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레코딩 때 눈물로 녹음… 어머니가 너무 그리워서”
“첫 레코딩 때 눈물로 녹음… 어머니가 너무 그리워서”
  • 오현주 기자
  • 승인 2016.06.24 11:30
  • 호수 52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960년대 애창곡 ‘뜨거운 안녕’ 가수 쟈니리

6·25 때 혼자 부산으로 피난, 미 장성에게 입양 돼 ‘쟈니리’ 이름 얻어
15년 전 식도암 수술… 병 수발 해준 네 번째 아내가 내 생명의 은인

1960년대 나훈아·조용필 못지 않은 인기를 누렸던 가수 쟈니리(79). 히트곡은 의외로 적다. ‘뜨거운 안녕’, ‘사노라면’과 KBS 드라마 ‘제3지대’ 주제곡 그리고 팝송 ‘오 론썸 미’를 번안해 부른 ‘오 우짤코’ 등 손꼽을 정도다. 그렇지만 사생활이 잘 알려지지 않은 탓일까. 동시대를 살았던 국민의 기억에 그처럼 뚜렷이 한 점으로 남은 가수도 드물다. 80 가까운 나이에도 마이크를 놓지 않은 그를 만나 히트곡에 얽힌 뒷얘기, 굴곡진 삶 등을 들었다.

-‘뜨거운 안녕’은 지금도 사랑을 받는 곡이다.
“국내외에서 많이 불렸어요. 이미자·정훈희·임희숙 등이 불렀고 젊은 남자가수들도 많이 불렀지요. 독일의 ‘니코’라는 여가수가 영어로 번안해 부르기도 했고요.”
-어떻게 만들어졌나.
“코미디언 서영춘의 형인 서영은씨가 작곡을 했고, 백영훈이라고 동아방송 PD였던 이가 작사를 했어요. 서씨는 ‘두손 들었다’란 노래도 만들었어요.”
-에피소드라면.
“1966년 첫 취입한 레코드엔 제 울음이 담겼어요. 불 꺼진 스튜디오에서 보면대(악보 받침대) 하나 앞에 두고 녹음하는데 고아처럼 자란 신세가 서럽고, 어머니가 너무 보고 싶어 말도 못하게 울었어요. 필(느낌)이 오버했다고 다시 녹음하자는 말이 나왔지만 제가 전속된 신세계레코드사 사장이 그냥 내보내자고 했어요.”
-바로 히트됐나.
“나오자마자 대박 났지요. 그때는 가수들이 피카디리·단성사·명동 시공관 같은 극장에서 노래를 불렀어요. 하루에 서울과 지방 등 4곳을 돌았어요. 극장 한곳에서 받은 출연료가 15만원, 당시 500원이면 애인과 둘이 시발택시 타고 영화 보고 점심 먹으면 딱 됐던 시절이었으니까 대단히 큰돈이었어요.”
-지방 다니기가 불편했겠다.
“서울 부산 간 대한항공 노선만 있던 시절이었어요. 김포공항 가는 길이 비포장이라 힘들었어요. 비행기 표가 3만원이었던 걸로 기억해요. ‘시발 차’라고 미군이 쓰던 드럼통을 두들겨 만든 지프차를 타고 다녔어요. 그거 50만원에 샀던 가, 운전수 두고 차 안에서 도시락으로 끼니 때우며 공연 다녔어요. 그 차도 아무나 갖지 못했던 시절이었어요.”
-인기가 어느 정도였나.
“주로 여성 팬들이었어요. 모두가 살기 힘들어 딸들은 대학에 보내지 않았던 시절, 어린 나이에 공장에서 먹고 자고 일하며 가족 생계를 짊어진 그들을 두고 ‘공순이’라는 말도 생겨났지요. 그들의 유일한 낙은 극장에서 가수 노래 듣는 거였어요. 당시 라이벌이었던 가수 ‘정원’은 ‘허무한 마음’으로, 저는 ‘뜨거운 안녕’으로 최고 인기를 얻었어요. 사회자가 두 사람을 소개하는 순간 극장 천정이 날아갈 정도였어요. 요즘 ‘오빠부대’와는 상대도 안 됩니다.”
-극성 팬들도 많았을 텐데.
“학교도 안가고 저를 따라다닌 여자들이 많았어요.”
-돈도 많이 벌었겠다.
“당시 연예계는 돈을 벌 수 없는 구조였어요. 들어오는 만큼 나가는 돈도 많았어요.”
-‘사노라면’은 어땠나.
“그 노래도 ‘뜨거운 안녕’과 같은 시기에 나왔어요. 작곡가 길옥윤씨가 만들었어요. 역시 나오자마자 히트했지요. 그런데 1년 후엔가 금지곡이 돼 사람들 기억에서 멀어졌어요.”
-왜 금지됐나.
“박정희 정권에선 금지가 다반사였어요. 원래 곡명이 ‘내일은 해가 뜬다’인데 ‘해가 오늘 뜨지 내일 뜨느냐’고 해서 금지됐다고 해요. 저도 자세한 내막은 몰라요.”

쟈니리의 본명은 이영길이다. 만주에서 연극배우인 중국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손에 이끌려 외가가 있는 평안남도 진남포로 돌아오자마자 6·25 전쟁이 났다. 혼자 부산으로 피난 나와 그곳에서 제7항만사령관인 미국인에게 입양됐다. 13세였다. 취미 삼아 피아노 치고 노래 부르던 수양아버지 옆에서 자연스럽게 외국노래를 따라 부르곤 했다. 1958년 쇼 단체에 들어가 팝송을 우리말로 바꾼 곡들을 부르며 가수의 길을 걸었다. 네 번째 결혼한 부인과 둘이서 서울 이촌동 아파트에 산다. 제19회 대한민국연예예술상 공로상 수상(2012년).

-부친에게서 예술 방면의 소질을 물려받았나보다. 아버지 얼굴은 기억하는지.
“아주 어릴 적 길림에서 어머니가 연극무대 위를 가리키며 ‘저 사람이 네 아버지’라고 한 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어요. 전혀 기억 못하지요.”
-미국에서 성장했나.
“한국에서 컸어요. 전쟁 때 이승만·이기붕 등이 모두 부산에 내려와 있었어요. 저희 집이 대신동에서 제일 큰집이었고 이기붕이 우리 집 옆에 살았어요.”
-미 예비역장성인 수양아버지가 유산을 물려주지 않았나.
“미국은 우리와 달라요. 그 사람들은 유산 대부분을 사회에 환원해요. 자식도 그런 부모를 원망하지 않고요. 제 성공을 못 보고 돌아가셔서 그게 안타까워요.”
-‘뜨거운 안녕’ 이후 후속곡이 없다.
“제가 건달들 때문에 가요계를 멀리했어요. 그들은 공짜로 노래를 해 달라거나 심지어 돈을 요구하기도 했어요. 연예인에 대한 인식이 지금과 아주 달랐어요. 우리를 보면 ‘딴따라 간다’고 했을 정도니까요. 그런 게 싫어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갔어요. 이후로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지냈어요.”
-미국에선 뭘 했나.
“처음엔 LA 한인사회에서 노래를 불렀지만 돈이 안 돼 그만 두고 식당에서 배달이나 호텔 주방장 보조 일을 했어요. 1년 정도 저축하면 잠시 지낼 만해요. 노래 부르는 거보다는 맘이 편했어요.”
-네 번째 결혼이라고.
“10세 연하의 아내가 생명의 은인이에요. 15년 전, 결혼한 지 2년 만에 제가 식도암에 걸렸어요. 말기라 다들 죽을 거라고 했어요. 아산병원에서 식도를 제거하고 위를 끌어올리는 수술을 받고 겨우 살아났어요. 병 수발을 다 해낸 아내가 정말 고맙지요.”
-다행히 목소리를 살렸다.
“성대를 다치지 않게 하려고 젊은 의사가 신경을 많이 써주었어요.”
-가수란 직업에 후회는 없는지.
“후회는 하지 않아요. 요즘도 방송국 가요 프로에 출연하고 전국을 다니며 노래를 해요.”
-최고 인기가수에서 주방장 보조로 영욕이 교차한 삶이었다.
“저는 젊었을 적에 인기란 한순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어요. 몇 안 되는 극장에서 같은 얼굴을 자꾸 보게 되면 금방 식상하게 되니까요. 그런 날이 올 것을 대비하며 살았어요. 이런 얘기를 한다는 게 건방진 것 같지만 인생은 본인이 콘트롤(조절)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봐요. 너무 좌절하면 마지막 인생이 안 좋아져요. 세상은 고르지 못하잖아요. 과거 생각하지 말고 적은 돈이라도 벌어 현실에 맞춰 쓰면 남에게 손 벌리지 않아도 되고 본인도 맘 편하게 지낼 수 있어요.”
글·사진=오현주 기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