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비밀
달콤한 비밀
  • 이호선 숭실사이버대 기독교상담복지학과 교수
  • 승인 2016.07.15 13:36
  • 호수 5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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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지박을 아는가? 함지라는 것은 큰 나무를 쪼개 그 안을 파내어 만든 큰 그릇을 말하는데, 떡가루를 버무리거나 반죽할 때, 또 김장소나 깍두기를 버무릴 때 사용한다. 무겁기도 하지만 워낙 튼튼해서 가정에서 대대로 물려 사용했다. 지금이야 스테인레스에, 플라스틱까지 담아내는 그릇이 많아 질려서 못쓰지, 없어서 못쓰지는 않는다.
흔하디 흔한 것이 물자이고 널리고 널린 게 물건이라, 재활용품을 수거하는 날 나가보면 멀쩡하다 못해 내다 팔아도 될 것들도 쓰레기로 나온다. 주워다 쓸 것이 너무 많다보니 쓰레기마저 풍요인 세상을 보며, 우리가 이렇게 살아도 되나 싶은 생각이 들곤 한다.
사실 쓸 만한 것을 어김없이 주워오는 이들은 정해져 있다. 없어서가 아니라 아까워서, 부족해서가 아니라 버릴 수 없어서 집에 들인다. 괜한 물건을 들고 온다고 욕을 먹을까봐 물건을 들었다 놨다를 몇 번이나 하지만, 이내 물건은 가구가 되고 식기가 되고 급기야 식구가 된다.
젊은이들이야 창피해서 못 만지고, 중년이야 넘쳐서 안 가져오니 주인공은 정해져 있다. 노인들이다. 구질구질하다는 말도 이젠 익숙하고, 쌓아두는 것이 비효율적이란 말도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듣지만 오늘도 들고 들어온다. 왜 우리는 쌓는 자가 되었나?
태어나서는 지독하게 가난했고 일제 강점기에는 수도 없이 빼앗겼다. 전쟁 통엔 포화 속에 모든 것을 잃었고, 보릿고개엔 징그럽게 굶어봤다. 어려서는 없어서 못 먹었고, 결혼해서는 애들 먹이느라 못 먹었다. 가난하다는 말이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궁색하고 비참하게 하루 삼시 세끼를 그리워했던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렇게 ‘굶음’의 기억은 몸이 아니라 마음에 남는다.
‘굶음’은 머리에 흔적을 남긴다. 지금 모으지 않으면 다시 굶게 된다는, 지금 저장하지 않으면 곧 사라질 수도 있다는, 빈 공간은 곧 가난이라는 ‘강박’이 우리의 머리를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
매를 맞아도 먹고 싶었던, 훔쳐서라도 배를 채우고 싶었던 기억은 썩어도 못 버리게 하고 모아도 또 들고 들어오게 한다.
물론 잘 알고 있다. 가져와도 쓸 곳도 없을뿐더러, 쌓아둔 물건으로 치자면 다음 생애까지도 다 못쓴다. 그러나 버릴 수 없고, 빈 공간을 남길 수 없다. 버림은 다시 궁핍으로 가는 길을 내는 것이고, 저장은 궁핍의 공간을 메우는 지름길이니 말이다.
그러나 과연 우리는 가난에서만 저장의 이유를 찾아야하나? 저장이 박탈에 대한 트라우마 때문에만 발생할까? 아니다. 저장은 성취의 결과물이고, 저장은 지난 시간 노력의 전리품 전시회와 같다. 아는 것을 말하는 선생처럼 우리는 간장과 된장을 담는다.
숙련된 기술자처럼 나물을 말리고, 과학자의 실험처럼 매실청을 담는다. 정기적금을 넣으며 통장에 찍힌 숫자를 보는 기쁨으로 우리는 저장한다.
그리고 우리의 저장, 그 버리지 않는 습관으로 인생의 축제를 저장한다. 배냇저고리를 두고 이제는 귀밑머리가 희어져가는 아들 탄생의 기억을 보존하고, 이젠 중년이 된 딸의 첫 일기장을 펼쳐 7살 소꿉놀이 기억을 전달한다. 박물관에서나 볼 인두 다리미와 안테나를 벌려야 하는 대한전선 14인치 흑백 텔레비전, 100년이 넘게 쓰다 중앙이 우묵 들어간 목침, 진품명품에나 나올법한 얼룩진 병풍이며, 곳곳에 떨어져 있던 삐라, 쓰지 않는 연탄집게, 속이 빈 좀약통, 88성냥통까지 세월이 아니라 삶의 기억을 저장하고 있다. 하나하나가 모두 이야깃거리이고, 기억의 함지박이다.
왜 모으냐고 묻거든, 또 주워오느냐고 말하거든 이제는 이리 대답하자. 기억을 모은다고, 이야기를 저장한다고. 아무도 모르게 모은 기억, 누구도 모르는 이야기를 저장하는 그 기쁨, 그 달콤한 비밀을 누가 알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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