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회와 우리는 형제기관… 통일까지 사명감 갖고 힘을 모읍시다”
“노인회와 우리는 형제기관… 통일까지 사명감 갖고 힘을 모읍시다”
  • 오현주 기자
  • 승인 2016.05.13 13:40
  • 호수 5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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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노인회 신임 고문 김진영 성우회 회장

폭탄주,사병 노역 줄이는 등 새 ‘육군문화’ 창조
군 선교에 앞장… 신앙으로 무장한 군대 되길 바라

지난 4월 대한노인회 고문으로 위촉된 김진영(78) 성우회 회장은 소감을 묻자 “성우회와 대한노인회는 형제기관이라는 생각이 든다. 통일의 그날까지 두 기관이 사명감을 가지고 국가 안보와 사회 정의 실현에 맡은 역할을 다하자”고 말했다. 김 고문의 ‘형제기관’이라는 말이 가슴에 와 닿았다. 서울 뚝섬의 대한민국재향군인회 건물 5층에 위치한 성우회 회장실에서 김 회장을 만나 100세시대 노인의 사회적 역할과 36년 군 생활을 들었다.

-‘형제기관’이라는 말이 친근감을 들게 했다.
“대한노인회나 성우회나 70대 이상의 회원들로 구성돼 있고 다 같이 나라가 어려울 때 조국의 산업화에 헌신했다는 점에서 그런 생각이 들어요. 아마 성우회의 평균연령이 더 높을 겁니다. 성우회는 70대 이상이 65%이거든요. 개인적으로도 노인회와 인연이 깊어요. 안필준 전 대한노인회장(1932 ~2009) 시절 제가 노인회 홍보대사 1호였어요.”
-성우회는 어떤 단체인가.
“예비역 장성 출신들의 모임으로 1966년 박정희 대통령이 생활이 어려운 회원들을 돕는다는 취지로 기업 하나를 붙여 만들었어요. 사회정화위원회에 의해 한동안 해체됐다가 1989년에 재창설됐어요.”
-어떤 일들을 주로 하나.
“첫 번째 목적은 회원들의 친목이고, 두 번째는 국가안보자문기관으로 군에서 쌓은 역량을 활용해 나라의 안보의식을 확산하는 일을 합니다. 마지막으로 미국·일본·중국 등 해외의 유사단체들과 전략적인 문제를 토의하는 모임을 정기적으로 개최합니다.”
-성우회원들은 연금을 많이 받는다고 들었는데… 성우회는 어떻게 운영되나.
“생각하기 나름이에요. 연금만으로는 품위를 유지하기 어려워요. 장성 출신들 대부분이 물가가 비싼 서울에 거주하고 소속 단체도 많고 내는 회비도 만만치 않아 경제적으로 여유롭지가 않아요. 성우회는 회원들의 회비와 ‘자유’라는 월간지를 제작해 군·경찰에 배포해 거기서 나오는 수익금 등으로 운영됩니다.”
-최근 김정은이 노동당 7차대회에서 ‘노동당 위원장’이 됐다. 소감은 어떤가.
“개인적으로 북은 미래가 없다고 봐요. 북은 붕괴돼 정권이 바뀌던가, 아니면 나라 자체가 소멸 되던가 둘 중 하나가 될 겁니다. 그게 언제가 될 것인가. 전 그게 멀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한 국가가 저런 체제와 저런 정책으로 더 이상 얼마나 가겠어요?”

김진영 회장은 부산 출신으로 육사 17기이다. 12·12 주체세력인 안현태·허화평·허삼수 등이 동기들이다. 미 지휘참모대학을 수료하고 수도방위사령관, 한미연합사 부사령관, 육군참모총장을 역임했다. 1993년 예편 이후 어떤 단체에도 소속되지 않았다. 장로이자 군선교연합회 회장이다.

-군인의 길을 택한 특별한 계기라도.
“우리 때는 모두가 가난했어요. 부모님에게 대학을 보내달라는 건 정말 경제적으로 불가능한 일로 생각됐어요. 우연히 육군사관학교 생도모집 광고에서 무료로 4년간 공부시켜주고 학사학위까지 준다는 걸 보고 지원했지요.”
-군이 체질적으로 맞았는가 보다.
“전쟁 직후 당시의 불안정하고 무질서한 사회가 저를 짜증나게 했어요. 그런데 육사는 모든 것이 질서정연하게 움직였고 그게 제 생리에 딱 맞았어요. 누구는 군 생활을 힘들게 했다고 하지만 저는 남들이 보기에 이상할 정도로 행복하게 했어요.”

군 시절 김진영 회장은 부하에게 불필요한 노역을 못하게 하는 등 합리적인 지휘관으로 알려졌다. 1980년대 말, 김 회장이 교육사령관으로 있을 때의 에피소드다. 눈이 많이 내리던 날, 대대장이 5분대기조 출동 명령을 내렸다. 큰길에서 사령관 공관까지 도로 위의 눈을 치우라는 것이다. 사병 한 명이 미니골프연습장 그물 위로 올라가 눈을 털어냈다. 마침 외출했다가 돌아오던 김 회장이 그 장면을 보았다. 김 회장은 사병에게 내려오라고 손짓하고는 대대장에게 “내가 눈치우지 말라고 그랬지, 그리고 저 위에 왜 병사를 올라가게 한 거야, 어차피 녹을 눈인데, 너 같으면 저기 올라가서 눈 치우고 싶겠어”라고는 당장 병사들을 내무반으로 돌아가게 했다. 당시 눈을 치웠던 사병은 “아, 저런 지휘관의 명령이라면 목숨도 걸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

-김 회장 같은 지휘관만 있다면 군 내부의 불상사가 크게 줄 텐데.
“군 사고의 원인 중에 음주가 많아요. 그것도 폭탄주이지요. 제가 총장에 취임하면서 예하부대에 지휘서신을 내렸어요. 폭탄주를 절대 돌리지 말고 술을 적당히 먹으라고 지시한 겁니다. 저는 기독교 신자라서가 아니라 술을 마시지 않아요. 체질적으로 몸이 받지를 않기도 해요. 그래서 군 생활에 어려움도 많았지요. 상관이 주는 잔을 거부하자 충성심이 없다는 소리를 듣기도 했고요. 건강하고 건실하고 신뢰 받는 육군문화를 만들어 거기에 맞춰 부대를 지휘했어요.”

김진영 회장은 전두환 전 대통령을 도운 5공 개국의 공신이다. 12·12 사태 당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계엄사 합동수사본부로 이송하려는 과정에서 발생한 총격전을 중단시켜 주목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다른 군인과 달리 정계로 진출하지 않고 끝까지 군인의 길을 걸었다.

-36년 군 생활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라면.
“여러 가지가 많지요. 군을 떠나 생각해보니까 평생 해야 할 일이 군 선교란 사실이에요. 제가 육군훈련소 내에 170억원을 들여 교회를 짓는 건축위원장을 맡아 후원도 얻으러 다니고 그럽니다. 기독교를 오래전부터 믿어왔지만 결정적으로 군 선교를 해야겠다고 결심한 건 1년간 미 참모대학 유학생활 때였어요. 당시 월남전이 끝나갈 무렵 미군은 오랜 전쟁으로 지쳐 있었고, 전장에 3번 참전해야 하는 룰 때문에 죽음에 대한 공포심이 컸어요. 그래서인지 신앙심이 다들 깊었어요. 일요일에는 교회에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군인들로 가득 찼어요. 그걸 보고 나중에 귀국해 나도 부하들에게 전도를 해 (기독교를)뜨겁게 믿는 강한 군대를 만들어보고 싶었던 겁니다.”
-1000만 노인인구 시대를 앞둔 요즘 노인의 역할이라면.
“이 시대 노인상을 가만히 생각해보면 저희 할아버지가 떠오릅니다. 어릴 적 할아버지는 저희에게 큰 산이었어요. 팽이가 필요하다면 할아버지가 깎아주셨고 팽이를 치는 법도 전수받았지요. 일기예보가 없던 시절 할아버지가 ‘어이구 허리야, 내일쯤 비 오겠다’고 하면 정말 비가 오고요. 모든 생활이 할아버지의 지혜에 의해 자연스럽게 흘러갔어요. 그래서 권위가 있었지요. 그런데 지금은 어때요. 아이들은 스마트폰 게임에 익숙한데 할아버지들은 할 줄을 몰라요. 아이들 보기에 할아버지는 바보예요(웃음). 여기서부터 노인의 위상이 추락하기 시작합니다. 과연 이걸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 사실 저로서도 의문이에요.”
-대안은 없는가.
“나는 늙었다, 나는 안 된다는 생각을 접고 이 나라를 건설할 때 외쳤던 새마을운동, ‘하면 된다’ 는 그 정신으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어요.”
-노인들이 가족과 사회에 짐이 되지 않겠다는 심리적 부담도 많이 느끼는 것 같다.
“맞아요. 나라에 부담이 되지 말고 보탬이 돼야 합니다. 6·25 체험을 했고 북의 정체에 대해서 노인 세대가 제일 많이 알고 있어요. 젊은이들은 잘 모릅니다. 과거의 토막지식에 끝내지 말고 좀 더 정리해 후손들에게 6·25를 알릴 필요가 있어요.”

김진영 회장은 노인은 가족과 나라에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서라도 건강을 잘 관리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김 회장은 “예전에 감기 따위는 군인정신으로 버텼지만 이제는 면역력이 떨어져 한 달을 앓아누운 적도 있어 건강에 이상을 느끼면 바로 집 근처 병원을 찾는다”며 “복지제도(의료보험)를 활용해 건강을 잘 관리, 국가에 부담이 되지 않도록 하는 것도 애국이지 않느냐”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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