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가 종친회를 찾아가다] 영천崔씨 대종친회
[명문가 종친회를 찾아가다] 영천崔씨 대종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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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7.07.20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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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武 백관 높은벼슬 충효전통 살아 숨쉬는 명문

본지는 숭조(崇祖), 경로효친의 아름다운 전통을 계승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기획 특집 면을 마련했습니다. 이 지면은 해당 성씨·본관 대종회의 요청 순서에 따라 기획·취재가 이뤄지고 있습니다. 본관 시조와 유래를 현대적으로 재해석, 재음미하고 그 성립과 발전, 인물배출 등에 대해 살펴보는 본 지면을 활용하여 각 성·본 대종회 및 종친회의 단합과 교육, 홍보효과를 거두시기 바랍니다.

 

글·최종동 편집위원

영천최씨(永川崔氏)의 시조공(始祖公) 최 한(崔漢) 이전의 상계(上系)에 대해서는 전해지는 문헌이 없어 특정할 수 없다. 다만 신라시대 육부촌의 하나인 돌산고허촌 촌장 소벌도리공이 범최씨의 득성조(得姓祖)라는 것은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범최씨가 득성 후 신라 경문왕 때 최치원선생 이후 최씨성을 많이 쓰게 됐다.


영천최씨의 분관(分貫)에 대해서도 문헌마다 다르지만 대략 다음과 같이 분적 세거했다. 시조공 휘 한(漢)은 고려 의종·명종조 양대에 벼슬해 삼중대광 신호위상장군에 이르렀으며, 나라에 큰 공을 세움으로써 연산부원군(燃山府院君)에 봉해져 시조(始祖)가 되었다. 연산은 지금의 영천으로, 후손들이 본관을 영천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시조 한(漢)은 고려중엽 행예부판 소감으로 후에 영의정에 증직된 최 식의 네 아들 중 둘째이며 네 아들 모두 크게 출사해 부원군으로 봉군됐다.

 

큰 아들 연(衍)은 월성부원군(경주), 둘째 한(漢)은 연산부원군(영천), 셋째 호(湖)는 곡강부원군(흥해), 넷째 익(瀷)은 호산부원군(순천)으로 각각 분적(分籍) 시조가 됐다.


영천최씨는 식읍으로 받은 영천, 삼산, 대전마을 지역에서 정착해 세거하다 세대가 내려오면서 영남지역을 중심으로 충청, 전라, 평북 일부지역까지 분포해 살고 있다.


영천최씨는 고려시대의 대문벌로, 시조공 한(漢)으로부터 10여대에 걸쳐 15~16명의 정승·판서 등 훌륭한 인물들을 배출한 문무겸전의 잠영세족(簪纓世族)으로도 유명하다.

 

조선조에는 학자·명문가와 학덕으로 추앙된 인물이 특히 많다. 고려중엽 이후 그 자손이 충훈절의(忠勳節義)로 관직과 행적이 사기실록 명인록을 장식하고 있다.


영천최씨는 크게 10개 파로 대별되고, 거기서 여러 지파로 분류돼 파별로 집성촌을 이루며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벼슬길을 따라 임지에서 세거하다 파조가 돼 집성촌을 이룬 것은 여느 성씨와 별반 차이가 없다.


2000년 통계청 인구 주택 총조사에 의하면 영천최씨는 전국 5886가구에 1만8721명이 세거하고 있는데, 영천을 중심으로 부산, 대구, 경상남북도에 집중돼 전체 종인의 70%가 살고 있다.

 

이는 신라시대 경주를 중심으로 한 범최씨 원조의 영향과 또 영천최씨 파조의 벼슬길 임지 때문으로 추정된다. 현재 경북 성주 법산과 함께 경산 곡란에 최대의 집성촌을 이루고 있고, 그 다음 영천, 군위율리, 경산, 원당 등에 많이 세거하고 있다.


총재공파(파조, 龍和) 파조의 둘째집이 연산부원군의 식읍지인 영천삼산 지방을 중심으로 전사, 월천, 서운, 자인영동, 영일, 원동, 영천애련 등에 분포돼 살고 있다.


판서공파(파조, 河泳)는 언양천곡, 건덕, 경산곡란에 집성촌이 있고, 특히 곡란은 판서공파의 종가가 위치해 있는데, 난포공 최철견의 난포고택(蘭圃古宅)은 조선시대의 고가로 1546년에 지었으며 경북 유형문화재 제80호로 지정됐다. 그리고 경주오금과 사복, 경산관산 등지에도 세거하고 있다. 그리고 군수공파(파조, 安悌)의 종손은 대구의 최문현씨고, 자인원당, 이전, 군위율리, 욱수, 풍각, 대구지산, 경산죽전 등지에 분포해 살고 있다.


정헌공파(파조, 有珍)는 현재 영천구정, 망정, 상동 등지에, 목사공파(파조, 有重)는 청도건현, 경산관산, 하양환상, 경산오산 등지에 거주하고 있다.


부사공파(파조, 繼性)는 고령연봉, 황간감상, 합천사촌 등지에, 사정공파(파조, 繼孫)는 최흥효의 둘째 아들 11세 최계손이 파조다. 경북 성주에 터를 잡게 된 것은 삼사좌윤(三司左尹)인 8세 최 흡(洽)이 성주이씨 시조인 농서군공 이장경(李長庚)의 외손(外孫)이라 그 영향으로 처음 성주에 정착했다.

 

그 후 최계손의 손자 13세 최희호가 고령현감을 지낼 때까지 죽헌공의 선조 5~6대는 성주 선남에 정착했었다. 그 뒤 낙향 5대만에 다시 서울로 이거해 4대 동안 서울 호현방(명동근처)과 고양, 원당에서 살았다. 17세 법산파 중시조 최항경 선생 때 성주 법산으로 낙향하게 된다.

 

죽헌공의 6대조까지의 묘소가 현재 성주 칠령대지(七嶺大枝)에 있다. 세거지는 성주법산을 비롯해 창천, 운산, 밀양, 경주하동, 고령어곡, 거창일근, 그리고 멀리 전남 담양에까지 퍼져 나갔다.

 

이 가운데 시중공후(侍中公后) 중시조의 큰아들 휘 태운(太云)공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서쪽으로 옮겨가다 전남 담양지방에 정착하여 세거지를 형성하게 됐다. 현재 광주를 비롯한 전남·북에 250여 가구 800여명의 미산공파(尾山共派) 후손들이 세거하고 있다.


진사공파(파조, 遠)는 군위거성, 외촌, 덕천 등지에, 찬성공파(파조, 光俊)는 7대조까지는 영천에 살았으나 현재는 울산약수에 세거하고 있으며, 영성군파(파조, 茂宣) 후손들은 충북영동, 원당 등에 세거하고 있다.


영천최씨는, 벌족은 아니지만 현재 전국에서 충효의 전통이 살아 숨 쉬는 명문가로 살아가고 있어서 후손들의 자부심이 대단하다.


※도움을 준 종친 : 최경식 삼운실업사장, 최판곤 중앙종친회부회장, 법우회원 일동

 

  최철견의 난포고택.

  오암서원.

 

  의병장 최문병의 용계서원.

 



최무선 화약발명으로 진포대첩 대승

손수제작한 화포전함으로 왜구 500척 전멸시켜

영천최씨의 대표적인 인물 최무선은 화약의 발명으로 진포대첩을 대승으로 이끌어 전사에 길이 이름을 날렸다.


진포대첩은, 왜구가 금강 하구 진포(지금의 군산, 1380년 우왕8년)에 대거 침입했을 때 화약과 손수 제작한 화포전함 100여척으로 왜구의 선박 500여척을 전멸시킨 해전을 말한다. 이 해전은 세계 해전사상 최초의 함포전으로 서양보다 200년 앞선다. 이 전공으로 최무선은 순성익찬공신과 영성군에 책봉되고, 광정대부 검교문하부사 삼중대광을 제수 받았다.


그 외 관음포해전 등 여러 차례 왜구를 소탕 섬멸해 태평성대가 되게 했고, 화통도감이 폐지됐으나, ‘화약수련법’ ‘화포법’을 저술해 화약 제조법을 남겼다. 이 화약 제조법이 아들 최해산에게 전수, 발전돼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으로 이어졌다.


조선개국 당시 최무선은 이성계 일파의 부름을 받았으나 거절하는 충절을 보였다. 이는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지론에 기인한 것이다. 그럼에도 그의 무공과 업적이 탁월해 아무런 위해도 당하지 않고 오히려 정헌대부 검교참찬문하부사 겸 판군기지사를 제수 받았다. 그리고 조선 태종은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우의정과 영성부원군에 추봉했다.


공의 묘소는 개성오적동 문부남변 승제문밖 옥림사 근처에 있으며, 영성군파의 파조가 돼 후예들은 현재 황간 영동지방에 세거하고 있다.


최무선 장군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금년 초에 정부(과학기술부, 8억원)와 경상북도(4억원), 그리고 영천시(4억원)의 지원으로 ‘최무선기념관’ 부지가 선정돼 현재 건립 중에 있다. 그리고 ‘최무선잠수함’ 승조원들이 최무선 장군 후손 2명에게 매 분기별로 장학금을 수여하고 있고, 그 외에도 각계에서 최무선 장군에 대한 각종 사업이 전개되고 있다.

  진포대첩 기념탑.

 



430년 유가(儒家) 집성촌 孝마을 법산(法山)

문무급제자 22명 생원 진사 19명 등 배출

경북 성주군 법산(法山) 입향조(入鄕祖) 17세 죽헌(竹軒) 최항경(崔恒慶)선생은 경기도 원당에서 진사를 지낸 최 정의 아들로 태어났다.

 

법산에 터를 잡은 것은 16세 때인 1575년 부친 진사공이 성묘차 성주 법산에 왔다가 병을 얻어 갑자기 세상을 떠, 한강 정 구(淸州人)선생의 도움을 받아 3년 시묘를 마치게 된 인연이 있다.

 

이때 어머니가 아들에게 “벼슬을 원치 않거든 굳이 서울로 돌아갈 것이 아니라 도학이 높은 한강 선생을 사사함이 어떠냐”고 권유해 선영에서 가까운 법산에 자리 잡았다.


죽헌 선생이 터 잡은 지 430여년이 지난 현재 100여호의 동성대촌을 이루어 살고 있는 성주 법산은 영천최씨 집성촌 중에서는 가장 규모가 큰 곳 중의 하나다. 긴 세월동안 유가의 전통을 지켜온 법산마을은 문무급제자가 22명, 생원·진사 19명 등 뛰어난 유학자와 특히 효행자가 많이 나왔다.


죽헌은 학덕을 겸비한 최고의 선비였고, 그의 두 아들 관봉과 매와 선생도 학문과 덕량이 빼어나고 효심이 지극해 죽헌 선생 3부자를 중국의 ‘소씨일가’에 비유하기도 했다. 이 3부자를 법산마을 앞 오암서원(鰲巖書院)에 배향해 불천위로 제사를 올리고 있다.

 

3부자를 같은 서원에 봉향하는 곳은 이곳 뿐이다. 죽헌의 이러한 효행정신을 이어받은 법산의 영천최씨 후손들은 대대로 효행을 했고, 문중 족보 행적에는 효행기록이 많이 눈에 띈다.


대표적인 효행사례로 시아버지(崔永祐)의 불치병을 며느리 안동권씨(崔鍊의 부인)가 신화(神話)나 전설(傳說)에서나 있음직한 살신성효(殺身成孝)의 효행은 유명한 이야기라고 한다.

 

당시 이러한 사실이 알려져 영남 일원의 선비, 학자들이 찬사의 글을 앞 다투어 보내와 ‘최효부 안동권씨 실기록’ 문집을 편찬하기에 이르렀다. 오암서원 입구에 최효부 안동권씨의 효행비와 여표비(閭表碑)가 세워져 있다.


최효부 안동권씨의 손자 최창곤(83·미정화학 회장)은 할머니가 생전에 살던 터에 ‘효부의 집’을 개축해 공덕을 기리고 있고, 효행상을 제정해 시상해오고 있다.


성주군수의 효부상, 대구 보화원의 효행표창 등 현재 효부상을 받은 사람이 8명(월막댁, 올바데댁, 사도실댁, 양전댁, 성천댁, 관동댁, 마천댁, 토실댁)이나 건재하고 있어서 성주군에서는 ‘효마을 법산’이라고 명명했다.


또 최회장은 “할머니께서 행한 살신성효의 효심이 우리 집안에만 머무르게 할 수는 없었다”며 사재 10억여 원을 들여 ‘법산 숭효원’(法山崇孝苑)을 건립했다. 현재 학생들의 단체 방문 및 효에 관심 있는 사람들의 발길이 잦아 효 문화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법산숭효원’은 국내 효자·효부각에 관계된 정려각 중 그 규모가 가장 크다.


상효당(尙孝堂)은 최효부 안동권씨의 살신성효의 정신을 기리는 상징적인 조물(造物)로서 목조한옥 큰 마루를 갖추고 있다. 그리고 지붕의 모든 기와 끝에 효(孝)자가 양각으로 새겨져 있는데, 이렇게 하면 영천최씨 후손들 중에서 불효자는 나오지 않을 것이라는 최 회장의 아이디어라고 한다.


그 외에도 최 회장은 영천최씨 문중의 위상을 대외적으로 드높이는 활동도 하고 있다. 일례로 지난 해 퇴계선생의 ‘도산서원’ 추계 향사에 도집례 초헌관(원장)과, 또 금년 봄 남명 조식 선생의 ‘덕천서원’ 춘계 향사의 초헌관으로 영남의 두 거유(巨儒)행사에 참여하기도 했다. 최창곤 회장은 앞으로 성균관과 자치단체의 추천을 받아 효행자 시상을 확대해 나갈 것이라고 한다.

  법산 숭효원 전경.


 

역사속의 인물

10世까지 정승 판서급 줄이어
무신 많아 국가 위기마다 앞장

영천최씨는 시조공 최 한(崔 漢, 연산부원군) 이래 1세에서 10세에 이르기까지 정승 판서급 고관대작 벼슬을 한 대도 거르지 않고 이은 명문거족으로 명성을 떨쳤다. 고려조에서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문무겸전한 잠영세족(簪纓世族)으로 발전했다.


대표적인 유명 인물로는 화약발명가 고려 말기 무신 7세손 최무선(崔茂宣, 1325~1395년)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최무선의 아들 8세손 최해산은 부친의 저서 ‘화약수련법’과 ‘화포법’을 통해 비법을 전수 받고, 군기시에 등용돼 여러 관직을 거쳐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가 됐다.


그리고 8세손 천곡(泉谷) 최원도(崔元道)는 고려 때 목은(牧隱) 문하에서 수학한 학자로 사간원 간의대부였으며, 언로(言路)의 중책을 맡았다. 친구 광주이씨 시조 둔촌 이집과의 영천고사는 오늘날 교육현장에서도 인용되고 있다.


그리고 조선 세종 때 문신이자 서예가로 이름을 떨친 10세손 최흥효(崔興孝)가 있다. 그는 홍문관직제학을 지냈으며 예서와 초서에 능해 ‘해동명필록’에 이름이 올라있다.


또 시조공 최 한의 14세손 최문병 의병장은 임진왜란 때 영천에서 화공으로 적을 섬멸했다.

 

의병장의 위패가 자인면 원당리 용계서원에 봉안돼 매년 음력 3월 15일 유림(儒林) 주관으로 향사를 올리고 있다. 현재까지 보존상태가 양호하고 희귀한 마구(馬具)인 보물 제747호 ‘최문병 의병장 안장’이 경산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그리고 14세손 난포 최철견(崔鐵堅)은 청주부사와 전라도사를 역임했고, 임진왜란 당시 향리 경산에서 의병을 일으켜 큰 공을 세웠다. 그 외에도 23세손 최범중은 경주영장을 지냈고, 그밖에도 문무급제자가 많아 관직에서 두각을 보이는 선조가 많은 것이 영천최문의 자랑이다.

◆고려와 조선시대 인물

시조 최한(始祖 崔漢):연산부원군, 2세 완(玩):상찰사, 3세 상의(尙義):좌의정, 4세 승주(承澍):전호위상장군, 5세 윤기(允琪):판도판서, 6세 소(소):진사, 7세 영(英):문하시중, 무선(茂宣):영성부원군, 8세 흡(洽):좌윤, 재종매서:황희정승, 용화(龍和):병마절제사도총제, 9세 일(壹):(父 元道) 판군기시사, 하영(河泳):이조판서, 10세 흥효(興孝):문과 홍, 예문관 직제학(명필)

현대 인물

‘초대 서울대총장 등 교육자 많아’

민족운동가, 민족교육자, 대수학자 등 수식어도 많은 초대 서울대학교총장 최규동 선생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서울시 교육감과 경기대 교수, 한국교육삼락회총연합회 회장을 역임한 최열곤 박사를 비롯해 최달곤 영진전문대학장 등 특히 교육계에 두드러진 인물들이 많다.

 

또 한 가지 특기할 점은 영천최씨는 효행문중으로 충효사상이 뛰어난 인물이 많다. 일찍이 법산파 입향조 죽헌(竹軒) 최항경 선생은 지극한 충효사상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각계의 영천최씨 현대 인물은 다음과 같다.


교육계:최규동 초대 서울대 총장, 최열곤 전 서울시교육감, 최인곤 홍익대 교수, 최재석 고대 교수, 최달곤 영진전문대학장, 최달곤 고려대 교수, 최종원 경성대 약대학장, 최성구 경북대 교수, 최성곤 상주대 교수, 최후곤 성균관대 교수, 최준한 경성대 교수, 최성관 안동대 교수, 최준수 국민대 교수, 최현주 안양과학대 교수, 최한용 어학연구가, 최주현 전남교육청 초등교육국장, 최태수 성북교육장, 최성주 용궁중상고 교장, 최문곤 약목초교 교장, 최석태 교육신보사 사장 등.


법조계:최주영 판사, 최주곤 변호사, 최석완 변호사, 최선애 변호사, 최은희 변호사, 최성곤 변호사 등.


정·군·관계:최영곤 전 국무총리 행정조정실(차관급), 최달희 전 참의원, 최경수 전 조달청장, 현 계명대교수, 최덕곤 전 하남부시장, 최갑동 육군준장, 최용근 학군단장(육군대령), 최성원 성주경찰서장, 최삼환 ‘최무선기념사업회’ 회장, 최성고 성주신문 사장 등이다. 그 외에도 우리나라 외과전문의의 선구자 최성장 박사를 비롯해 최형곤 의학박사 등 의료계에도 많은 인물들이 포진하고 있다.


재계:최창곤 미정화학(주) 회장, 최철수 코리아 인스트루먼트 회장, 최기성 신농제지(주) 회장, 최판곤 (주)대근토건 회장, 최상동 중소기업협동조합 충북지부장, 최정덕 대주관광 대표, 최정덕 그린랜드 회장, 최창권 금강고속 사장, 최억만(경북체육회 부회장) 경동화물 회장, 최유수 삼보인쇄 회장, 최항목 경원건설 사장, 최종홍 송원잔디 회장, 최한용 용성출판사 사장 등.


※그 외에도 각계에 많은 인물들이 포진하고 있지만 생략한다.


 

■ 인터뷰 

영천 崔씨 대종친회 최종호 회장

& 중앙종친회 최열곤 회장

최무선기념관 건립… ‘孝’ 문화 계승 발전 온 힘


대구시 수성구 지산동에 위치한 영천최씨 대종친회 회관을 찾았다. 영천최씨는 모든 지파종회를 망라한 대종친회 본부가 대구에 있고, 각 지역에 ‘지역종친회’를 두어 서로 유기적인 업무 협조로 종친회를 이끌고 있다.

 

대종친회는 최종호(72) 회장이 맡고 있는데, 경상남도 도청에서 공무원으로 출발했고, 그 후 사업을 시작하여 오랫동안 건자재업 정안상사를 경영했다. 그리고 대구 동북지구 로타리클럽 회장 등 현재 각종 봉사단체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중앙종친회는 최열곤(77) 회장이 십수년째 이끌고 있는데, 최회장은 서울시 교육감과 경기대학 교수, 그리고 한국교육삼락회총연합회 회장을 역임한, 교육계에서는 우뚝 선 거목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리고 부산종친회 회장은 최기당(판서공파)씨이고, 영천 종친회는 최무원(총재공파)씨가 지역 종친회를 이끌고 있다. 그리고 광주종친회는 최주현(미산공파)씨가 광주를 비롯한 전남북의 종친들을 대변하고 있다.


최종호 대종친회 회장과 최열곤 중앙종회 회장, 그리고 최일동 전임 회장이 배석한 가운데 대종친회 회관 영모정(永慕亭)에서 인터뷰가 이어졌다.

-대종친회와 지역종친회의 역할에 대하여 말씀해 주십시오.
鍾浩 회장-대종친회는, 영천최씨 전체의 각 종파를 주도 관리하고 있습니다. 집성촌이 대구 근교에 많이 거주하고 있어서 종친회의 관리가 용이하지만, 그 외 수도권이나 지방별로 지역종친회를 두어 본부에서 미치지 못하는 부분을 잘 관리해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서로가 유기적으로 연락을 취하며 종친회가 발전돼 가고 있는 것이 장점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종친회관이 넓고 깨끗하게 잘 관리되고 있습니다.
日東 전 회장-그 부분은 저의 재임 중의 일이니까 제가 답변하겠습니다. 건물이 노후하여 4년 전 태풍 ‘루사’의 영향으로 폐가가 되다시피 한 것을 대대적인 보수공사로 지붕과 천장을 고치고 기와도 다시올리고, 칠도 하여 현재 상태로 복원했습니다.

-특히 자랑스러운 선조는 
烈坤 회장-역사인물로는 최무선 장군을 들 수 있습니다. 일제 만행으로 국가가 풍전등화와 같은 시기에 화약 발명과 병선 개발로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자랑스러운 선조입니다.

 

명필가로 이름을 떨친 홍문관직제학을 지낸 최흥효 선조, 또 임진왜란 때 영천에서 화공으로 적을 섬멸시켜 혁혁한 공을 세운 최문병 의병장, 난포공 최철견 등이 있습니다.


또 명재상(名宰相) 방촌 황희(黃喜, 長水人)정승의 초취부인은 우리 영천최씨의 따님이었으므로 황희 양대 3상(兩代3相)과 혼척이 된 것 또한 자랑거리입니다.

-숙원사업이 있습니까 
鍾浩 회장-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항시 구국의 현장에는 우리의 자랑스러운 선조들이 있었지요. 금년 초부터 영천시에서는 과학기술부와, 경상북도 그리고 영천시의 예산을 지원 받아 부지를 확보하고 ‘최무선기념관’ 건립을 추진 중에 있습니다.

 

그리고 후손들이 대종친회 회관에 정기적으로 모여 뿌리의식 교육을 통하여 선조들의 훌륭한 업적을 소개하고 애종심을 가질 수 있도록 ‘후손교육계획’을 준비 중에 있습니다.

 

또 후손들이 관향지 영천의 사적지와 군산 진포대첩 기념공원, 진해 최무선잠수함 등 자랑스러운 우리선조들의 흔적을 확인시키는 순례행사도 계획하고 있습니다.

 

1639년 첫 족보 발행 후 임진왜란 때 화재로 대부분의 족보가 소실되는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1993년 발행까지 10여차례의 대동보를 발행했었지요. 앞으로 족보 발행시에는 한문투의 고정관념을 탈피하여 젊은 층에서도 이해하기 쉽도록 만들었으면 하는 바램도 있습니다.

 

그리고 전체 종친명단을 수록한 전자족보를 만들고, 종친회 역사를 전산화하여 한눈에 뿌리를 확인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이어서 할일이 많습니다.

  회장단. 왼쪽부터 최종호, 최열곤, 최일동 씨.

 

-종친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은 
烈坤 회장-종인이 많으면 재벌도 있어서 종친회에 기부하는 종인도 많겠지만, 우리 영천최씨는 이재(理財)부분에서는 취약한 것이 사실입니다. 역사적으로도 학자가 많았고, 충효사상에 충실하다보니 재물과는 거리가 있었나 봅니다.

 

앞으로 대구의 대종친회에서 많은 사업계획을 구상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종인 모두가 애종심(愛宗心)을 갖고 십시일반(十匙一飯) 참여의 정신을 발휘할 때라 봅니다.


그리고 지난 5월 훼철 된지 137년 만에 종인과 유림의 한결같은 염원으로 법산오암서원 복원 향사를 올리게 된 저력을 보고 단합된 힘을 보았습니다. 그 날 경향각지의 각 문중 유림대표들과 300여 종인들이 참여하는 큰 행사를 무리 없이 치러 내었음을 이 기회를 빌려 고마움을 전합니다.

-끝으로 대종친회 회장님께서 한 말씀 하시지요.
鍾浩 회장-우리 영천최씨는 종인이 전국에 2만명이 채 안되지만 투철한 국가관, 교육열, 충효사상 등 확고한 선조들의 사상이 잘 전수되고 있어서 어느 문중보다도 애종심이 있다고 자부하게 됩니다.

 

앞으로 향사 등 문중 행사나, ‘최무선기념관건립’과 ‘최무선기념사업회’에서 주관하는 추모 행사에도 더 많은 종인들의 참여로 자랑스러운 선조의 뜻을 기렸으면 하는 바램이 있습니다.

필자는 현장답사와 인터뷰를 통하여 조상을 위하는 사업이 얼마나 힘든가를 실감했다. 특히 오암서원 복원과 향사를 위하여 예산획득, 자금조달, 족의진작 등을 진두지휘하고 있는 법산대종회장 최열곤 박사의 숭조정신이 돋보였다.

 

그리고 수해복구, 법산교가설, 문집번역, 간행 등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하는 최회장의 정성을 보고 영천최씨 문중의 단합된 힘을 보면서 인터뷰를 마친다.


최종동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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