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주 이름 ‘처음처럼’ 서체 남긴 신영복을 기리며
소주 이름 ‘처음처럼’ 서체 남긴 신영복을 기리며
  • 오현주 기자
  • 승인 2016.01.22 10:58
  • 호수 50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월 15일, 희귀피부암으로 영면한 신영복(75) 성공회대 석좌교수. 그는 이 시대의 대표적 인문학자이자 실천적 지식인이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담론’ ‘더불어 숲’ ‘처음처럼’ 등 많은 스테디셀러를 통해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와 자기 성찰, 냉철한 사회 현실 분석과 세계인식에 관한 깊은 사유로 우리 사회에 큰 울림을 던져주었다.
1941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난 고인은 서울대 경제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한 경제학자이다. 육군사관학교에서 경제학을 가르치는 교관으로 지내던 중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무기징역형을 선고 받았다. 20년20일의 형기를 마치고 1988년 광복절 특별 가석방으로 출소했다. 군사정권 시절의 많은 사상범이 민주화 이후 재심을 통해 무죄를 선고받았지만 고인은 재심을 청구하지 않았다. 고인은 통혁당 사건이 부풀려졌다고 주장하지만 혁명을 꿈꾸었던 사실 자체를 구질구질하게 부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이듬해부터 성공회대에서 정치경제학·사회과학입문·중국고전강독을 강의했다. 1998년 사면복권 되던 날 그 유명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펴냈다. 이 책은 감옥에서 휴지와 봉함엽서 등에 깨알같이 써 가족에게 보냈던 편지들을 묶은 것이다.
이 책을 우연한 기회에 접하고 단숨에 읽었는데 책 내용 중 “감옥에서 가장 견디기 힘든 것 중 하나가 무더운 여름, 비좁은 공간에서 서로의 몸이 닿는 것”이란 글이 좀처럼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그 글을 본 이후로 웬만큼 불편하고 불쾌한 환경은 참고 넘어가는 내성이 생기기도 했다. 고인은 반목과 불신, 언쟁과 주먹다짐에 이르기까지 하루가 ‘팔만대장경’인 감옥에서 생존하기 위해 축구를 했다. 거친 사람들 속에서 공을 찼고, 어느덧 잘 차게 돼 공수의 완급을 조절하고 정확하게 패스를 하는 미드필더가 됐다. 대학에 와서도 축구는 계속했다. 성공회대 운동장을 함께 뛰었다는 정윤수 한신대 교수는 “정확한 지점으로 달려가서 가슴으로 공을 받아 발바닥으로 살며시 진정시키고 나서 정확한 지점으로 떠나보내던 모습이 생각난다”고 했다. 고인이 이끌던 ‘교수축구회’가 외부로 알려지자 가수 안치환 등 축구광을 비롯해 정몽준 축구협회장이 이끄는 축구회까지 원정 올 정도였다.
2006년 성공회대에서 정년퇴직한 이후에도 강의를 계속했으나 지난해 암 진단을 받으면서 그해 겨울 강단에서 내려왔다. 그때 펴낸 ‘담론’에서 “감옥은 대학이었다. 20년의 세월은 실수와 방황과 우여곡절의 연속이었으나 다른 한편으로 배움과 깨달음의 여정이기도 했다”고 감회를 밝히기도 했다. 그 무렵 기자는 ‘백세시대’와의 인터뷰를 요청했다. 고인은 “몸이 아파 인터뷰에 응하지 못해 미안하다”고 대답했다. 투병 사실은 익히 알고 있었으나 당시 그 대답을 인터뷰를 회피하기 위한 변명으로 여겼던 점이 사후에도 미안하기 짝이 없다.
고인은 인문학을 ‘사람 인’에 ‘글월 문’이 아니라 ‘무늬 문’으로 봐야 한다는 말을 했다. 사람의 사유를 다루는 학문이니 사람의 관계맺음에 따라 해석될 수 있다는 얘기다. 그가 좋아하던 글귀는 노자의 ‘상선약수(上善若水)론’이다. 최고의 선은 물 같이 사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고 선두를 다투지 않으며 가로막으면 돌아가고 무리하지 않지만 항상 가장 낮은 곳으로 흐른다는 것이다.
고인은 엉뚱한 분야에서 유명세를 탔다. 소주 ‘처음처럼’이란 글씨가 그가 개발한 서체이다. 마치 추사 김정희가 제주도 유배 생활에서 ‘추사체’를 창조해냈듯 전주교도소 수감 당시 교도소 서예반 활동을 하며 ‘어깨동무체’란 서체를 빚어냈다. 그의 유작은 작년 10월 경 부탁 받고 써준 경기도 의회의 현판이다. 의회 관계자가 사례를 하려고 했으나 고인은 ‘괜찮다’며 거절했다. 고인이 남긴 말들은 요즘 우리 사회의 새로운 잠언록이 됐다. “머리에서 가슴으로, 그리고 가슴에서 다시 발까지의 여행이 우리의 삶입니다. 머리 좋은 사람이 마음 좋은 사람만 못하고 마음 좋은 사람이 발 좋은 사람만 못합니다.” 발 좋은 사람이란 실천에 옮기는 이를 말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