측추병원‧학문외과…요상한 병원명에 소비자 혼란
측추병원‧학문외과…요상한 병원명에 소비자 혼란
  • 배지영 기자
  • 승인 2016.04.01 10:57
  • 호수 5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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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란 초래하는 병원 간판들

길거리를 지나다니다 보면 ‘당노한의원’, ‘측추병원’, ‘뉴방외과의원’, ‘학문외과병원’ 등 도저히 뜻을 알 수 없는 단어를 조합한 병원이름을 흔히 발견할 수 있다. 맞춤법이 틀린 것이라고 오해할 수 있지만 여기에는 숨겨진 사연이 있다. 정부가 지정한 전문병원 이외에는 질환명이나 신체부위를 병원 이름에 쓸 수 없게 한 의료법 규정 때문이다.

▲ 질환이나 신체부위를 병원이름에 쓰지 못하는 의료법 규제를 피하기 위해 편법으로 병원명을 작명하는 병원들의 사례가 많아지고 있다. 사진(왼쪽 위부터 시계 반방향으로)은 이를 e, 목허리를 모커리, 항문을 학문, 유방외과를 교묘하게 변형해 쓰고 있는 병원간판의 모습.

척추·항문·허리 등 신체 부위 병원이름에 못써… 규제 피해 편법 작명
정부 “전문병원과 구별 위해 규제 불가피”… 소비자단체 “재고할 필요”

환자들이 혼란을 겪고 있는 대표적인 용어는 학문, 창문, 뉴방, 탐모, 측추, 형광, 모커리 등이다. 학문을 소리 나는 대로 읽으면 항문이, 목·허리는 모커리가 된다. 은연중에 항문과 목허리를 전문으로 하는 병원임을 내세우는 것이다. 또 측추는 척추로 읽히도록 고안한 말이며, 무릅과 무룹은 무릎, 뉴방은 유방, 탐모는 탈모를 의미한다.
병원들이 이러한 병원명을 사용하는 것은 현행 의료법을 피하기 위해서다. 의료법 제42조와 시행규칙 40조(의료기관의 명칭)에 따르면 의료기관의 종류, 즉 의원·한의원·치과의원·병원·종합병원·한방병원·요양병원 앞에 홍길동 등의 고유명사를 쓸 수 있게 규정했다. 그러나 질환명을 가리키는 말은 쓰지 못한다. 디스크·탈모·치질·아토피·비만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질환명에는 신체부위(무릎·위·간·대장 등)도 포함된다는 게 정부의 유권해석이다. 이를 피하려고 병원 이름에 요상하게 변형된 단어(측추‧뉴방‧학문‧무릅 등)가 붙은 것이다.
다만, 보건복지부가 전문성을 인정한 111개 전문병원은 수식어에 쓸 수 있다. 이때에는 ‘보건복지부 지정 척추전문병원 ○○병원’이라고 표기해야 한다. 그러나 여기에도 병원의 고유 명칭에는 쓸 수 없다.
이처럼 의료법 규정이 까다로운 이유는 환자가 쉽게 현혹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특정 신체부위나 질환 이름을 병원 명칭에 쓰게 되면 그 분야에 전문성이 있는 것으로 오해를 불러올 수 있고 남용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규제에도 불구하고 변형 기법은 날로 진보하고 있다. 항문을 쓸 수 없으니 ‘학문’으로 표기한 다음 ‘학’의 기역 받침을 둥글게 말아 ‘항’처럼 보이게 한다거나 유바외과로 쓰고 ‘바’ 아래에 ‘외과’를 붙인다. 이때 외의 ‘ㅇ’을 ‘바’의 받침으로 붙여 유방으로 읽히도록 하고 있다.
비슷한 사례로 창원시 봉곡동에 위치한 ‘허&리병원’이 있다. 이름만 봐도 허리 진료를 전문으로 하는 병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지만 허와 리 사이에 and (그리고)를 의미하는 ‘&’을 넣어 교묘하게 의료법 위반을 피했다. 병원 관계자는 “우리 병원이 허리 환자를 많이 다루지만 신체부위를 병원 이름으로 쓸 수 없어 이름을 이렇게 지었다”며 “실제로 원장님들 성도 허씨와 이씨”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 같은 규제는 ‘눈 가리고 아웅’식에 불과하다는 것이 일선 병원들의 지적이다. 개원의들은 “현행 규제가 오히려 환자들에게 더 큰 혼란을 줄 수 있다”고 말한다.
대한병원협회 관계자는 “병원 명칭 규제가 오히려 꼼수만 불러일으켜 환자들의 혼란만 더 가중시키고 있다”며 “병원에 ‘학문외과가 항문을 치료하는 곳이 맞느냐? 맞춤법이 틀린 것 아니냐?’라는 식의 문의 전화가 많이 와 매번 간호사들이 설명하느라 곤욕을 치르고 있다”고 전했다.
소비자단체 또한 “의료서비스는 일반 상품과 다른 만큼 상호명이 정확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김경례 한국소비자원 의료전담팀 팀장은 “의료는 몸을 맡기는 곳이므로 상호명부터 정확한 정보를 줘야 하는데 신체부위·질환명을 금지하는 것은 황당한 규제”라면서 “소비자 눈높이에서 진지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제중 복지부 의료기관정책과 주무관은 “편법인 데다 오해의 소지가 있어 전국 보건소에서 되도록이면 변형된 명칭을 허가하지 못하게 유도하고 있다”면서도 “그러나 위법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따르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단속하지는 않는다”고 전했다.
글·사진=배지영 기자 jybae@100ss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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