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순 전 체신부장관 “흔들리는 나라… 마을훈장처럼 노인이 큰 목소리로 경고해줘야 해요”
이대순 전 체신부장관 “흔들리는 나라… 마을훈장처럼 노인이 큰 목소리로 경고해줘야 해요”
  • 오현주 기자
  • 승인 2016.03.04 11:05
  • 호수 5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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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관·국회의원·태권도연맹 총재 등 화려한 스펙… ‘한알의 밀알’ 정신으로 살아와
경제대국의 주역 노인세대… 앞만 보고 달려온 탓에 다음세대에 시민의식 배양 못해줘

체신부장관을 지낸 이대순(84) 한국대학법인협의회 회장은 “나라가 흔들리고 있다”며 “국가에 대한 정체성 확립이 안 된 젊은 세대는 이념적으로 혼란한 상태라 노인들이 큰 목소리로 사회에 경고를 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언론에 좀처럼 나서지 않는 이 회장이 최근 ‘백세시대’와 만나 한 얘기다. 이 회장은 교육감부터 국회의원, 장관, 공기업 CEO, 대학 총장, 아시아태권도연맹 총재를 역임하는 등 화려한 스펙의 소유자다. 서울 마포의 사무실로 매일 출근하는 이 회장을 만나 100세시대를 준비하는 노인의 지혜와 다양한 삶의 궤적을 들었다.

-한국대학법인협의회는 좀 생소하다.
“4년제 사립대학의 설치·운영과 권익옹호를 위한 기구입니다.”
-너도나도 대학을 가는 것도 심각한 사회 문제이다.
“우리나라의 독특한 교육열 때문이지요. 농사짓는 어머니가 ‘우리 아들 서울에서 대학 다닌다’는 말을 자랑스럽게 하던 세상이었으니까요. 의무교육이 초등학교에서 중·고등학교로 올라가고 거기에 교육열까지 합쳐져 아제는 대학 진학이 일반화됐어요.”
-고학력 인플레는 청년실업의 원인이기도 한데.
“미국도 대학출신이 택시운전 하던 시대가 있었어요. 과거 15%의 지식인들이 가야할 자리가 이제는 지식인이 70%가 돼 자리가 없어요. 옛날 고교 졸업자가 맡았던 일자리라도 마다하지 않는 인식의 변화가 있어야 해요. 고교를 졸업해 바로 대학에 가지 않고 취직해 직장에서 대학을 가거나 또는, 대학 졸업자라도 새로운 지식을 얻으려고 특별교육을 받는 식의 평생교육시대가 돼야 합니다.”
-1000만 노인시대가 눈앞인데….
“고령화시대는 의료비가 가장 많이 듭니다. 개개인이 여생을 건강하게 보내려면 자기 건강관리를 위한 노력을 많이 해야 해요. 노인이 사회를 바꾸어나가자는 이 심 대한노인회 회장의 말이 설득력이 있어요.”
-이 나라를 경제대국으로 만든 노인들의 새로운 역할이라면.
“노인들은 이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었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지만 한가지 빠트린 점이 있어요. 한 사회란 것이 큰 변화를 이루고 환경이 달라지면 그 사회를 뒷받침하는 의식도 바뀌어야 해요. 산업사회 하에서의 시민의식, 공동체의식을 우리가 형성시켜주고 그걸 물려주었어야 했는데 앞만 보고 달리다보니 다음세대에게 서로 협력하고 돕고 살아야 한다는 것, 시민으로서 가져야할 윤리의식 등을 제대로 양성하지 못 했어요.”
-전혀 교육이 안됐다는 말인가.
“물론 그런 움직임이 없었던 건 아니에요. 급격한 산업사회를 뒷받침하기 위해 국민윤리라는 과목을 만들어 열심히 가르쳤어요. 박종홍 선생(철학박사·1903~1976)을 중심으로 시민의식을 배양하는 교육을 해왔지만 민주화운동세력이 유신체제를 옹호하는 교육이라며 없애버렸어요. 그럼 그걸 대체하는 민주사회의 시민의식을 가르쳤는가하면 그것도 못했어요.”
-늦은 감이 있지만 다시 학교에서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어렵다고 봐요. 국사교육 하나만 보더라도 이념 대립 때문에 어려움이 많잖아요. 실천운동으로 해야 합니다. 노인이 마을에서, 학교에서, 길거리에서 교통질서 운동을 펼치듯 도시에서 공동체 의식을 주도하는 시민운동을 우리가 해야 합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어른을 우습게 여긴다.
“제가 전남도 교육감으로 있을 때 어떤 선생이 마을훈장 아이디어를 내 ‘여천’이라는 섬에서 실천하고 있었어요. 그 마을에서 가장 나이 많은 어른이 아이들에게 도의교육을 옛날식으로 가르친 겁니다. 사회는 변했지만 그 교육은 효력을 발휘했어요. 아무리 도덕이 땅에 떨어져도 마을의 어른이 나서서 애정을 가지고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했을 때 그걸 거역하는 아이가 없더란 말입니다. 노인들이 사회를 위한 마지막 봉사라고 여기고 마을훈장다운 역할을 해 이 사회를 지탱해나가는 정체성을 확고히 지켜주어야 합니다.”
-재작년 교과서 문제로 몸살을 앓았다.
“그때 전직 대학총장들이 모여 그 문제에 대해 토론도 하고 그랬어요. 정부에다 검정제도를 강화시켜 철두철미하게 바른 역사 교과서를 만들어라, 그게 안 되면 국정도 할 수 있는 걸 검토하라고 건의했어요.”
-결국은 국정화로 결론이 났다.
“일본도 1980년대 교과서 파동을 겪었어요. 자기들 중심의 국민교육을 하다 보니 주변국가의 역사를 왜곡시킨 결과가 됐어요. 상당 기간 외교 문제가 돼 제가 당시 국회의원 대표로서 일본과 접촉해 시정이 됐지요. 그 계기로 독립기념관이 건립된 겁니다.”

이대순 회장은 전남 고흥 출신으로 춘천고, 서울대 법대를 나왔다. 교육과학기술부 사무관, 전남 교육감 등 20여년 공무원 생활을 했다. 11,12대 국회의원, 체신부장관(1986~1987)을 지냈다. KT 이사장, 서울오페라단 이사장, 호남대·경원대 총장 역임. 현재 경남대 한미학원 이사장, 세계태권도연맹 명예부총재로 있다.
-스마트폰을 보는 감회가 남다르겠다.
“체신부장관과 국회의원을 겸했어요. 삼보컴퓨터 이용태 회장, 삼성전자 강진구 사장과 함께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전화교환대 자동화시스템을 구축했어요. 거기서부터 우리나라 전자산업의 비약적인 발전이 시작됐지요.”
-여자들이 나란히 앉아 전기코드 같은 걸 꽂던 장면이 기억난다.
“바로 그거에요. 청색, 백색전화기가 있었던 시절에 자동교환기를 설치하자 낙도에서 바로 미국으로 전화가 됐어요. 우리나라 전체가 통신으로 연결됐고 곧이어 광케이블이 전국토에 깔렸고 컴퓨터가 보급되면서 전자통신이 발전된 겁니다.”
-선배 정치인으로서 요즘 국회를 보면 어떤 생각이 드나.
“시대가 다르고 구성원의 차이가 있겠지요. 11대 국회는 군부가 정부조직의 중심이 돼 각 분야의 전문가를 발탁해 역대 가장 높은 수준이었다고 말할 수 있어요. 당시도 야당은 민주화를 강하게 밀어붙였지만 인간적으로 서로 대화가 됐어요. 낮에는 싸우더라도 저녁에 ‘우리가 이래서 되겠는가’ 타협하고 넘어가고 그랬지요. 12대 때 제가 민정당 원내총무로 개헌작업을 총지휘해 당시 세 그룹으로 갈라져있던 야당을 설득해 대통령직선제를 관철시켰어요. 지금의 여야는 대립만 있고 타협이 없어요.”
-안철수의 국민의당으로 인해 우리나라도 다당제가 돼가는 듯하다.
“민주주의 국가 미국도 양당제가 문제가 있다고 보고 제3의 정당이 나와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어요. 우리도 다당제로 가고 있지만 결국에는 국민이 판단해줄 수밖에 없어요. 이 시대 에 필요한 정치지도자가 어떤 사람인가를 잘 구분해야 합니다. 우리 사회의 대립·갈등·통합의 문제를 해결해주어야 하는 정치가 제 역할을 못하고 오히려 분열을 촉진하고 있어요. 정치․사회문제가 복합 돼 사회 위기가 닥쳐오고 있는 겁니다. 이번 4·13 총선이 우리 정치사에 하나의 큰 변곡점을 찍지 않을까 생각돼요. 이 시점에서 우리 노인세대가 정신 차리고 끌고 갈 수밖에 없습니다.”
-대통령은 누가 될 것 같은가.
“아직은 예측 불가능해요. 설왕설래가 있지만 6개월 전쯤 엉뚱한 사람이 나타날 겁니다. 이번 선거가 끝나면 우리 사회에 자각현상이 일어날 겁니다. 대학에 일생을 바친 전직교수들이 엊그제 모여 선거 끝나고 우리 사회의 도약적 발전을 위해 한 번 모이자고 했어요. 그걸 기폭점으로 해 사회에 큰 변화가 올 것이고 그런 사회에 필요한 지도자가 부각될 겁니다.”
-서울오페라단 이사장, 금호문화재단 이사장 등 문화예술계에도 관여했다.
“저도 음악을 좋아하고 딸(이숙영)도 성악가라 개인적인 인연이 있기는 합니다만 민정당 사무처장으로 있을 때 우리가 올림픽을 유치해놓았지만 내놓을만한 오페라단이 하나도 없어 난감해 했던 기억이 있어요. 문화수준이 높아야 선진국이라는 인식에서 서울오페라단을 제가 한동안 맡아 뒤에서 적극 지원해준 일이 있어요.”
-태권도와는 어떤 인연으로….
“제가 문교부에서 고등교육장을 가장 오래 했어요. 체육국이 새로 생기고 제가 체육국장을 맡았던 그 무렵이 우리나라 체육계의 큰 변화기였어요. 일본은 이미 유도사범을 해외에 마구잡이로 내보내고 있어 우리도 서둘러 태권도 사범들을 해외에 파견했어요. 당시 여러 개의 태권도 단체를 대한체육회로 통일해 외국에 보내는 일을 승인하는 과정에서 태권도와 인연을 맺게 됐어요.”
-태권도 명예 9단이라고.
“제가 아시아태권도연맹 총재를 거쳐 세계태권도연맹 부총재를 맡아하니까 고단자인 줄 알고 주변에서 자꾸 몇단인가 물어요. 전 사실 태권도를 할 줄 몰라요(웃음). 국기원 원장이 보기 딱하다며 준 겁니다.”
-대학 총장직은 또 어떻게 맡게 됐나.
“13대 총선 낙방 후 견문 넓히려 미국·일본 등 해외로 나갔다가 돌아오자 호남대에서 총장으로 추대했다고 해요. 같은 호남인데다가 체신부장관 경험이 정보통신특성화 대학을 만드는데 보탬이 될 거라고 판단했나 봅니다. 경원대는 대학을 인수한 길병원이 학교 운영을 잘 모르니까 주변에서 제 얘기를 듣고 불러서 간 거고요.”
-쉬지 않고 달려온 삶이다.
“중학교 2학년 때 박계주의 ‘순애보’란 소설을 보고 감동이 너무 커 노트에 그대로 옮겨 적었던 일이 있어요. 거기에 ‘한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내용의 글귀가 가슴에 와 닿았고 평생 ‘한알의 밀알이 되는 인생을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했어요. 지금도 그 정신에 변함이 없어요.”
-영향을 준 인물이라면.
“중학교 때부터 기독교를 믿었어요. 종교적으로는 김장환 목사이고 학문적으로는 황산덕 서울대 법대 교수(1917 ~1989), 그분이 참 저를 많이 사랑해주었어요. 젊었을 적 정신적인 면에선 황성수 전 국회부의장(1917∼1997)이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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