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르신 5000여명 노래로 행복하게… 가수가 있는 한 멈추지 않을 겁니다”
“어르신 5000여명 노래로 행복하게… 가수가 있는 한 멈추지 않을 겁니다”
  • 오현주 기자
  • 승인 2016.03.18 09:09
  • 호수 5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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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위로잔치 34년째 열고 있는 가수 김상희

고려대 법대 재학 중 가족 반대 무릅쓰고 가수의 길… 모친 꿈은 법조인 되는 것
“가수란 정말 좋은 직업”… 슬픔 위로하고 기쁨 같이 해… 심리학 치료 못지않아

가수 김상희(73)씨처럼 초지일관하는 이도 드물다. 50년 가까이 노래와 방송 일에 전념해왔다. 그 외에도 40년 가까이 해오는 일이 또 있다. 바로 노인을 위한 봉사활동이다. 김씨는 해마다 장충체육관에서 대대적인 노인위로잔치를 열고 있다. 5000여명을 초청해 점심을 대접하고 흥겨운 노래와 춤으로 행복한 시간을 선사한다. 연예인봉사단체 ‘한국연예인한마음회’가 해온 일이기도 하다.
김씨는 이 단체를 만들었고 27년간 회장을 맡아해 오다 후배가수(권성희)에게 물려주고 현재는 이사장으로 있다. 올해 역시 6월 초에 같은 장소에서 예년과 비슷한 규모의 행사를 열 예정이다. 3월 초, 목 디스크수술 직후 만나 노인을 소중히 모시게 된 배경과 가수생활 뒷이야기를 들었다.

-목 디스크수술은 잘 됐나.
“오래전부터 목이 불편했어요. 정형외과에서 ‘견인치료’ 받으며 버티다 이번에는 심해져서 수술을 받았지요.”
-노인위로잔치는 어떻게 하게 됐나.
“1982년에 시작했으니까 30년이 넘었네요. 처음엔 소규모로 했어요. 아마 어르신 모시고 잔치 한 거로는 처음일 거예요.”
김상희씨는 서울 서대문의 한마음병원에 들렀다가 땡볕에서 땀 흘리며 순서를 기다리는 노인들을 우연찮게 보게 됐다. 그게 마음에 걸렸다. 이 병원은 무료로 침을 놔주기도 해 많은 어르신들이 찾았다. 김씨는 노래라도 불러드리면 노인들이 덜 힘들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병원 측에 부탁해 천막을 치고 노래를 부르게 된 게 봉사의 시초였다. 지금처럼 장충체육관에서 성대하게 열게 된 건 2000년 들어와서다. 교보문고 후원에 이어 국민은행, 서울시 등에서 지원해주고 있다.
-행사는 어떤 내용으로 치러지나.
“4시간을 내리 공연합니다. 점심식사와 과일을 대접하고, 그냥 가시면 서운해 하실 테니까 선물도 드려요. 100세 이상 남녀 어르신들에게 보청기 같은 ‘장수상’도 드립니다.”
-동료연예인들이 많이 도와주겠다.
“아나운서 김병찬, 개그맨 원일·방일, 후배가수 권성희·현숙·김상배·문연주 등 젊은 사람들이 나서서 해요. 그들에게는 미리 전화 연락할 필요 없어요. 행사 전날 와서 선물도 분류하고 당일에 일찍 행사장에 나와 어르신들 안내하고 그럽니다. 나중엔 한꺼번에 무대에 올라가 합창하기도 해요.”
-잊지 못할 일들이 많을 텐데.
“오랜 세월 찾아오시는 80대 어르신 부부가 계세요. 정정하신데 행사 끝나면 꼭 우리를 찾아오셔서 고맙다고, 우리가 착하다며 손에 사탕을 쥐어주시곤 돌아가세요. 그 분들이 잊지 않고 찾아오셔서 좋아요. 이 세상에 가수가 있는 한 이 행사는 계속될 겁니다.”

김상희씨는 가수활동과 더불어 이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제3회 예술실연자대상 가수분야(1998), 제11회 대한민국연예예술상 대상(2004), KBS 가요대상 공로상(2005), 제13회 대한민국 전통가요대상 공로상(2014) 등을 수상했다.
-여전히 소녀 같다.
“늘 즐거운 마음으로 노래하고 바쁘게 살아서 그런가 봐요. 일하는 게 행복해요. 예전에는 ‘이래서 안 해요’ 했지만 이제는 ‘괜찮으면 가서 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네요.”
-방송일도 오래했다.
“수술 직전에 교통방송 프로를 그만뒀어요. 일을 하지 않으니까 하루가 길더라고요. 가끔 일하러 가야 되지 않나 깜짝깜짝 놀라기도 해요. 의사가 일을 줄이라고 했지만 그래도 방송 하는 게 몸에 맞는 옷 같아서 그만두어야겠다는 생각은 안 해요. 송해 선생 빼고 내 나이만한 사람의 여자가 방송을 고정적으로 하는 이는 없을 겁니다.”

김상희씨의 방송경력은 196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여성 진행자가 전무하던 당시 KBS-TV ‘당신의 멜로디’라는 쇼 프로그램을 처음 맡았다. 담당 PD가 ‘방송이 잘 안되면 사표를 쓰겠다’며 방송국 간부들을 설득한 결과였다. 그 PD가 바로 남편인 유훈근씨다. 유 PD의 아버지는 4선 의원을 지낸 유청씨이다. 유 PD는 MBC로 옮겨 보도부 차장으로 있을 때 고 김대중 대통령의 공보비서로 들어가면서 정치와 인연을 맺었다. 5공화국에서 야당 정치인에 대한 탄압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가족도 예외가 아니었다. 무대에 설 기회를 잃은 김씨는 생애 가장 어려운 시기를 맞아 길거리 음식장사에 나서기도 했다.
-음식장사 얘기는 금시초문이다.
“남편이 정치 좀 한다고 해 핍박 받고 방송 끊기고 다 끊겼어요. 이화여대 골목에서 장사를 하던 후배가 옆에서 (샌드위치)해보라고 했지만 오래 못했어요. 장사 아무나 하는 게 아니란 걸 깨달았어요. 마음 아프면 더 주게 되고…옆에서 배운다고 하다가 곧 접었어요.”
-대신 정치하고픈 마음은.
“정치는 정치인이 하는 거고 저는 연예인이니까 방송을 해야겠지요.”
-가수가 된 계기도 재밌다.
“고려대 법학과 2학년 때 KBS 전속가수가 됐어요. ‘학사가수’라고 해서 덕을 많이 봤지요. 오다가다 만나는 선배들이 밥도 잘 사주고 그랬어요.”
-집안의 반대가 심했다고.
“아버지는 ‘황야의 무법자’ 같은 마카로니웨스턴영화를 수입·배급했던 합동영화사를 운영해 집안이 넉넉했어요. 무대 뒤에서 가수들이 젖을 먹이는 등 연예인들의 생활상을 잘 아시니까 못하게 한 거지요.”
-어떻게 설득했나.
“제 가수생활에 가장 큰 도움을 주신 작곡가 손석우 선생이 부모님을 만나 ‘내가 열심히 해서 내 딸같이 키워서 좋은 가수 만들 테니까 걱정하지 마시라’고 설득했어요. 방송국 시험 볼 때 심사위원도 하셨는데 나중에 들은 얘기로는 응시생들 가운데 제가 1등으로 노래를 제일 잘 불렀다고 해요.”
-손석우 작곡의 노래를 많이 불렀다.
“그분이 저에게 첫 번째 만들어준 곡이 ‘처음 데이트’(1965년)란 곡이에요. 노랫말이 예뻐서 상도 받고 그랬어요. ‘단벌신사’(1969년) ‘오늘 같은 날은’ 등이 그분 곡이에요.”
-‘단벌신사’는 금지곡이었다고.
“그 곡 중에 ‘우리 애인은 단벌옷에 넥타이 두 개’라는 가사가 있어요. 북에서 그 노래를 대며 남한사람들이 못산다고 비방한다고 해서 그렇게 됐고, ‘어떻게 해’는 운동권학생들이 경찰에 쫓기다 ‘어떻게 해’라고 외친다고 해 금지됐다고 해요.”
김상희씨는 ‘삼오야 밝은 달’, ‘울산 큰애기’, ‘경상도 청년’, ‘대머리 총각’, ‘코스모스 피어있는 길’, ‘빨간 선인장’, ‘홍콩 엘레지’, ‘즐거운 아리랑’ 등 50장의 음반과 300~400곡의 히트곡을 남겼다.
-애착이 가는 노래라면.
“가을에는 ‘코스모스…’, 어버이날은 어머니 팔베개에 머리 묻고…라는 ‘팔베개’를, 겨울에서 봄으로 가면 ‘빨간 선인장’, 방송국에서 ‘즐거운 아리랑’ 해달라고 하면 그 노래를 부르곤 해요. ‘대머리총각’은 안 부르면 무대에서 못 내려와요. 할머니들이 놔주질 않아요.”
-가수란 직업이 어떤가.
“정말 좋은 직업이라고 생각해요. 슬플 때 만져주고 기쁠 때는 더더욱 같이 하고, 심리학박사의 치료도 좋지만 가수들 노래 듣고 스스로 마음을 다스리는 것도 좋은 치료법이라고 봐요.”
-혹시 법대 나와 가수 된 걸 후회하는지.
“후회보다는 어머니에게 죄송한 마음이에요. 직접 듣지는 못했지만 어머니는 제가 가수한다고 하자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고 하셨대요. 외동딸이 법조계에 들어가는 게 어머니의 꿈이었으니까요. 그렇지만 어머니는 마음을 접으면서 제일 먼저 저에게 승용차를 하나 사주셨어요. 방송 일에 가장 필요한 거였지요.”
-얼굴이 알려지지 않았다면 무얼 해보고 싶나.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아요. 재래시장에 철퍼덕 앉아 맛있는 거 사먹고 싶고… 우리 어머니가 시장에선 절대 물건 값 깎지 말라고, 그게 제일 못된 짓이라고 하셨어요.”
-나이듦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나.
“우리 아들이 날 보면 어떡하나 생각하면 오싹해져요. 혹시 내가 흐트러지는 거 보면, 남편이야 가장 측근이니까 뭘 해도 한 눈 질끈 감겠지만, 자식은 아무래도 냉정할 거 같아요. 내가 아들에게 그랬어요. 행여 치매에 걸리면 요양병원에 보내달라고요. 어차피 남편은 날 버릴 사람이 아니니까요.”
-어떻게 늙고 싶나.
“어르신들 세분 이상 모이면 종종 시끄럽지요. 저는 친구들과 얘기하다가도 ‘내 목소리가 크지 않니’하고 물을 때가 있어요.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당신의 흐트러진 모습을 보면 어떻게 생각할까, 그런 마음가짐으로 정신 차리고 살아요.”
글·사진=오현주 기자 fatboyoh@100ss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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