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무대에서 미수잔치 열어 행복… 건강 허락되면 100세까지 뛸 거예요”
“작년 무대에서 미수잔치 열어 행복… 건강 허락되면 100세까지 뛸 거예요”
  • 오현주 기자
  • 승인 2015.11.27 11:32
  • 호수 49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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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세 최고령 시니어 모델 박양자

2007년부터 해마다 10여 회 무대에 서… 처녀 적 패션 디자이너 꿈 이룬 셈
출연료 받은 적 없어… 미용·교통비 등에 내돈 쓰지만 건강 등 보람은 더 커

지난 11월 초, 경기도 일산 킨텍스의 한 행사장. 요란한 음악과 함께 남녀 시니어 모델들이 런웨이를 걸어 나오자 관람석에서 환성이 터져 나왔다. 이날 은발의 어르신들이2시간 가까이 화려한 의상을 입고 활기찬 워킹을 선보였다. 무대에 오른 50여명의 모델 가운데 최고령은 89세의 박양자(서울 정릉) 어르신이다. 전업주부인 박 어르신은 8년 전 시니어 모델이 됐다. 지난 11월 말, 서울 롯데백화점에서 박 어르신을 만나 모델이 된 계기와 고충, 보람 등을 들었다.

-모델이라는 말을 들으면 기분이 어떤가.
“좋아요. 이 나이에 할머니라고 불리는 것보다는 타이틀이 하나 있다는 데 만족하고 긍지도 가져요.”

-킨텍스 행사 쇼에선 몇 번 옷을 갈아입었나.
“두 번이요. 제가 소속한 회사(뉴시니어라이프) 회장님이 마련해준 옷이에요.”

-여러 번 옷을 갈아입는 게 보통 일이 아닐 텐데.
“쇼를 하면서 가장 힘든 부분이에요. 쇼 진행요원들과 후배 모델들이 잘 챙겨줍니다. 나이 많은 사람이 넘어지기라도 하면 큰일 나니까 아주 조심합니다.”

-무대에서 넘어진 적은.
“아직 한 번도 없어요. 무대에선 긴장해요.”

-첫무대는.
“종암경찰서 부근의 호텔에서 회사 자체의 패션쇼였어요. 처음이라 무척 긴장해서 어떻게 끝났는지도 몰라요. 그래도 기분은 참 좋았던 기억이 납니다.”

-무대 위에서 무슨 생각을 하나.
“실수 없이 잘 마무리해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어요.”

-예뻐 보이려고 애쓰지는 않나.
“이 나이에 그럴 필요가 있나요. 대신 노인들에게 ‘나를 봐라, 건강한 삶을 살지 않느냐, 당신들도 이렇게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려고 해요.”

-머리 염색을 하면 좀 더 젊어 보이지 않을까.
“후배들이 흰머리로 나가는데 제가 머리를 까맣게 염색하는 건 맞지 않는 것 같아요.”
-힘든 점이라면.
“굽이 높은 구두를 신어야 하고 일자로 걸어야 해요. 하지만 제가 하고 싶었던 일이라 힘든 줄 모르고 즐거운 마음으로 해요.”

-킨텍스 행사 쇼에서 개런티를 얼마 받았나.
“그런 거 없어요. 지금까지 돈 받은 적 없어요. 오히려 내 돈 쓰면서 합니다. 미장원에 가서 머리하고 행사장 가는데 드는 교통비 등. 취미 생활한다는 생각으로 해요.”

-왜 모델을 하게 됐나.
“노인들이 방에 그냥 앉아 있거나 물리치료 받느라 병원에 누워 있는 건 국가적인 낭비이고 열심히 살려고 애 쓰는 젊은이들에게 부담 주는 일이잖아요. 저는 늘 그 점을 부끄럽게 여기고 약점 잡히는 것으로 생각했어요. 특히 여든이 넘었다면 다들 쓸모없다고들 해요. 건강해져서 국가에 대한 보답도 하고 여생을 뜻 있게 보내려고 시작했어요. 치과나 내과는 가지만 적어도 이 일을 하고부터 정형외과는 간 적이 없어요.”

-그래도 어떤 계기가 있었을 텐데.
“어려서부터 패션 쪽에 관심이 많았어요. 처녀 적 일본 오사카에 있는 유명한 배우학교 ‘다카라즈카’에 입학원서를 낸 적도 있어요. 일본 국적이 아니면 받아주지를 않아 뜻을 못 이루었지만 그때 입학 담당자가 ‘아깝다’며 격려해준 기억이 납니다. 결혼 후 아이 키우고 남편 뒷바라지하느라 그런 열정을 숨기고 살았지요. 그러다 10여년 전 남편이 세상을 뜨고 혼자되면서 뒤늦게나마 꿈을 실현해보자고 도전한 겁니다.”

-의지만 있다고 다 되는 건 아니지 않는가.
“제가 이 일을 시작하던 2007년 당시는 시니어 모델이라는 개념조차 없을 때였어요. 시니어모델을 양성·배급하는 ‘뉴시니어라이프’란 회사도 생긴 지 얼마 안 됐을 때에요. 지인을 통해 그 회사에서 시니어 모델을 모집한다는 얘기를 듣고 직접 회사를 찾아가 입학원서 쓰고 담당자하고 면담한 후 며칠 안 있다 연습에 들어갔어요. 요즘도 종암동에 있는 평생학습관에서 매주 목요일 오후 2~3시간 연습해요.”

-주변 반응은 어떤가.
“일본인 학교를 나와 친구들 대부분 일본인이에요. 지금도 편지 왕래를 하고 그럽니다. 그들에게 사진을 보냈더니 너무나 좋아해요. 자기 일처럼 반가워합니다.”

-체력적으로 어려움이 많겠다.
“제가 40대에 큰 수술을 한 이후 계속해서 체조 등 운동을 해오고 있어요. 그래서인지 힘들지 않아요.”

-건강 관리는.
“혈압약을 먹고 부정맥도 있지만 당뇨병은 없어요. 특별히 건강을 위해 뭘 먹거나 하지는 않아요. 제가 불면증으로 입원까지 할 정도였지만 일을 하고나서는 그것도 사라졌어요.”

-얼굴이 예뻐야 하지 않나.
“그런 건 따지지 않아요. 잘 걷고 율동을 좀 하면 됩니다.”

-키가 얼마인가.
“젊었을 적에는 164cm였는데 지금은 10cm나 줄었어요.”
-시니어 모델은 몇 분이나 되는가.
“제가 시니어 모델 1기생으로 10여명이 시작했는데 현재 3명만 남았어요. 50세부터 80세까지를 시니어 모델이라고 해요. 소속 회사에 120여명이 활동하고 있고, 80대가 7명 정도 됩니다. 지팡이를 짚고 무대에 선 분도 있었지만 지금은 활동을 안 하세요.”

-한 달에 몇 번 정도 무대에 서나.
“이 일이 불규칙해요. 아예 없는 달도 있고…. 11월 경우 3, 4건 됐어요. 며칠 전 야외에서 하는 행사는 일부러 빠졌어요. 춥고 몸에 무리가 올 것 같아서요. 일년에 10여회 됩니다.”

-가장 잊지 못할 무대는.
“작년에 미수(88세)였는데 무대에서 생일파티를 했어요. 강남의 섬유센터에서 패션쇼를 마치고나자 갑자기 저에게 왕관과 꽃다발이 왔어요. 소속 회사에서 미수잔치를 베풀어준 겁니다. 회장님이 관람객들에게 제 나이를 공개하면서 한마디 하라고 했어요.”

-무슨 말을 했나.
“너무나 행복하고, 이 일을 시작하고부터는 여생을 즐겁게 보내고 있으며, 뜻이 있는 분은 동참했으면 좋겠다는 말과 함께 건강이 허락하는 한 100세까지 할 거라고 했어요.”

-하고 싶은 말은.
“자식들 짝사랑 하지 말라는 겁니다. 자식들에게 주려고 애쓰지도 말고 연락 안 한다고 섭섭해 하지도 말고 자신을 위해 건강한 삶을 보냈으면 합니다.”

박양자 어르신은 일제강점기, 서울 소재의 일본인학교를 나와 일본 소재의 대학을 다니던 중 태평양전쟁 발발로 중퇴하고 귀국해 결혼했다. 박 어르신의 아버지는 장면 박사 한 해 선배로 고위 공직자였다. 슬하에 5남매를 두었다. 자녀와 손주들이 대부분 국내외 대학교수, 의사로 있다. 정릉의 단독주택에서 은퇴한 큰아들과 함께 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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