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책 받아들고 눈물 글썽이던 카자흐스탄의 고려인 얼굴 생생”
“한글 책 받아들고 눈물 글썽이던 카자흐스탄의 고려인 얼굴 생생”
  • 오현주 기자
  • 승인 2016.07.08 11:25
  • 호수 5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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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석우 해외동포책보내기운동협의회 이사장

17년간 국내 120여곳, 해외 60여개국에 총 180여만권 전달
일흔 넘긴 지금도 무거운 책 박스 옮겨 “힘 없으면 이 일 못해”

충북 보은군 교사2리 경로당 북카페 개소식(6월28일)에 이어 7월 4일 전북 전주시 LH이노팰리스 경로당 북카페가 문을 열었다. 경로당에 작은 도서관을 만드는 이 일에 손석우(73) 해외동포책보내기운동협의회(이하 ‘해동협’) 이사장이 참여해 경로당마다 도서 2000여권을 보내주고 있다. 손 이사장은 “경로당이라고 책을 아무거나 보내지 않는다”며 “이 일을 하면서 경로당을 다시 보게 됐다”고 말했다. 서울 논현동의 ‘영동가구’ 건물 4층에 위치한 ‘해동협’ 본부에서 만나 17년 간 책 보내기 운동에 쏟은 열정과 에피소드를 들었다.

-무더위에 수고가 많으신데.
“책이 들어오면 만사 제치고 웃옷 벗고 박스를 옮겨요. 이 일은 힘이 없으면 못해요.”
-전주의 경로당 북카페는 어땠는가.
“아파트 단지에 있는 경로당 진입로에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플래카드도 매달아놓고 환영을 해주어 기분이 아주 좋았어요.”
-어떤 책들을 보냈는가.
“시대에 맞는 책들을 읽어야 도움이 되니까 옛날 책은 보낼 수 없어요. 이번엔 맨부커상을 수상한 한강의 소설까지는 못가더라도 그에 준하는 책과 6·25 전쟁 관련 책들입니다.”
-그 많은 책을 어떻게 운송하는지.
“오래 전에 우리와 협약 관계를 맺은 종이문화재단(이사장 노영혜) 쪽에서 배송을 맡아주었어요. 노 이사장님도 북카페에 종이접기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것으로 압니다.”
-경로당을 새롭게 보았다는 의미는 무언가.
“옛날 화투 치던 경로당과는 분위기가 다르다는 걸 느꼈어요. 여든 넘은 전주시지회장(오경남)이 안경도 안 쓰고 스마트폰을 두드리는 모습을 보고 속으로 놀랐어요. 경로당 회원 중에는 사회에서 높은 위치에 계신 분들도 많고요.”
-처음 이 일을 시작한 계기는.
“1999년에 브라질 상파울루에 갔다가 한글학교를 방문하게 됐어요. 박정희 정부 때 농업이민으로 브라질에 정착한 우리 동포 3500여명이 절반 정도를 내고 우리 정부가 나머지를 지원해 현지에 한글학교를 세웠어요. 그 학교 도서관에 책이 없는 걸 보고 제가 귀국해 책을 보내드리겠다고 약속한 것이 발단이에요.”
-정말 책을 보냈는가.
“당연하죠. 경기도 교육청과 중부일보·경인일보 등 언론사 그리고 평소 관계를 맺어온 지인들의 도움을 받아 ‘책 모으기 캠페인’을 벌여 기증 받은 책 6000권을 브라질에 보냈어요. 본부가 필요해 ‘해동협’도 만들었고요.”
-해외로 책을 보내려면 운송비가 장난 아니다.
“제가 여의도에서 정당의 인권민원국장을 했어요. 노사현장을 돌아다니며 문제 해결을 도와주었는데 당시 노사분규를 겪었던 대한항공에도 조금 관여했어요. 그 인연을 믿고 무작정 대한항공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하자 받아주더라고요. KAL 비행기로 실어 날랐어요.”
-매번 부탁하기도 어려웠을 텐데.
“그 다음엔 한진해운을 찾아갔지요. 면식이 있던 부장이 사장이 돼 있었어요. 지원 부탁이 쉬웠지요. 한진해운의 배로 브라질·호주 등지에 보낼 수 있었어요.”
-지금까지 얼마나 보냈는가.
“세계에 나가 있는 우리 동포가 750만명입니다. 세계 어느 곳이든 없는 데가 없어요. 교포가 가장 많은 미국에 많이 보냈고, 중국·호주·아르헨티나·브라질·카자흐스탄·우즈베키스탄·키르기스스탄 등 60여개국에 총 180여만권을 보냈어요. 그 중 30%는 국내의 소외된 지역 120여곳에 전달했고요.”

충북 보은 출신의 손석우 이사장은 청소년 시절, 농촌계몽을 다룬 ‘상록수’(심훈)를 읽고 감동을 받아 4H, 새마을운동 등 농촌운동에 투신했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소 한 마리로 농사 몇 마지기 지으며 동네를 지켰다’. 마을회장, 군민회 회장 등을 지내고 상경해 정당 활동에 몸담았다. 브라질에 처음 책을 보낸 이후부터 현재까지 ‘해동협’을 이끌고 있다. ‘해동협’은 2,3세대 해외동포에게 우리 문화의 이해와 애국심을 심어주는 역할을 해온 공로를 인정받아 이명박 정부로부터 ‘독서문화상 대통령표창’, 박근혜 정부로부터 ‘세종문화상’을 받았다.

▲ 7월 4일 전북 전주시 LH이노팰리스경로당 북카페 개소식에 참석해 테이프커팅(왼쪽에서 여섯번째)을 하고 있다.

-해외동포의 애국심 고취에 기여하는 바가 클 것 같다.
“작년 미국 LA에서 해동협 주최로 독후감 대회를 했어요. 최고상인 한국의 문화체육부장관상을 수상한 고1 학생이 ‘아버지의 나라를 알게 됐고 앞으로 조국을 위해 자기가 무슨 일을 해야할 지도 생각하게 됐다’고 담담히 말하는 걸 보고 보람을 느꼈어요.”
-소개할 만한 에피소드라면.
“소련연방에 속했던 카자흐스탄의 알마티에 만주 독립운동가들의 후손인 고려인들이 동포사회를 이루며 살고 있어요. 10년 전 그곳에 책을 보내게 됐는데 여전히 사회주의가 지배해 문서 종류의 반입을 꺼렸어요. 우리 회원들이 한글을 익힐 수 있는 책 10박스를 등에 지고 들어가 겨우 전달할 수가 있었어요.”
-고려인들이 무척 반가워했겠다.
“그럼요. 집단농장에서 열심히 일을 해 소련연방의 최고훈장을 3개나 탄 고려인의 후손이 더듬거리는 한국말로 할아버지의 유언을 소개했어요. 남쪽으로 가면 우리가 태어난 조국이 있는데 나는 못 갔으나 너희들은 반드시 찾아가 할아버지 산소에 술이라도 부어놓고 온다면 내가 한이 없겠다, 그러기 위해선 한글을 알아야 한다는 유언을 남기고 작고했다며 한글 책을 받아들고 울먹일 때 우리 임원들 8명이 다 같이 울었어요.”
-그래서 이 운동을 하는가 보다.
“그렇지요. 사명감이 없으면 이 일을 못해요.”
-힘든 적도 많았을 것 같다.
“올해 초 중국 텐진에 있는 한글학교에서 책을 보내달라고 해 추운 날씨에도 부랴부랴 싸서 보냈는데 되돌아왔어요. 중국은 책 검열이 무척 까다로워요. 한 권 한 권 들춰보고 자국에 불이익이 된다고 생각되면 반입 불가예요. 에콰도르에는 30명의 동포가 다니는 ‘끼또한국학교’가 있어요. 그곳에 보낸 책이 3년만에 도착해 학교로부터 감사의 편지를 받은 적도 있어요. 책 박스가 남미의 이 나라 저 나라를 다 돌아다녔던 겁니다.”
-정부의 지원은 받지 않는가.
“주변에서 그런 얘기를 해주지만 만약 지원을 받더라도 그에 대한 반대급부가 우리로선 감당하기 어려워요. 남에게 손을 벌리지 않아요.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산다는 말처럼 스스로 해결합니다. 경기도 신갈에 있는 제 소유의 낡은 건물 임대료와 제 연금 보태 직원 월급 주고, 이 사무실은 이필우 전 의원의 도움을 받아 사용하고 있어요.”
-책은 주로 어디서 오는가.
“본부가 있는 강남구청에서 지금까지 가장 많은 책을 보내주었어요. 올해만 8만5000여권을 보내주었어요. 매일경제·세계일보 등 언론에서 책보내기 캠페인 등 홍보를 해주고 출판사에서도 보내줍니다. 물론 모두 새 책이지요. 제가 안성 일죽에 젖소농장을 하려고 사두었던 땅이 있어요. 거기에 철골로 창고 두 개를 지어 서고로 사용합니다.”
-평소에 책을 좋아했나.
“어디요. 저는 정말 책과 담을 쌓고 살았어요.”
-이 일을 통해 얻은 것이 있다면.
“제가 이 운동을 하면서 사람이 조금 됐어요. 이제는 책의 표지만 읽어도 내용이 무언지 감이 옵니다. 오래된 책일수록 책의 무게감을 느껴요. 아마 제가 일찍이 책을 훔쳐서라도 읽었더라면 이 일을 하지 않았을 지도 몰라요(웃음).”
글·사진=오현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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