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깎아 학교 짓느라 고생했지만 교육생 얼굴 보면 보람”
“산 깎아 학교 짓느라 고생했지만 교육생 얼굴 보면 보람”
  • 오현주 기자
  • 승인 2016.02.26 10:41
  • 호수 50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양평으로 이사한 제1 가나안농군학교 김평일 교장

30년 넘게 탈북자 돕기, 효 교육에 종사… 평생 농군학교에서 벗어난 적 없어

새마을운동의 모태로 알려진 가나안농군학교가 새 도약에 나섰다. 경기도 하남에서 양평으로 터전을 옮긴 후 노인을 비롯 국민의식변화에 앞장서겠다는 각오이다. 선봉에 김평일(74) 제1 가나안농군학교 교장이 섰다. 김 교장은 “부모가 자식을 해치고, 자식이 부모를 해치며 아이들이 선생 말을 안 듣는 건 사람노릇을 잘 못해서”라며 “사람 노릇을 못하는 건 양심이 없기 때문이며 양심을 되찾는 게 효”라고 말했다. 지난 2월 초, 양평군 지평면 옥현리에 위치한 농군학교에서 김 교장을 만나 이 시대 노인의 역할과 새마을운동에 끼친 영향 등을 물었다.

-서울에서 지하철로 2시간 넘게 걸렸다.
“아버님(김용기 장로·1909~1988)이 1955년 경기도 하남시 풍산동 야산을 개간해 농장을 만들고, 1962년 학교를 세워 60년 넘게 자리를 지켰는데 그 자리가 보금자리주택지구개발에 편입되면서 2014년 이곳으로 들어오게 됐어요.”
-산중턱이라 개간에 고생이 많았겠다.
“여기가 해발 200m 고지예요. 편평한 곳은 도로에 인접한 500평 정도이고 나머지 2만여평은 사람이 서있을 수 없을 정도의 깎아지른 산비탈이었어요. 4년 동안 하남에서 새벽 6시에 승합차를 몰고 이곳에 와 하루 종일 돌을 고르고 풀을 뽑는 등 7000여평의 땅을 ‘개척’했어요.”
-양평을 거쳐 간 교육생은 얼마나 되나.
“5000여명으로 직장인, 청소년, 대한노인회 회원들이세요.”
-어떤 교육이 이루어지나.
“사람이 동물과 다른 점은 양심이 있다는 겁니다. 사람 노릇을 못하는 건 양심이 없어서입니다. 양심은 바로 효심입니다. 친구에게 점심 대접을 받았다면 다음날은 내가 점심을 사지요. 그거 안하면 욕먹어요. 밥 한그릇 갚지 않아도 욕을 먹는데 하물며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한 부모에게 감사를 표시하지 않으면 되겠어요. 감사의 표시 그게 바로 효입니다.”
-고 김용기 장로에게서 배운 효라면.
“아버님은 실천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셨어요. 하라는 분이 아니고 하는 분이었어요. 아버님은 출근하면서 할머니에게 ‘오늘은 어디로 모실까요’라고 물어요. 그러면 할머니는 ‘아랫동네 김씨네로 가자’고 하세요. 아버님은 할머니가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는 등 단장을 하는 사이 자전거를 타고 나가 과자를 사오세요. 한손에 과자봉지 들고 어머니를 등에 업고 아랫마을로 갑니다. 퇴근하면서 그 집에 들러 할머니를 업고 집에 오시곤 했어요,”

▲ 가나안농군학교 전경 모습.

김평일 교장은 1942년 경기도 남양주 봉안마을에서 김용기 장로의 3남으로 태어나 단국대, 한양대 공학대학원을 수료했다. 사회에서 어떤 직업도 가진 일이 없으며 가나안농군학교에서 평생 일하고 교육하는 삶을 살았다. 가나안세계효운동본부 총재, 성산효대학원대학교 겸임교수, 한국효운동단체총연합회 공동대표, 평화통일탈북인연합회 이사장, 대한노인회 기독신우회 공동회장 등을 맡고 있다. 대통령표창(2000), 국민훈장 목련장(2002) 등 수상. 명예효박사 1호.

-‘내리사랑 올리효도’를 평생 해왔다고.
“효 운동을 1970년 1월 1일부터 했어요. 아버님이 할머니를 업고 다니는 모습을 보면서 저도 모르게 효 정신이 몸에 배었나 봅니다.”
-탈북자도 돕는데.
“아버님이 생전에 김일성 주석도 만나는 등 통일운동을 하셨어요. 30년 전, 나는 통일을 위해 무슨 일을 할까 생각한 끝에 탈북자들을 돕기로 했지요. 북에서 넘어온 이들을 과거에는 귀순용사라고 했어요. 그들이 처음 만나는 남한사회가 바로 가나안농군학교였어요. 현재 2만7000명의 탈북자 가운데 7000여명이 평화통일탈북인연합회 회원으로 있어요. 해마다 이들을 학교로 초청해 한마당 축제를 엽니다. 우리가 어릴 적 놀던 게임 등을 하면 아주 좋아들 해요. 남북의 문화 차를 좁히기 위해 10여명 정도로 평양통일예술단을 운용하기도 해요.”
-고 박정희 대통령이 농군학교에서 새마을운동을 착안했다고.
“새마을운동은 한마디로 잘 살기 운동이에요. 농군학교를 하게 된 이유도 잘 살기 위한 겁니다. 혁명 이듬해인 1962년 2월 1일, 육군소장 박정희 의장이 30명의 최고위원들과 함께 가나안농군학교를 찾았어요. 혁명엔 성공했지만 어떻게 해야 잘 살 수 있는가를 몰라 방법을 찾던 중 김용기 장로를 만나라는 여론을 듣고 왔던 거지요. 우리 집에서 고구마와 식빵으로 식사도 하면서 5시간여를 머물다가 가면서 박 의장은 ‘제가 생각했던 것을 선생은 이미 이루고 있었다, 참 잘 왔다’는 말을 했다고 해요. 박근혜 대통령에게 들은 바로는 그때 박정희 대통령이 새마을운동의 영감을 받았다고 합니다.”
-당시 농군학교에선 어떤 교육을 했나.
“아버님을 비롯해 온가족이 강사로 나섰어요. 큰형님은 포도·복숭아 재배 등 과수를, 작은형님은 농가소득을 올리는 약초를 담당했고, 저는 축산을 가르쳤어요. 제 손가락에 툭 튀어나온 부분이 소젖을 짜면서 생긴 겁니다. 소에게 음악을 들려주면 젖이 잘 나온다는 사실도 우리나라에선 제가 처음 발견했을 겁니다. 그때가 60년대였으니까요. 라디오를 작은 소리로 들려주면 10L 나오던 젖이 12L까지 나오기도 해요. 실을 뽑는 ‘앙고라토끼’ 아시지요. 그거 일본에서 들여와 우리나라에 대량사육 시킨 사람도 바로 접니다. 그걸로 돈도 좀 벌었지요.”
-100세시대, 노인의 역할이라면.
“나이 많다고 대접 받을 생각 말고 사회와 지역을 위해 봉사해야 합니다. 웰다잉이라고 특별한 거 없어요. 일하다 죽는 게 웰다잉이에요. 넥타이 매고 사무직만 찾으면 청년실업인 요즘 청년들에게 욕먹어요. 노인은 새벽잠이 없잖아요. 빗자루 들고 나가 눈 치우세요.”
가나안농군학교는 새로운 양평시대를 맞아 의식개혁과정과 미래설계과정 등 두 과정을 운영한다. 강의만 실시하지 않고 농장체험과 산행 등 내용을 다변화시켰다. 단체나 기업의 요청에 따른 맞춤 프로그램도 효과적으로 짜주고 있다.
김평일 교장은 “공기 좋은 곳에서 정신교육을 통해 참된 인생의 가치를 발견하고 새로운 각오를 다지는 교육생들의 모습을 보면 보람과 기쁨을 느낀다”고 말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