뇨·혈압약도 먹어요.”

-장수 집안인가보다.
“우리 할아버지가 힘이 장사였다고 해요. 들은 얘기지만 떡메 칠 때 쓰는 나무로 소등을 찍자 소 등뼈가 쑥 내려앉았다고 해요. 당시 조선말인데 장사를 그냥 두면 역적이 된다며 원(지방관리)이 때려서 죽였어요. 말도 안 되는 나라였지요. 농사짓던 아버지는 83세에 돌아가셨어요. 4형제 중 나만 남았어요.”

1918년 강원도 속초 출생의 황금찬 시인은 어린 시절 가난을 면하려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도쿄에 있는 대동학원을 다녔으나 졸업은 못했다. 시인은 “낯선 이국땅에서 인간 이하의 멸시를 받으며 노동을 했다”고 기억했다. 해방 직전 귀국해 교편생활을 했다. 1953년 ‘문예’에 시 ‘경주를 지나며’와 1955년 ‘접동새’ ‘여운’ 등이 현대문학에 추천되어 문단에 나왔다. 중·고등학교에서 33년, 대학에서 20여년 시를 가르쳤다. ‘대한민국문학상’ ‘월탄문학상’ 등 수상. 첫 시집 ‘현장’을 비롯 ‘별이 있는 밤’, ‘나비와 분수’, ‘오후의 한강’ 등 시집 40권을 펴냈다.

-고향을 떠나게 된 건.
“양양군에도 공산당을 만드는 날이었어요. 공산당 간부가 나를 보고 ‘쟤는 뭐하는 애야’ 그래요. 그렇게 건방져요. 누군가 ‘국어교과서를 저 선생이 만들었다’고 하니까 ‘너 몇 살이야’ 그래요. 허허, 안하무인이야. 그 자가 ‘모든 교재는 유물론에 입각해서 하라’고 해요. 내가 ‘기독교신자인데 사람에 따라서 유물론 가지곤 되지 않는다’고 말했어요.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공산당원이 ‘저 놈의 새끼! 당장 잡아 죽여야 되겠지만 오늘은 좋은 날이라 죽일 순 없으니 나가라, 보기 싫다’고 해요. 등에 땀이 나고, 나오는데 걸음이 잘 안 걸려요. 다음날 새벽 보따리를 싸갖고 서울로 올라와 동성중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쳤어요.”

-시인이 된 계기는.
“서양인들이 우리나라에 기독교를 전파하면서 책 만드는 기술도 가져왔어요. 1928년, 캐나다인 선교사가 어린이들을 위한 잡지 ‘아이생활’을 만들어 한권에 10전씩 팔았어요. 그거 읽으면서 독학으로 시를 공부했지요.”

-시 공부 과정 중 기억에 남는 일은.
“1943년, 일본 동경에서 춘원 이광수 선생을 만난 자리에서 ‘우리말과 우리글로 문학을 할 수 있을까’라고 물었지요. 그분은 ‘우리가 말과 글을 다 빼앗기고 말았다 해도 문학은 해야 한다. 결국 그 사람 역시 민족으로 남을 터이니까. 이 시대가 이렇게 어렵다 해도 열심히 공부해 우리나라 사람이 이런 글을 썼다고 남겨놓아야 한다’고 대답했어요, 그 말을 생전 잊을 수가 없어요.”

-시를 정의한다면.
“시는 신을 기억하는 작업입니다. 우리와 떨어질 수 없는 ‘생명의 학술’입니다. 평생 읽고 써야 합니다.”

-시집을 40권이나 냈다.
“우리나라에서 제가 제일 많은 시집을 냈을 겁니다. 8000여편 돼요. 제가 바라던 시 한편을 못 쓰고 만다 해도 최선을 다해 노력했다는 그것만으로 흡족해요.”

-살면서 가장 좋았던 순간은.
“해방이지요. 해방. 일본의 항복 선언을 라디오를 통해 직접 들었어요. 특별한 방송을 들은 거지요. 당시 산골마을 간이학교 교사로 있을 때였어요. 일이 있어 양양군청에 들어가니 순사들이 총과 일본도를 세워놓고 있었어요. 풀이 죽어있더라고. 사람들은 해방이 된 건지 안 된 건지도 잘 몰랐고 만세소리가 간간이 들렸어요.”

-가슴 속에 남아있는 일이라면.
“1군단 사령부 종군작가로 있을 때 일이에요. 일주일에 한 편씩 시를 쓰면 붓글씨를 쓰는 정훈병이 그걸 크게 옮겨 적은 다음 담벼락이나 대문 같은데다 붙여놓았어요. 지나가는 군인이나 피난민들이 그걸 보고 울었어요. 참 눈물겨운 이야기이지요.”

-한 세기 격동기를 헤쳐왔다.
“잡지 연재 할 때 검열로 잘려나간 부분을 자기 의사와 상관없이 채워놓는 일은 너무나 곤혹스러운 작업이었어요. 전두환 정권에서 노태우 정권으로 바뀌던 무렵 생명까지 위협 당하며 ‘대통령자격론’이란 글을 강제로 쓴 적이 있어요. 정권을 미화하는 글이었지요. 그걸 본 사람들이 우리 집으로 전화를 걸어와 ‘얼마나 받아먹었느냐’ ‘가족을 몰살 하겠다’는 등 협박을 하기도 했어요.”
-삶을 되돌아보면.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노동과 시 쓰는 일 밖에 없었어요. 그래도 있다면 남을 가르치는 일이었을 겁니다. 그나마 남만큼 잘 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했을 뿐이에요. 시만을 써서 살 수가 없었으니까요. 노동 대신 택한 것이 교사였어요. 시만을 써서도 살 수 있었다면 나는 다 버리고 시만을 썼을 겁니다.”

-시인의 삶에 만족하는지.
“예술의 길처럼 험하고 고독한 길은 없어요. 이 산을 넘어가면 저기에 꽃의 호수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꽃의 호수는 거기에도 없었어요. 다만 가는 길옆에 몇 송이의 꽃들이 피어 있는 것을 보았을 뿐이에요.”

-서울 돈화문로 초동교회에 ‘황금찬 자리’가 있다는데.
“기독교 가정에서 자랐고, 아버지는 목사가 되길 바랐지만 저는 처음부터 시인이 되고 싶었어요. 1950년대 전쟁 직후부터 그 교회에 나갔어요. 맨 뒷자리에 앉아요.”

-좋아하는 성경구절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한복음 3장 16절).”

-더 오래 살고 싶은가.
“왜 더 살고 싶지 않겠어요. 그게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니지 않아요.”

황금찬 시인은 3남 2녀를 두었다. 그 가운데 아들 1명, 딸 1명을 여의었다. 오래전 부인과 사별 후 서울 우이동의 둘째 아들 집에서 지낸다.
열 번을 죽었다 다시 태어난다 해도 시인이 되겠다는 황 시인에게 ‘백세시대’ 독자를 위한 시를 소개해달라고 하자 주저 없이 ‘보릿고개’(시집 ‘현장’․1965년)라고 했다.
황 시인은 “가장 마음에 드는 시, 슬픈 시이다. 독일말·중국말·영어로 번역됐다”며 “봄에는 먹을 게 없었다. 너무나 배가 고파 보리가 채 여물기도 전에…”라며 말을 채 잇지 못했다. 가난은 여전히 시인의 혼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다. 오현주 기자
fatboyoh@100ssd.co.kr


보릿고개

보릿고개 밑에서
아이가 울고 있다
아이가 흘리는 눈물 속에
할머니가 울고 있는 것이 보인다
할아버지가 울고 있다
어머니가 울고 있다
내가 울고 있다
소년은 죽은 동생의 마지막
눈물을 생각한다

에베레스트는 아시아의 산이다
몽블랑은 유럽
와스카란은 아메리카의 것
아프리카엔 킬리만자로가 있다


이 산들은 거리가 멀다
우리는 누구도 뼈를 묻지 않았다
그런데 코리아의 보릿고개는 높다
한없이 높아서 많은 사람이 울며 갔다
-­굶으며 넘었다
얼마나한 사람은 죽어서 못 넘었다
코리아의 보릿고개
안 넘을 수 없는 운명의 해발 구천 미터

소년은 풀밭에 누웠다
하늘은 한 알의 보리알,
지금 내 앞에 아무 것도 보이는 것이 없다.

-시집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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